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9화
상태창이 뜨자 나는 곧장 새로운 기능인 ‘인물 열람’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다섯 개 정도의 목록이 보였고 아래로 내리니 더 많은 리스트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맨 위의 세 개를 빼고 다른 리스트는 회색으로 되어 있어 비활성화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맨 위의 리스트 셋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차례로 박혀 있었다.
만화 찢고 나온 듯한 레카르도 윈체스터를 보자, 상세한 인물 열람이 팝업처럼 떴다.
[1. 레카르도 윈체스터
칭호: 흑염의 지배자
인과율 0.5%]
오…… 흑염의 지배자?
그런데 인과율은 뭐지?
이내 그 밑으로 내렸다.
[2. 진 윈체스터
칭호: 없음
인과율: 1.5%]
[3. 오셀로 윈체스터
칭호: 없음
인과율: 1%]
하늘색 머리와 분홍 머리 악당 오빠들.
얄미운 실물과 다르게 박혀 있는 사진은 예쁘게 생긴 아동 모델을 보는 느낌이었다.
역시 인과율의 의미에 대해서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업적을 조기 달성하였다는 이야기는 뭘까.
예상치 못한 메시지를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서 날 죽여 줘, 하며 샤샤는 고통스럽게 에반에게 애걸했다. 그 텅 빈 눈에는 그녀가 지내 온 지옥 같은 나날들의 잔상이 맺혀 있었다.]
불치병에 시달릴 때 그녀의 고통이 얼마다 지독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었다.
[그러나 에반은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쳤고, 그녀는 다시 절망에 쓰러지며 오열했다.]
난 절대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지도 않고 쓸쓸히 세상 하직하지도 않을 테다.
그런 결말은 절대 싫다! 원작 싫어!
“아가씨!”
인물 열람창을 노려보고 있는데 마야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우리 아가씨, 또 서 계시네요. 이제 자야죠.”
아기의 몸이 참 신기한 것이, 뭔가 하나를 배우면 그것을 주야장천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
일어서는 것을 배운 나는 틈만 나면 일어서고 있었고 말이다.
“우오옹.”
나를 눕힌 마야를 말똥말똥 바라보자 그녀는 자장가 소리가 나오는 오르골을 열 바퀴쯤 돌려주었다.
“귀여워라. 이불 덮어 줄게요, 아가씨.”
따스하게 나를 보는 마야의 얼굴이 보였다.
“잘 자요, 아가씨. 좋은 꿈 꾸세요.”
이내 그녀가 내게서 돌아섰다.
내 방 옆쪽에 위치한 공간에서 쪽잠을 자며 밤새 여러 번 나를 확인하는 것이 마야의 밤 일과였다.
“우아! 우아!”
손을 펴고 모빌을 잡으려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마야에 대한 정보는 왜 인물 열람에 나오지 않는 것일까.
아마 이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이 아니어서일까.
윈체스터가의 세 남자만 나온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중요한 인물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인물 열람으로 확인할 수도 있겠다.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 * *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여전히 윈체스터 저택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 보이는 손과 발이 전보다 훨씬 커 보였다.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그리고 나는 달빛이 들어오는 어둡고 웅장한 방에 혼자 서 있었다.
[인물 열람 오픈 특전, ‘유일한 가족― 과잉보호’ 엔딩의 맛보기 영상입니다.]
[※인과율 100%를 달성하면 스토리 진행과 상관없이 랜덤 특전 엔딩을 맞이합니다.]
[사용자의 정신적 충격을 고려하여 전체 연령가로 재편집되었으며, 실제 특전 엔딩은 맛보기 영상과 다소 상이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는 푸른빛을 내는 창이 떠 있었다.
근데…… 특전 엔딩이라고……?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자, 마치 하늘에서 강림한 것 같은 은발의 여자가 보였다.
스무 살쯤 되었으려나. 눈을 떼기 힘든 아름다움이었다. 설마, 나 이렇게 자라나?
웅장하지만 을씨년스러운 기운의 이 방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지만 발소리가 들리자 내 발은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나는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고정된 상황에 정신만 빙의한 것일 뿐, 스스로 움직이거나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자 내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고 내 안의 무언가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보인 것은 레카르도 윈체스터…… 아빠?
아니, 머리카락 색이 다르다.
레카르도 윈체스터만큼 키가 크고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었지만 분명 20대로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의 머리칼은 하늘색이었고 눈동자에는 심연에서 온 듯한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들었다.
“오라버니…… 저, 나가고 싶어요. 벌써 석 달째 여기 있으니 너무 힘들어요…….”
내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라버니라면 역시, 진인 모양이었다.
와……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크는구나.
얼굴만 봐서는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아버지를 뵙고…….”
“그분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야. 로젠토의 겨울은 가혹하니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가게 해 주세요. 언제까지 저를 가두어 놓을 거예요.”
이내 진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순간 그의 뒤에 흑염의 검은 기운이 도는 것처럼 보였다.
“널 위한 거야. 그 약한 발목으로 혹독한 땅을 딛게 할 수는 없지.”
나직한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단조로웠다.
“매일 저녁 주시는 차에 녹지 않은 약 가루를 발견했어요. 그거…… 오라버니가 일부러 그러시는 건 아니죠? 그걸 먹지 않았더니 전보다 몸에 힘이 돌고…… 체력이 돌아오는 느낌이에요.”
나오는 대로 말을 한 내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진이 내게 약을 먹이고 있다고?
“진실을 말해 주세요, 오라버니.”
진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내 숨을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
진은 대답 대신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손이 금방이라도 내 목을 비틀어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내 그가 살짝 상체를 숙이더니 내 귓가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에반 테일러스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했잖아, 샤샤.”
목 부근에 소름이 확 돋았다. 갑자기 주인공 이름은 왜 나오는 거야?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내 가족이 위험한 세상에서 고통받는 게 싫어. 이렇게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한 네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면 설마…….
코끝으로 진한 혈향이 스며들었다.
“상처받기라도 하면 내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죽여 버리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지는데 말이야.”
“오라버니, 제발.”
“무책임하네, 샤샤. 그 힘을 폭주시킨 건 너잖아. 세상은 이미 어둠으로 뒤덮였고.”
오싹한 소름이 돋으며 몇 가지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초토화가 된 윈체스터 영지와 시체가 되어 널려 있는 사람들.
“오…… 오라버니, 언제까지나 여기 갇혀 있을 수는 없어요…….”
“널 내보낼 생각 없어.”
묘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를 내뱉은 그의 눈에 짙은 광기가 번뜩였다.
진의 입술이 비틀리며 잔혹하게 달싹였다.
“내게 의지해, 샤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유일한 가족이야.”
이내 그가 몸을 숙이고, 멍투성이의 내 발목에 무언가를 걸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한 어둠의 세계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발목에 족쇄가 채워지는 소리가 철컥, 하고 들려 왔다.
“영원히 지켜 줄게.”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눈앞에는 모빌이 달린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안도감과 함께, 방금 꾸었던 꿈 아닌 꿈을 떠올리자 욕지거리가 밀려왔다.
이게 뭐야, 시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