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화
트리샤 퀠른, 자작가의 양녀이던 그녀는 볼록한 배를 감싸 안고 가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이를 낳다 죽었다.
그녀는 레카르도와 사냥터의 호숫가에서 만났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그녀를 가문에 들인 뒤, 누구도 그녀 배 속의 아이가 레카르도의 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 저는 퀠른의 사명에 충실할 뿐이랍니다.
진은 영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라고 쳐도 오셀로는 그녀에게 꽤 심술을 부리고 못되게 굴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 트리샤가,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해 줬어요.
원래부터 한 가문이었던 것처럼 잘 적응하던 그 여자는 너무도 쉽게 떠났다.
발칙하게도 레카르도 자신을 꼭 닮은 어린 여자아이를 하나 남겨 두고.
성에 도착하기 전 부관을 통해 편지를 하나 전한 채 말이다.
‘당신의 조상이 시초의 고룡 메키우스에게 맹세했던 수호의 언약을 지켜 주셔서 감사해요.
당신, 그리고 다른 세 주인들의 희망을 메키우스께서는 저의 태에 담았습니다.
저는 운명의 최전방에서 맞서게 될 어둠의 주인인 공작께 그 열쇠를 건네드리고 떠나겠습니다.
공작께서는 가장 적합한, 선택받으신 분.
메키우스의 아이는 정해진 날이 되면 검은 연못 앞에 설 거예요.
그 연못은 너무 깊고 검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죠.
공작님의 깊고 검은 마음처럼요.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에요, 운명을 스스로 극복한다는 것은.
아이는 알에서 깨는 것조차 실패해 무수한 밤과 낮을 되돌아갔겠죠.
하지만 아이가 극복하게 되는 날,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을 해내게 될 거예요.
부디 그때까지 아이를 잘 지켜 주세요.
꿈의 수호자 트리샤 퀠른.’
레카르도는 트리샤가 태교를 핑계 삼아 가꾼 온실을 거닐었다.
이름 없이 새하얗고 처연한 꽃들이 아름다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뻗어 나와 꽃잎을 감쌌다.
얇은 꽃잎은 파스슥 마르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키는 방법을 알려 해 본 적이 없었다.
망가뜨리지 않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그것은, 쉬이 손대지 않는 것.
차갑고 쓸쓸한 비틀림이 잠시 레카르도의 입가에 거짓말처럼 머물다가 사라졌다.
* * *
“우에, 우에에.”
한적한 오후, 나는 말랑한 재질에 향긋한 향기가 나는 ‘토끼’를 찹찹 빨고 있었다.
이가 하나 났는데 다른 이도 올라오려는지 잇몸이 간지러웠다.
“아가씨, 턱받이 갈아 드릴게요.”
마야는 축축해진 내 턱받이를 빼고 뽀송한 새 턱받이를 다시 채워 주었다.
찹찹, 찹찹, 나의 신경은 온통 토끼에 쏠려 있었다.
토끼 안에는 차이베리라는 과일이 들어 있었는데 열심히 빨면 달콤한 과즙이 나왔다.
물론 이렇게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면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맛있나 보군.”
당연하지. 찹찹.
어…… 그런데 방금?
마야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굵어진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자 보인 얼굴에 나는 질겁했다.
히이이익!
진, 네놈이 왜 여기에.
말끔한 복장을 한 진이 팔짱을 끼고 곁에 서 있었다.
다혈질에 속마음이 겉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오셀로와는 달리,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말이다.
“공자님께서 아가씨를 보러 오셨나 봐요.”
마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바짝 얼어붙은 내게 고개를 살짝 내밀며 진이 눈을 맞추었다.
“샤샤, 날씨도 좋은데 나와 산책하자.”
그 말에 나도 흠칫, 마야도 흠칫했다.
“저…… 공자님.”
마야는 곤란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씨 감기가 나은 지도 얼마 되지 않으시고…… 위험하실 수도…….”
“온실에서 산책하면 되잖아. 그리고 위험하다는 건 내가 샤샤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진의 직설적인 물음에 마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아니, 그럴 리가요. 공자님이 아직 어리시고…….”
“유아차 정도도 끌지 못할까. 정 불안하면 마야가 뒤에서 따라오면 되겠네.”
역시 보통 여덟 살의 말빨은 아니다.
“오셀로도 근신 중이라 심심하단 말이야. 마야가 나랑 놀아 줄 건 아니잖아.”
진이 입술을 비틀며 마야에게 말했다.
진에게 말려든 마야는 어물거리고 있었고, 나는 진에게 강렬한 항의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진은 피식 웃어 보이며 내 불안을 가속시켰다.
그래, 이럴 때 방법은 하나뿐이다.
“흐…… 흐…….”
나는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몇 번 해 봤는데 이 일을 할 때는 흐름과 리듬이 중요했다.
진이 눈썹을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때다.
“우아아아앙!!”
나는 거칠게 울음을 토해 냈다. 성공!
한 번 울음이 터져 나오자 목구멍 속에서 파도처럼 울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아가씨!”
마야가 내게 다가와 구원하려던 순간이었다.
“어서 태울 것 가져와. 얼른 나가고 싶어서 이렇게 울잖아.”
자…… 잠깐! 해석이 잘못되었잖아!
마야는 진의 말에 흠칫하더니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진과 함께 남게 되었고, 우렁차게 울던 울음은 잦아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은 달래 주지도 않고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내가 히끅거리자 진은 살짝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춘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거 나한테 안 통해, 샤샤.”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훅 흘러들었다.
이 자식 뭐야!
* * *
결국 나는 유아차를 타고 진과 함께 온실 산책을 해야만 했다.
먼발치에서 마야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따라오는 것이 힐끔 보였다.
나와 마야의 애절한 눈빛은 안중에도 없는지 진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우앙, 우아아앙!”
나는 그와의 산책이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오지 않는 울음을 쥐어짜 보았다.
그러자 진이 잠시 유아차를 멈추어 세웠다.
“꽃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우는구나.”
이내 그가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때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그림자의 색과 비슷한 진회색의 기운이 진의 손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더니 천천히 꽃을 부식시키는 것이다.
마치 꽃이 지는 과정을 빠르게 재생하는 것처럼, 서서히 말라비틀어지는 꽃잎이 떨어지기까지는 10초가량밖에 걸리지 않았다.
꽃을 보고 바짝 굳어 있는 내게 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재미있지? 원하면 더 보여 줄 수도 있어.”
그리고 다시 유아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싹수가 노란 놈 같으니라고. 아기에게 협박을 하다니.
역시 어둠의 윈체스터가의 장남답다.
그나저나 방금 본 것이 흑염의 능력인가……?
진이 이 정도면 레카르도 공작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다.
하, 하필 이런 집안에서 병약한 미래가 예정된 딸로 태어나다니…… 내 인생!
“벌써 말도 알아듣고, 역시 재미있는 게 생겼어. 앞으로가 기대되는걸.”
진은 즐겁다는 듯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며 걸었다.
“오셀로 녀석은 늘 제멋대로라 진득한 맛이 없거든. 하나에 열중하게 되면 미친놈처럼 집착하는 게 단점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영 산만해서.”
“히끅.”
“물론 나도 내 장난감을 오셀로에게 빼앗겨 본 적은 없어. 질리는 걸 준 적은 있어도.”
진의 나긋한 목소리에 으슬으슬 한기가 올라왔다.
책에서 본 진과 오셀로 둘 다 엄청난 악당이었다. 어쩐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히끅.”
“추워, 샤샤?”
아까 울음의 여파로 내가 딸꾹질을 하자 진이 다시 유아차를 멈추어 세웠다.
그러더니 제가 걸친 머플러를 목에서 뺐다.
그가 머플러를 쥐고 내게 손을 뻗는 모습이 무서워서 나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아무 움직임이 없자 나는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진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가학적인 성향이 이렇게 어릴 때부터 드러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을 바싹 경계하는 내 모습을 즐기듯 한참 동안 나를 보고 있었다.
이내 진의 시선이 움찔대는 내 통통하고 작은 손가락에 향했다.
“즐겁네. 이러면 곤란한데.”
소년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귓가로 들려왔다.
마치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 같이 들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