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화
“아가씨, 오늘은 왜 이렇게 입맛이 없으세요.”
퓨레를 두 스푼 먹고 입을 꾹 닫자 마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입맛이 없을 수밖에. 망할, 망할, 제기랄!
아까 꾼 꿈을 떠올리자 속이 메슥거리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충격은 현실에 베드 엔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과율이라는 것이 잘못 올라가 100%가 되면…… 아까 꾼 꿈과 같은 미래가…….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입술도 파래지셨어요.”
미친, 과잉보호라니.
윈체스터 가문의 남자들이 반쯤 미친놈이라는 것은 소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세계 최악의 악당 가문이니 사고방식이 정상일 리가 없지.
우리 가문 필독서인 그 유아 전집만 봐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감금 엔딩은 너무하잖아.
게다가 그게 전체 연령가로 편집된 장면이라고 하면 실제는 더 참혹할 수도…….
상상하던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오한도 있으신 것 같아요.”
마야는 나를 걱정하며 호들갑을 떨었고 잠시 후 의사가 진찰을 왔다.
나를 진찰한 의사는 뭔가에 놀란 것 같다는 진단을 내리고 아이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파라스 향을 처방했다.
의사가 돌아가고 나는 인물 열람을 다시 확인했다.
아빠와 오셀로보다 진의 인과율이 더 높아서 아마 진 특전 베드 엔딩을 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빠나 오셀로의 특전 엔딩은 어떨까.
진보다 더 심하면 심하지, 덜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였다는 대사를 유추해 보면 내가 알고 있는 소설의 원작보다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 같고.
‘우선 아빠나 오빠들과의 마주침을 피해서 인과율이 높아질 상황을 줄이자. 어차피 엘릭서를 찾기는 해야겠지만…… 최대한 빨리 가출해야겠어.’
의사가 처방한 향긋한 파라스는 내 불안한 마음을 차츰 진정시켰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누군가 내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마야는 밖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구지?
하지만 나는 눈을 꼭 감고 잠든 척을 했다.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어떤 시선이 한참 동안 나를 응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고 그 누군가가 돌아서기만 기다렸다.
한참 뒤 다시 발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장 인물 열람을 확인했다.
[1. 레카르도 윈체스터
칭호: 흑염의 지배자
인과율: 0.5%]
[2. 진 윈체스터
칭호: 없음
인과율: 1.5%]
[3. 오셀로 윈체스터
칭호: 없음
인과율: 2%]
오셀로의 인과율을 본 나는 기함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2퍼센트라는 숫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방금 다녀간 사람, 오셀로였어?
아니…… 방금만 해도 1퍼센트였잖아. 나는 경악한 얼굴로 숫자를 노려보았다.
이건 오류야…… 내가 뭘 했다고 갑자기 이렇게 올라가는 거야!
하지만 숫자는 요지부동이었다.
* * *
제 방문을 열고 들어선 오셀로는 진의 얼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진은 영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오셀로에게 말을 걸었다.
“또 샤샤를 보고 온 거야?”
봄이 되고 교육과 훈련의 강도가 높아져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지만, 저번에 첫 방문의 핑계를 댄 이후 오셀로의 신경은 종종 샤샤에게 향했다.
“…….”
오셀로는 답하지 않았고, 그것은 긍정을 의미했다.
며칠 전에는 그 거슬리는 아기가 또 아파서 의사가 왔다고 했다.
입술이 파래졌다던가.
윈체스터의 성을 달고 태어났으면서 그토록 약해빠진 몸뚱이라니.
아까 보니 멀쩡한 것 같기는 하다만.
“…….”
문득 몇 달 전, 물총을 쏘았던 날 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제가 내려다보는지도 모르고 그 애는 조금 괴로운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살이 오른 얼굴은 새하얗고 작은 주먹은 꼭 쥐고 있는 채였다.
그 작은 주먹으로 제 손가락을 꼭 쥐었지.
아기의 잠든 모습을 보자 코끝에 전에 맡았던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았다.
트리샤. 그 애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냄새였다.
어떤 감정이 올라오려 하자 오셀로는 뒤돌아서 샤샤의 방을 나섰었다.
“꽤 귀엽지, 샤샤는.”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샤’라는 이름이 오셀로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셀로는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별다른 감정이 섞여 있지 않은, 떠보는 듯한 목소리조차 달갑잖게 느껴졌다.
“걱정되면 그렇게 혼자 다녀오지 말고 내일부터 같이…….”
“이제 안 갈 거야. 그리고 걱정한 적 없어.”
오셀로는 진의 말을 끊었다.
“…….”
“빌빌대는 약해빠진 꼬맹이에게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을 거야. 흑염을 타고난 너와 달리…….”
오셀로의 오른손에 맺힌 흑염이 손을 감쌌다.
하지만 그 농도는 진보다 약했다.
“내가 가진 것은 적으니, 그만큼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셀로의 말에 진은 피식 미소 지었다.
쌍둥이인 진과 오셀로는 강점과 약점이 각기 달랐다.
아버지인 레카르도 윈체스터 공작은 진을 후계로 생각했고, 오셀로는 근신까지 한 뒤 눈 밖으로 더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파괴 본능만 가득한 악동이 샤샤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트리샤의 대체를 찾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작은 아기는 오셀로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자극하는지도 모른다.
“오셀로.”
진은 오셀로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윈체스터는 한 팀이야.”
같은 색깔을 한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속이 다 내비치는 오셀로와는 달리 진은 제 감정을 숨기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기에 한 태에서 난 쌍둥이일지라도, 오셀로는 온전히 진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진의 목소리는 오셀로의 복잡한 심기를 조금 안정시켰다.
“그래. 한 팀.”
오셀로의 입술이 달싹였다.
마냥 따라 하는 것도, 긍정하는 것도 아닌, 서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내 오셀로가 푸릇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셀로의 손에 맺힌 흑염이 일순간 깜빡이며 진해지다가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 * *
“음마! 아빠! 빠!”
옹알이 삼매경에 빠진, 어느 날.
잡고 일어서기에 성공한 나는 이제 제법 걷고 있었고, 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것을 본 하녀들은 저마다 귀여워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
치발기 겸 과즙망을 들고 소리를 지르자 마야는 안에 든 차이베리를 새것으로 교체해 주었다.
짭짭짭, 맛있게 빨아먹던 나는 문득 사레에 걸렸다.
“어머, 고무가 터져 버렸어요. 아가씨 이가 많이 나서 그런가 봐요.”
기침을 하는 나를 안고 등을 두드려 달랜 마야는 앞으로 차이베리 과즙망을 쓰지 못하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자동적으로 눈물이 고인 채, 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1년 가까이 아기의 삶을 살아서 그런지 아기의 행동 방식이 몸에 익숙해져 있었다.
마야는 나를 달래며 차이베리를 작게 잘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이제 이런 식으로 먹어요, 아가씨.”
과즙망에 넣어 먹는 것보다는 재미가 덜하지만 나는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였다.
이제 의사의 조언에 따라 건더기가 꽤 있는 수프도 먹고 있기는 했다.
턱받이가 축축해질 만큼 많이 흘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일은 메르코 소년 사냥제에 가야 하는데, 그나마 메르코 영지가 가까워서 다행이에요. 아카다에서는 닷새나 걸린다는데 우리는 반나절도 안 걸리는 거리니까요.”
“우아!”
“이번에는 테일러스가의 후계로 예정된 에반 테일러스가 출전한다 해서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어요. 그래 봤자 공자님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말이에요.”
내게 잘게 자른 차이베리를 먹여 주며 종알대는 마야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에반 테일러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그리고 메르코 소년 사냥제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 있었다.
제국에서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이능’으로 구분된다.
귀족들은 고유의 ‘이능’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 몇 대가 흐르면 능력은 흐려지기 마련이기에 사실 육체적 능력 자체로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저 이능을 겉으로 발현해 보이며 특별함을 증명할 수 있을 뿐.
그러나 4대 가문은 다른 것이, ‘직계’ 자손에게는 능력이 전이되어도 조금도 힘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직계에 속하는 각 가문의 아이들은 대여섯 살 아이일지라도 ‘이능’만으로 성인 장정 서너 명의 목숨을 동시에 앗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진이 가진 흑염이 그러하고, 오셀로의 흑염도 진보다는 약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감히 상대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년 사냥 대회일지라도 4대 공작가의 직계가 출전하면 그들만의 리그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귀여우신 아가씨가 응원해 주면, 공자님들도 더욱 기뻐하실 거예요.”
기대에 찬 마야의 표정에 내 표정은 대번에 일그러졌다.
“으엑.”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