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화
그날 밤 내 방이 있는 2층 복도는 꽤나 소란스러워졌다.
내가 열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엄마를 잃을 때 보았던 의사를 포함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섯 명이나 우르르 들어왔고, 마야는 걱정에 잠긴 눈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태어난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게 집중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를 어째요, 아가씨.”
하녀들은 연신 미지근한 물을 받아 내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으슬으슬 몸이 추워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감기…… 감기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찰을 끝낸 의사가 의견을 말했다.
“열은 있지만 증상이 심한 것은 아니니, 약을 드시고 지켜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놀라운 것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레카르도 공작…… 그러니까 아빠가 바로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요즘 일이 한가한 것일까? 엄마가 죽을 때도 한참 늦은 아빠가 왜……?
“감기에 걸릴 일이 있었나?”
아빠의 서늘한 시선이 마야에게 향하자 마야는 쩔쩔맸다.
“저…… 그게…….”
나는 힘이 없는 와중에도 손발을 바둥거리며 속으로 외쳤다.
우리 마야 괴롭히지 마! 마야 때문이 아니란 말이야! 아빠가 제일 나빠!
그리고 그때,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던 시녀장이 아빠에게 보고했다.
“공작 전하, 사실은…….”
아무래도 아까의 장면을 본 고용인이 한둘이 아니니 이대로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시녀장의 보고를 받은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오셀로가?”
시녀장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카르도는 인상을 한참 동안 찌푸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한 달 동안 근신 명령을 내리겠다. 가서 전해라.”
그 말에 시녀장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공작 전하, 공자님께서도 아가씨가 아프시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실수로 하신 일인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윈체스터의 규율이다.”
그는 시녀장의 말을 차갑게 끊고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짙은 녹안에 담긴 생각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상황을 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이런 표정인데, 내가 본격적으로 발병해서 매일 비실거리면 더 심하겠지.
아픈데 눈치 주는 것만큼 서러운 게 없는데 걱정이다.
“후…….”
이내 인상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레카르도가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은 너무도 차가웠기에 나는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손에 가해진 무게는 내가 뿌리치기에는 강했고, 나는 쌕쌕거리며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녹색 눈동자 속 무언가가 짙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뒤 그는 내 이마에서 손을 떼고 제 장갑을 다시 꼈다.
그리고 시녀장에게 명령했다.
“이 아이의 경과를 매일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
이내 그는 뒤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은발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나는 콜록 기침을 했다.
“아가씨…….”
마야는 안타깝다는 듯 나를 다독였고, 의사들은 즉석에서 약을 제조하고 있었다.
잠시 뒤 약의 제조를 끝낸 의사가 마야에게 봉지를 건넸다.
“열을 내리게 하는 약입니다.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어리신 몸으로 약이라니…… 정말 괜찮을까요?”
“아기에게도 안전성이 검증된 약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약을 먹지 않고 열이 오르는 것이 더 위험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제조한 것은 가루약이고 우유에 타 먹이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마야와 하녀들에게 밤새 미지근한 물에 젖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 주라고 했다.
나는 열에 달뜬 채 흔들리는 모빌을 바라보았다.
“아가씨이…… 드셔 보아요.”
벌써 감기라니…… 인생이 험난하다.
마야가 우유에 약을 탄 채 내 입에 물렸다.
아…… 써……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드셔야 해요. 네?”
나는 오만상을 쓰며 젖병을 밀어내려 했지만 마야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그냥 참고 먹기로 했다.
* * *
밤이 깊었을 무렵 새록새록 잠든 샤샤의 방문을 열고 작은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년의 분홍색 머리카락은 단정히 정돈되어 있었고, 왼쪽 눈의 아래에는 점이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난리가 난 거야?”
물수건이 담긴 통들이 바닥에 줄지어 있었고, 마야는 소파의 등받이 쪽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오셀로는 엉망이 된 방 풍경에 흠칫해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쭈뼛거리며 샤샤에게 다가갔다.
하얗고 작은 여동생은 만세 포즈를 취한 채 잠들어 있었다.
― 샤샤가 열이 나고 있대. 아까 네가 쏜 물총에 맞아서인 것 같아.
― 공자님…… 송구하지만 당분간 공작 전하께서 근신 명령을 내리셔서, 바깥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들은 오셀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이 뜨끔했다.
그냥 아기를 놀려 주려고 했던 것일 뿐이다.
조금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마음에 안 드는 아기…… 그 작은 존재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
진의 말대로 샤샤라는 이름의 저 아기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제가 누구인지, 어떻게 세상에 나온 것인지조차.
그러니까 그게 가장 짜증 나는 포인트였다.
트리샤는 꽤 괜찮은 여자였다.
― 공자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요. 퀠른은 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요.
트리샤를 죽게 해 놓고 태연하게 우유나 빠는 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놀려 줄 생각일 뿐이었는데…….
“…….”
오셀로는 침대 안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숱이 많아진 눈썹이 눈 아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얼굴은 포동포동 살이 올라 있었고, 손과 발은 하얀 도자기 인형처럼 작았다.
한참 동안 잠들어 있던 샤샤를 보던 오셀로가 조심스레 샤샤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휴…….”
열이 내렸는지 다행히 샤샤의 이마는 뜨겁지 않았고 오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은근히 치미는 이 안도감이 어쩐지 짜증스러웠다.
기사들과 고용인들을 따돌리고 자신이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이 아기에게도 짜증이 났고.
빤히 아이를 보고 있는 제 모습도 짜증이 났다.
“더 골려 줄걸 그랬어.”
샤샤를 보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오셀로는 흥, 하며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때 오셀로의 손을 작은 주먹이 꾹 움켜잡았다.
“……?”
다시 샤샤에게 시선을 돌린 오셀로의 녹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앙증맞도록 작은 샤샤의 두 손이 오셀로의 엄지와 검지를 꼭 쥐고 있었다.
샤샤의 눈은 감겨 있었고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지만, 제 손을 잡은 아기의 온기는 작은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너는…….”
오셀로의 입술이 달싹였다. 바보 같은 것.
너 지금 나 때문에 아프다고. 내가 너한테 물총을 쏘아서 열이 나잖아.
하지만 샤샤는 그조차 모른다는 듯 태연히 오셀로의 손을 제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 아기가 태어나면 예뻐해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오셀로의 귓가에 문득 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른 배를 안고 자신과 함께 산책하던 트리샤가 당부하던 말이었다.
오셀로는 아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손을 통해 아기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 아기는 싫어, 시끄럽게 빽빽 울어 대기나 하고.
트리샤의 배가 많이 나왔을 무렵, 심술궂은 말로 그녀의 당부를 그냥 넘겼었다.
― 태어나면 분명 예뻐하게 될 거예요. 오셀로 공자님은…… 따뜻한 분이시니까.
심장 박동이 커져 갔다.
제 엄지와 검지를 꼭 끌어안고 있는 샤샤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오셀로가 몸을 숙였다.
샤샤의 얼굴에 오셀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순간 샤샤가 입을 뻐끔거리며 눈썹을 찡긋 찡그렸지만 다시 평안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오셀로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 * *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을 때였다.
밤늦게까지 샤샤의 열을 식히다 잠들어 버린 마야가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어둑어둑했으니 새벽 여섯 시 정도 된 모양이었다.
열이 내린 것을 두 번이나 확인하고 잤으니 별일은 없겠지……?
샤샤는 다행히 약이 든 우유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잘 먹었다.
식욕 하나는 걱정 없다니까.
눈을 비빈 마야는 샤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서서 아기 침대로 다가갔다.
“어머…… 세상에!”
그리고 아기 침대를 확인한 순간 마야는 놀라서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까딱 소리를 내었다간 아가씨가 깰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성인 침대의 반밖에 되지 않는 아기 침대 위에는 몸을 움츠린 오셀로와 샤샤가 사이좋게 잠들어 있었다.
샤샤의 한쪽 손은 오셀로의 새끼손가락을 꼭 붙잡고 있었고, 잠들어 있는 오셀로의 입에는 편안해 보이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