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화
자…… 잠깐…… 이게 뭐지?
나는 놀란 눈으로 격하게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화면이 마치 공중에 떠 있기라도 하듯 그 글자들은 손을 투과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거…… 저번에 봤던 시스템 창 맞지?
“오늘은 모빌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아가씨. 훌쩍.”
마야의 반응을 봐서는 이 창은 아마도 내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마야는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람. 어떻게 아가씨를 혼자 두고 나갈 생각을 했냐고. 오, 마야.”
잠시 후 메시지가 희미해지다가 사라졌고, 시야의 왼쪽 옆으로 반투명한 푸른 네모들이 드러났다.
맨 윗줄은 ‘메뉴’라는 글씨가 있었고 그 아래로 ‘프로필’, ‘퀘스트’, ‘인벤토리’, ‘인물 열람’, ‘스킬’, ‘조합’, ‘상점’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중 활성화된 것은 ‘프로필’ 그리고 ‘인벤토리’였다.
나머지에는 다 자물쇠 표시가 달려 있었다.
이 세계, 사실은 전부 게임 아닐까…… 아니,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우유를 먹었는데 이렇게 진짜로 배가 부른 게임이 어디 있어.
시선을 ‘프로필’에 집중하자 곧 다른 창이 떴다.
역시 내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 듯 이렇게 조작하는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게임 시스템 같은 이 화면이 처음에 봤던 ‘환생 특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 줄.
‘거울에서 본 것보다 귀여워!!’
프로필 창에는 동그란 액자 안에 내 얼굴이 있었는데, 제법 자란 은발로 머리가 살짝 덮여 있었고, 동그란 녹색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성별의 구분은 되지 않는 아기였지만, 이 정도면 아기 모델을 해도 될 만큼 예쁘고 귀여웠다.
[이름 : 샤샤 윈체스터(LV.1)]
[직업 : 무직]
[특성 : 빈둥거리기 좋아하는 게으름뱅이]
[능력 : 1(종합 능력치 보기가 해제되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그 아래 적힌 표현은 나를 발끈하게 했다.
100일 아기에게 꼭 무직이라는 단어를 써야겠어?
게다가 빈둥거리기 좋아하는 게으름뱅이라니, 너무하잖아.
아무튼 내 레벨이란 것이 낮아서인지 아직 대부분의 기능에 자물쇠가 달려 있는 것 같다.
처음에 ‘전설 등급 운명’이니 뭐니 하던 게 생각나 기대했었는데 생각보다 초라한 프로필에 조금 흥미가 식었다.
다음으로 나는 메뉴 중 인벤토리를 선택했다.
뭔가 받았다고 떴으니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여덟 칸밖에 없는 내 비루한 인벤토리에는 아이템이 세 개 있었다.
이게 그 ‘100일 아기의 까꿍 패키지’인가.
각 품목들을 보자 해당 품목들에 대한 설명 상자가 떴다.
[초심자의 길잡이 (1개) : 스스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아기 상태의 당신을 위해 당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주변의 정보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줍니다. 아기가 이해하기 어려울 만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행복의 딸랑이 (1개) : 이 딸랑이를 흔들면 분당 0.01의 근력이 증가합니다. 이용자의 안전을 위해 일일 사용 시간은 30분으로 제한됩니다.]
[분유 강화제 (3개) : 제국 최고의 우량아가 되고 싶으시다고요? 이 분유 강화제를 사용하면 일주일 동안 몸무게가 평소 속도의 2배로 증가합니다.]
곧바로 첫 번째 아이템을 사용했지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템이 사라진 것을 보면 사용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나머지는 별 필요 없어 보이니 우선 놔둬 보자.
나는 메뉴를 계속 훑으며 ‘고객 센터’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오늘은 아가씨 눈이 유난히 말똥말똥하네요.”
마야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흑흑,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께 제가 실수를…….”
마야의 자책은 쉽게 가시지 않는 듯 그녀는 틈만 나면 훌쩍거렸다.
그녀의 주접에 신경을 끈 내 작은 심장은 이 이벤트에 계속 쿵쿵쿵 뛰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불행이 예정된 소설 속 조연으로 빙의되어 앞이 막막했는데, 한 줄기 빛이라도 비추는 느낌이었다.
레벨이니, 퀘스트니…… 뭔가 다 게임 용어 같기는 하지만 쓸모가 있을 거야.
아니, 꼭 쓸모가 있어야 해.
나는 기대에 차서 손발을 허우적댔다.
* * *
……그리고 기대가 무색하게 열흘가량이 지나갔다.
나는 젖병을 힘차게 빨며 폭풍 성장했고, 이제는 뒤집기뿐만 아니라 되집기 같은 어려운 과제도 간단히 해내는 늠름한 아기가 되어 있었다.
바닥이 움푹한 의자에 앉혀 놓으면 꽤 오래 앉아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내 프로필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여전히 나는 레벨 1의 빈둥거리기 좋아하는 게으름뱅이였다.
단지 내가 사용한 아이템이 효과가 있는 것인지, 마야가 틈만 나면 내게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을 해 주어 원작에서 몰랐던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곳 세계관은 연 나이를 쓰기 때문에 초가을 정도에 태어난 내가 해가 바뀌었다고 억울하게도 나이로는 벌써 두 살이 되었다거나.
레카르도는 가문의 원로회 역할을 하는 아피니제와 사이가 좋지 않으며 방계 혈족들의 경외와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다거나.
진 윈체스터와 오셀로 윈체스터의 방, 그리고 레카르도의 집무실은 내가 있는 본관 2층과는 거리가 있는 북쪽 건물에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원작에서 피상적으로만 듣던 윈체스터 가문 내의 이야기는 꽤 흥미롭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마야의 잡담을 들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어머, 아가씨. 공자님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으신가 봐요. 공자님들의 목소리가 들리는데요?”
지금의 나는 유아차 같은 곳에 앉아 마야와 함께 온실 산책을 하고 있었다.
“으애애!”
내가 폭풍 옹알이를 하자 마야는 ‘그래요, 그래요’ 하면서 유아차를 계속 밀었다.
“오라버니들이 보고 싶으신 거죠?”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요. 우리도 얼른 가서 인사해요.”
피해 가라는 말이야!
내 내면의 외침에도 마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아차를 밀었다.
이내 코너를 돌았을 때,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받아라! 진!”
따뜻한 온실에는 잔뜩 젖은 진과 오셀로가 보였고, 각자의 손에는 물총이 들려 있었다.
내가 알던 현대의 물총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누르면 물이 나오니 물총이라고 하겠다.
“차가워.”
“풋.”
여덟 살의 두 녀석들은 꽤 아이다운 모습이었다.
“책상머리에서 무게나 잡더니 젖은 꼴이 볼만하군, 진! 으악!”
열심히 떠들던 오셀로가 진에게서 정통으로 물세례를 맞았다.
“윽! 진!!”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물론 진은 오셀로에 비해 성숙하게 노는 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머리카락이 잔뜩 젖어 있었다.
“아가씨, 공자님들이 물총놀이를 하시나 봐요. 우리 다음에…….”
공자들을 보필하느라 허둥대는 하인들을 보며 마야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때, 진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너…….’라는 듯 진의 입술이 달싹였을 때였다.
“으애애!”
차가운 물길이 내 얼굴을 적셨다.
나는 깜짝 놀라 진저리치다가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으애앵, 하는 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셀로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총을 들고 있었다.
“실수했네.”
일그러지는 그 녀석의 입꼬리를 보며 나는 저 자식이 분명 고의로 이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
놀란 마야는 유아차에서 나를 들어 토닥였고, 나는 계속 빽빽 울었다.
나쁜 놈!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잖아!!
“오셀로, 너…….”
“실수였다고, 진.”
진이 눈빛으로 오셀로를 다그치자 오셀로는 느긋하게 변명했다.
결국 작은 한숨을 내쉰 진은 마야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나쁜 놈! 나쁜 오셀로! 나는 히끅거리며 마야의 품에 안겨 방으로 되돌아갔다.
모처럼 산책을 나왔는데 엉망이 되고 말았다.
* * *
“오셀로 공자님께서도 아직 어리시다 보니…… 아가씨에게 원망이 있으신 것 같아요.”
잠결에 마야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친모는 아니셨지만…… 오셀로 공자님은 부인을 특별히 여기셨으니까. 짧은 시간이라 아쉬움이 크셨을 거야.”
이 목소리는 아마도 시녀장일 것이다.
그녀는 윈체스터가에서 오랫동안 일한 부인으로, 아기를 돌보는 데 미숙했던 마야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었다.
종종 마야 대신 나를 봐주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대뜸 물총을 쏘실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어요. 아가씨께서 많이 놀란 것 같으세요…….”
놀랐고말고.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니 오셀로의 입장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트리샤는 오셀로에게 좋은 사람이었고 트리샤를 앗아 간 원흉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공자님들을 보면 눈치껏 피하게.”
“알겠습니다, 부인.”
마야와 대화를 마친 시녀장은 방을 나섰다.
옅은 바람에 모빌이 살랑였고 나는 쌕쌕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묵직한 거지?
내 머리가 무겁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녀장을 보낸 마야는 내게 다가와 희미하게 눈을 뜬 나를 보고 얼굴을 들이댔다.
“어머, 깨어나셨어요, 아가씨?”
마야의 갈색 눈동자 표면에 대자로 누워 있는 팔다리 짧은 내 모습이 비쳤다.
“그런데…… 얼굴이 조금 붉어지신 것…… 어머나!”
내 볼을 쓰다듬다 이마에 손을 올린 마야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이번에는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대어 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앞이 어질어질했다.
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이 나요,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