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2화
“테일러스 녀석이 날뛰어 보았자 별거 아니지.”
소년 사냥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오셀로는 기분이 상당히 들떠 있었다.
하지만 같은 막사 안에 있으면서도, 진의 표정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
“왜 말이 없어, 진. 내게 한 번에 나가떨어졌잖아, 그 자식. 바로 항복을 말하는데…….”
“일부러 그런 거야.”
“뭐?”
오셀로가 눈썹을 꿈틀했다.
진은 차가운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일부러 실력을 숨긴 거라고, 에반 테일러스.”
빛의 테일러스는 세상을 밝히는 ‘청명’의 능력을 가진 가문으로서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강한 4대 가문 중 하나였다.
가문에서도 ‘후계자’로 불리는 적통은 가장 강한 힘을 물려받는데, 윈체스터에서는 진이 그러했고 테일러스에는 ‘에반 테일러스’가 그러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꼬맹이가 일부러 지기라도 했다는 거야?”
“청명이 느껴지지 않았어.”
진은 저보다 반 뼘 작은 에반 테일러스와 마주했을 때를 회상했다.
오셀로는 일부러 에반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들 주위로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냥 대회를 핑계 삼아 싫은 놈에게 한 주먹 날려 주는 일은 흔했고, 테일러스가와 윈체스터가의 미래를 짊어질 싹들의 대결이란 흥미로운 주제였다.
에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새카만 검은 머리칼과 파란 눈동자에, 세상 모든 것을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나이답지 않은 표정.
“분명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에반 테일러스의 검에는 청명의 기운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무력은 ‘인간’인지라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흑염’, ‘청명’과 같은 이능은 보통 사람들은 범접 불가능할 정도의 위력을 갖게 해 주었다.
그러니 흑염의 윈체스터를 상대할 때 ‘청명’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투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하. 그럴 리가…… 그 꼬맹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잖아.”
진의 입술이 비틀렸다.
“……상대하기 싫었던 거지.”
오셀로의 일격에 에반은 검을 떨어뜨렸었다. 순식간에 끝난 대결이었다.
― 졌습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당황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 목소리도 잠잠했었지. 다혈질인 오셀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상대하기 싫었다고? ……잠깐, 누굴 애 취급한 거야? 꼬맹이 주제에!”
오셀로가 으득 이를 갈았다.
“가만두지 않겠어. 건방진 테일러스.”
“이득 없는 일에 나서지 마. 이미 상황은 끝났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미 사냥 대회는 끝났고 에반에게 따지러 갈 명분은 없었다.
시끌벅적한 연회가 기회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은 에반 테일러스가 연회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추측했다.
얼굴만 봐도 성격이 대충 짐작되는 아이였으니까.
끼익―
그때 문이 열리고 하인이 들어와 보고했다.
“공자님들, 공작님과 샤샤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오셀로와 진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나는 레카르도 공작의 품에 안겨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수십 명의 어른들과 못지않게 많은 아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쏠렸다.
악단이 클래식한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고, 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내가 상상하던 소설 속 무도회와 비슷했다.
소년 사냥제의 꽃은 모든 귀족 행사들과 마찬가지로 밤중의 무도회에 있다.
럭셔리하고 드넓은 무도회장과 실내 분수, 그리고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까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윈체스터 영지에서 생활했기에 이곳의 풍경은 낯설고 신기했다.
“……?!”
“……?”
“제가 방금 뭔가 잘못 본 건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이 모습은 매우 낯설고 신기한 듯했다.
흑염의 레카르도 윈체스터 공작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라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하던 말을 멈추고 공작을 바라보았고, 아이들 역시 멈칫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대화의 소음 없이, 클래식한 음악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나 역시 옹알이 한번 못한 채 가만히 안겨 있을 뿐이었다.
무서워…… 무섭다고…….
마야는 기절한 뒤 의식을 회복했지만 아직 거동까지는 힘들었고, 나는 레카르도를 따라 무도회까지 왔다.
나를 구해 주었을 때도 혼자였던 레카르도는 그대로 나를 안고 말을 탄 채 여기까지 왔다.
사실 그가 나를 안은 자세는 상당히 불편했다.
그러나 레카르도 공작의 기운이 워낙 형형하여 누구도 참견하지 못하는 것이 내게는 불행이었다.
“…….”
레카르도 공작이 멈추어 무언가를 찾는 듯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돌렸다.
파격적인 그의 모습에 잠시 얼어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말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따님이 태어나셨다고 들었는데…… 그…… 공녀님인가요?”
“그런데 왜 공작님이 직접…….”
“유모를 죽이신 게 아닐까요? 하녀들까지 전부.”
“그렇다면 이해가 되네요.”
이해가 되긴 뭐가 돼…….
아빠가 아가 좀 안아 줄 수도 있지, 따지고 싶었지만…… 살짝 고개를 들어 레카르도의 살벌한 눈동자를 보니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것 같았다.
“꼼지락거리는군.”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지만 오늘은 꾹 참아 보기로 했다.
그는 엄청나게 긴 검을 차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흑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샤…….”
그리고 그가 멈추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오셀로와 진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레카르도 공작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에 진은 눈썹을 꿈틀하며 살짝 놀란 것도 같았다.
오셀로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있었고 귀가 조금 붉어 보였다.
방금 엄청 반갑게 ‘샤!’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응? 눈은 왜 피하지?
진이 레카르도 공작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목이 아파 다시 레카르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힘들어…….
“아버지, 저희가 우승을…….”
오셀로가 밝은 음성으로 레카르도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훅 섞여들었다.
“늦었군. 오늘을 잊을 뻔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귀족들의 시선이 무도회장 문 쪽으로 쏠렸다.
뭐지, 유명한 귀족인가…… 나는 볼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놀라움에 차는 것이 보였다.
“아아?”
나도 궁금해, 누구야.
“아뱝?”
그리고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체노아…… 체노아 테일러스 공작 전하야.”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도 들려 왔다.
테일러스라는 말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테일러스의 가주>라는 원작 소설의 주인공 에반 테일러스, 그 아버지인 현 테일러스 가주의 이름이 바로 체노아 테일러스였다.
“…….”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피부에 와닿았고, 나는 간신히 몸을 약간 돌려 앞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형형한 기세의 남자를 발견했다.
‘청명의 주인’……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저 남자였다.
체노아 테일러스가 등장하자 기사들이 곧장 우리의 곁으로 몰려와 방비 태세를 갖추었다.
소설의 악당 가문인 우리 윈체스터가는, 오랜 세월 동안 테일러스와 대척점에 있는 사이였다.
빛과 어둠이 섞이지 않듯, 이들은 그런 존재들인 것이다.
진과 오셀로의 악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진의 뒤에는 특히 아까 레카르도 공작에게 보였던 검은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이내 체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들 장난거리에 구경 올 생각은 없었는데.”
홍해의 기적처럼 갈라지는 귀족들 사이로 그가 붉은 자루를 내던졌다.
“초대장이 왔으니 피할 수야 없지.”
데구루루 구르면서 바닥에 붉은 액체가 흐르는 것이…… 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 오기 전 아빠가 잠시 어딘가에 들렀었는데, 설마…….
체노아의 도발에도 레카르도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변화가 없었다.
음악이 멈추고 서늘해진 분위기 속, 체노아가 입술의 꼬리를 올리며 달싹였다.
“내 사병을 죽여 놓고…… 어울리지 않게 애를 안고 있군, 레카르도.”
그 살기가 담긴 푸른 눈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와…… 우리 아빠와 비슷할 정도로 포스가 강한 사람도 있구나.
피식―
레카르도의 입술이 비틀리며 그의 손에 강한 어둠의 기운이 맺혔다.
숲에서 본 것처럼 강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러자 테일러스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고, 그와 동시에 윈체스터의 기사들도 검을 뽑아 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체노아 테일러스의 몸에서도 푸른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테일러스와 윈체스터가 전쟁을 하면 야누트의 많은 도시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초인적인 힘을 가진 두 가주가 싸우면 수도인 로젠토마저 박살이 난다는 말도 있었으니.
귀부인들은 소리를 질러 대고 아이들은 제 아버지의 뒤에 숨었다.
와…… 이게 무슨 대환장 파티야!
“초대장을 보낸 것은 네가 먼저였을 텐데.”
레카르도 윈체스터의 입술이 달싹이며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내 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