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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1화 (11/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화

메르코의 소년 사냥 대회는 윈체스터 영지와 반나절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서 열렸다.

잠깐 야누트의 지리에 대해 설명하자면 제국의 중심이자 로젠티아 강이 관통하는 도시 로젠토가 수도라고 할 수 있다.

로젠토는 네 가문의 집결지이자 가장 번성한 도시다.

매월 네 가문의 가주가 모여 회의하는 의사 결정 기구 ‘베루스’도 로젠토에 있었다.

그리고 로젠토와 네 영지의 모양과 관계는 서울과 경기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 수도를 둘러싼 네 개의 땅은 각기 땅의 아카다, 물의 헤일로, 어둠의 윈체스터, 빛의 테일러스가 지배하는 영지다.

테일러스의 땅은 남서쪽에, 윈체스터의 땅은 북동쪽에 있으며, 물의 헤일로는 남동쪽, 땅의 아카다는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아무튼 오늘 사냥대회가 열리는 곳은 헤일로의 영향력에 있는 메르코 영지였고, 우리는 아침 일찍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빠압!”

“공작 전하께서는 오늘도 바쁘신 모양이에요. 아쉬운 일이지요.”

창밖의 날아가는 새를 보고 소리쳤을 뿐인데, 마야는 제 편한 대로 알아듣고 설명했다.

“공자님들을 믿고 계셔서일지도 모르겠어요. 제아무리 테일러스가의 후계자라고 해도, 우리 공자님들께는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까요.”

마야의 말에 나는 문득 잊고 있던 주인공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그 개꿈에서도 에반의 이름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에반을 살려 주는 대신 내 말을 잘 듣기로 했잖아, 였던가.

꿈에서는 내가 그와 무슨 사이길래 그런 소리를 한 거지?

어찌 되었건 에반은 가까이하면 안 되는 인물이다.

장차 윈체스터 영지를 파괴하고,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이 이야기의 주인공.

“공자님들은 지금쯤 도착하셨겠죠?”

마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는, 제법 잘 닦인 길을 따라 순조롭게 달리고 있었다.

출전자인 진과 오셀로는 새벽에 출발했으니,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우리는 응원 겸 산책차 그곳에 가는 중이었고.

“우아아.”

“그래요, 아가씨. 이제 배고프시겠다. 따뜻한 수프를 준비했으니 어서…….”

마야가 고개를 숙여 뭔가를 집으려 할 때였다.

휙―

마차의 창밖에서 날아온 화살이 고개를 숙인 마야의 옆쪽 벽으로 푹 박혔다.

나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야는 고개를 올리다가 목덜미가 화살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어? 어?”

그것이 밖에서 날아온 화살임을 알아챈 마야는 황급히 나를 끌어안았다.

“공격이다!”

“윽! 으악!”

쉭, 쉭. 밖에서 바람 소리와 화살이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앞에 무언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예상하지 못한 이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벤트 레벨을 측정 중입니다.]

[해당 이벤트는 ‘레어급’ 이벤트로 측정되었습니다.]

[※사용자의 레벨과 부합하지 않는 이벤트입니다.]

이게…… 레어급 이벤트라고? ……이게 이벤트가 맞긴 해?

열 명 정도가 나의 호위로 가고 있었는데,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윈체스터다! 이건 윈체스터의 마차라고, 이 빌어먹을 놈들아!”

호위대장이 검을 뽑아 들며 적들에게 외쳤다.

하지만 검은 복면을 쓰고 나타난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동요가 없었다.

“어떤 간이 배가 밖으로 나온 놈이 이런 짓을 사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들은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윈체스터의 복수는 치열하고 끈질겼으며, 윈체스터는 제국 최고의 악당 가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나서는 것을 보면 그마저도 각오한 놈들인 듯했다.

“내 비록 여기서 죽더라도 피의 복수를…… 윽!”

나는 마야의 품에 안겨 창밖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호위대장과, 몇 남지 않은 우리의 병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대충 보기에도 잘 훈련받은 자들이었으며 머릿수가 많아 이쪽이 열세였다.

꼭 쥔 내 손에서 땀이 느껴졌다.

“괜찮을 거예요, 아가씨. 괜찮을 거예요…….”

아니 마야.

우리 둘 다 X된 거 같아.

호위대장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용자의 레벨과 부합하지 않는 이벤트입니다.]

[‘레어’급 이벤트의 적정 레벨은 15 이상입니다.]

[시스템을 강제 조정합니다.]

[시스템 재조정에 실패하였습니다.]

오류라는 건가? 이것 좀 어떻게 해 줘 봐요.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눈앞의 창을 바라보았다.

이내 우리의 모든 호위를 쓰러트린 복면의 남자들은 마차에 가까이 다가왔다.

복면 아래 사나운 눈매와 함께 번뜩이는 검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가씨…….”

나를 안은 마야가 품에서 날카로운 무언가를 꺼냈다.

“이 몸, 죽어도 한 놈은 데려갈 거예요. 부디 아가씨만은 무사하시길!”

마야는 이제 완벽한 윈체스터 공작가의 사람이 된 것처럼 비장했다.

복면의 남자가 마차의 문고리를 잡아 여는 순간 마야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하지만 남자는 이미 마야가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한 듯 마야를 걷어찼다.

마차의 벽면이 충격으로 뚫리며 마야는 바깥으로 나동그라졌고, 마야의 품에 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내 검은 그림자가 내 앞에 드리워졌다.

[시스템 재조정에 실패하였습니다.]

[시스템 재조정에 실패하였습니다.]

똥컴에 갇혀 렉이 걸린 느낌이었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내 이마를 스스로 한 대 때렸을 때였다.

갑자기 불쑥 무언가가 떠올랐다.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스킬.’

[레어급 이벤트 진행을 위해 시스템이 스킬 트리를 살피고 있습니다.]

[해당 스킬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당 스킬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설 등급 운명 ‘메키우스의 열쇠’가 부합한 스킬을 찾아 강제 발현합니다.]

뭐든 얼른 해 줘, 제기랄.

[SS급 스킬 ‘검은 지배(LV.1)’를 획득하였습니다.]

[해당 스킬은 사용자의 레벨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밸런스 조정을 위해 스킬 치명도를 재조정합니다.(0)]

[제한 사항은 스킬 레벨 10까지 유지됩니다.]

남자는 들고 있던 피 묻은 검을 천천히 내게 겨누었다.

뭐…… 뭐야?

이건 대체 무슨 스킬이지?

나는 아직 무력한 아기의 몸인걸.

어떤 스킬을 가지더라도 칼 든 성인 남자를 상대할 수는 없다.

이렇게 쳐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검은 지배(LV.1)를 사용합니다.]

남자가 검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나를 찌르려고 할 때였다.

“…….”

칼날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내게 전진하지 못했다.

남자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왜…… 이게 안…….”

남자는 나를 찌를 수 없다는 사실에 당황한 듯,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쥐고 다시 힘을 주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조금도 앞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남자는 나를 괴물처럼 바라보며 당황한 채 말했다.

“윈체스터…… 어둠의 자식…… 악마 같은 애새끼…….”

나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남자가 나를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긴장에 아기의 정신력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계속 참았다.

울며 눈을 감으면 죽는다. 나도, 마야도.

“열쇠를 망가뜨리지 않으면 그분이…….”

남자가 나를 노려보며 검을 쥔 손을 덜덜 떨던 순간.

갑자기 온 피부로 섬뜩하고 사악한 어떤 기운이 훅 다가오며 닭살이 돋았다.

남자가 쥔 검은 매가리 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나는 남자가 검을 떨어뜨린 이유가 내 스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곧바로 짐작했다.

“헉…… 윽…….”

“윽……!”

남자가 나를 죽이려는 모습을 지켜보던 복면의 사내들은 일순간 제 목을 쥐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기이하다시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붉은 눈의 남자는 길이 아닌 숲 쪽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누군가를 보고 놀라 흠칫했다.

“…….”

저벅, 저벅.

흰 말 하나가 우아하게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큰 키의 남자 하나가 타고 있었는데, 그의 뒤에 있는 태양으로 인한 후광이 잦아들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

나는 놀라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압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레카르도 윈체스터였다.

눈부신 은발과 세상을 얼려 버릴 듯 서늘한 청록색의 눈. 그리고 그의 뒤에 가득한 검은 기운이 생생히 보였다.

회색이 섞인 검은 제복에 선명한 윈체스터의 문양 그리고 검은 망토는, 죽음의 사신이라 불리는 레카르도의 악명을 드러내듯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 암왕…….”

검붉은 눈의 사내가 당황한 듯 물러서더니 제 목을 잡았다.

저벅, 저벅. 백마가 단단한 땅을 밟는 소리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한결 진해진 검은 기운을 볼 수 있었다.

땅 이곳저곳에서 솟아난 검은 기운이 사내들의 목을 얽어매고 있었다.

마치 종말이 온 것처럼, 혹은 악마가 강림한 것처럼, 경악할 만한 장면이었다.

혼자서 스물이 넘는 적을 이렇게 쉽게 무력화하다니, 흑염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진이 내게 보여 주었던 꽃을 부식시키는 정도는 맛보기에 불과했다.

흑염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능력이었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짙게 느껴지는 살기에 나는 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으득, 땅으로부터 반쯤 떠오른 복면의 사내가 레카르도를 올려다보며 이를 깨물었다.

레카르도의 입술이 달싹이며 저음이 흘러나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내 레카르도의 몸에서 피어난 검고 짙은 기운들 중 하나가 손처럼 사내의 얼굴을 향해 뻗어 갔다.

“윈체스터의 마차를 공격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지.”

“……제발…… 제발…….”

사내의 검붉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일렁였다.

“네놈들과 관련된 것은 네놈들이 밟은 풀 한 포기조차 성치 못할 것이니.”

“이카에르 아지르!”

그 어둠이 막 복면을 잡으려던 찰나, 사내가 무언가를 외치더니 얼굴이 마법처럼 검게 변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재가 되어 그의 온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끔찍하고 기이한 장면이었다.

레카르도는 차가운 눈으로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복면을 쓴 사내들 모두가 재가 되어 사라지고, 바닥에 그들이 입은 옷과 복면만 툭 하고 떨어졌다.

“카이사의 저주라.”

레카르도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아쉬운 투의 분노가 섞인 저음과 함께 그는 말에서 내렸다.

마야는 땅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고, 나는 동그란 눈으로 레카르도를 올려다보았다.

레카르도의 눈썹이 딱딱하게 굳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새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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