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4화
[&*※☆◎●▼§]
[치명적인 오류 발생 : 레벨 한계치 초과]
[시스템을 재조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파앗― 하고 꺼진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가씨!”
눈을 뜬 순간 울먹이는 마야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마야를 바라보았고 내 눈앞에는 창이 떠 있었다.
아무튼 내가 깨어난 곳은 내 방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까 마지막 메시지를 떠올리던 나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 남자애가 에반 테일러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헤일로 공작께서는 아가씨의 상태를 살핀 뒤 긴장 상황의 충격이 뒤늦게 몰려온 것 같다고 했지만…… 혹시나 잘못되실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무도회장에서 갑자기 쓰러졌던 건가?
“비겁한 테일러스 놈들, 진실이 발각된 뒤 온갖 변명을 하다가 도망가듯 퇴장했었다죠. 아가씨가 쓰러지지 않으셨다면 그놈들은 살아 돌아가기 힘들었을 거예요.”
마야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
“다음 주에 베루스(4대 가문의 월례 회의)가 있어요. 곧 그놈들은 톡톡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죠.”
기절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린 나는 테일러스가 불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이사’는 테일러스만이 시전할 수 있는 금지된 술법.
그로 인해 윈체스터가의 딸인 내가 죽을 뻔했다.
하얗게 굳은 체노아 테일러스의 표정을 보았을 때, 그는 이 일에 대해 모르는 듯했지만 그 표정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가씨가 깨어났다고 말씀드려야겠어요. 공자님들도 여러 번 다녀가셨답니다.”
분노로 들끓다가 문득 손님의 기척을 느낀 마야가 잠시 나를 두고 나가고, 나는 프로필을 열어 변경된 정보를 확인하였다.
[레벨 업 보상으로 ‘돌쟁이의 으쓱으쓱 패키지’가 선물함에 도착하였습니다.]
나 그새 레벨 업을 한 건가?
얼른 프로필을 확인했다.
[이름 : 샤샤 윈체스터(LV.2)]
[직업 : 무직]
[특성 : 딸랑이 마스터(근력+3)]
오! 정말 레벨이 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분유 강화제 (3개) : 제국 최고의 우량아가 되고 싶으시다고요? 이 분유 강화제를 사용하면 일주일 동안 몸무게가 평소 속도의 2배로 증가합니다.]
[돌쟁이 야누트어 (1개):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당신은 야누트어를 읽고 쓸 수 있습니다. 영재로 주목받고 싶다면 지금 도전하세요.]
[뽁뽁 신발 (1개) : 낯선 곳에 가더라도 뽁뽁 신발이 있다면 걱정 없답니다. 약간의 민폐는 끼치겠지만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습니다.]
[국민 깜짝볼 (1개) : 오늘도 시간이 가지 않는다면 사용해 보세요. 경쾌한 음악과 몸짓은 3분 동안 모두의 시선을 빼앗는답니다.]
그리고 그때 문득 다른 메시지가 떴다.
[LV1 한정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상점에 판매하시겠습니까?]
100일 아기의 까꿍 패키지로 받았던 분유 강화제가 깜빡이고 있었다.
딸랑이는 ‘근력 +3’를 올린 뒤 사라졌었고.
음…… 레벨 업 선물 아이템은 해당 레벨에서만 쓸 수 있나 보군.
나는 예스를 눌렀고, 0이라고 되어 있던 루비 모양의 옆에 50이라는 새로운 숫자가 표기되었다.
루비 옆의 이 숫자들도 언젠가 쓸모가 있으려나……?
아직 ‘상점’ 기능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기에 알 수 있는 정보는 더 없었다.
아무튼 세 개 남은 아이템들 중 나는 ‘돌쟁이 야누트어’를 바라보았다.
사용하기를 선택하자 머릿속에 시원한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오묘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둘러보자, 그동안은 흐릿하게만 보이던 글자들이 생생히 읽히기 시작했다.
‘호전적인 윈체스터인을 위한 자장가 리스트’
‘테일러스, 악랄한 놈들과의 사투의 역사.’
‘먼저 공격하는 자가 상대의 목을 취한다.’
아기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책들과…….
옆을 보자 아기 침대의 가드 부분에 적힌 글씨가 보였다.
여자의 글씨인 듯 획이 가냘팠는데 그것을 본 나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건강히 자라렴.’
아마도…… 엄마의 필체…….
나를 낳고 바로 사망한 트리샤가 쓴 글씨 같았다.
배 속에 있는 내가 나올 날을 기대하며 새겨 놓은 글이겠지.
오늘따라 어쩐지 코끝이 시큰거려 나는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봐야만 했다.
트리샤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원래의 엄마와 동생들은 잘 지내겠지?
여러 생각을 하는 동안 문이 확 열렸다.
문 앞에는 핑크 머리카락의 오셀로가 가쁜 숨을 내쉬며 서 있었다.
오셀로는 한 발짝 두 발짝 내 방으로 들어와 내 침대 가까이 섰다.
오셀로의 고운 미간은 꽤 굳어 있었다.
오셀로는 나를 노려보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 * *
높은 천장까지 나 있는 긴 창을 통해 빛줄기가 들었지만, 북향의 한계 때문인지 한낮임에도 레카르도 윈체스터 공작의 집무실은 어둑한 편이었다.
전대 윈체스터 공작과 마찬가지로 레카르도도 밝은 빛을 싫어했기에 그의 기준으로 이곳은 적당한 업무 공간이었다.
“베루스로 성명문을 발송하였습니다.”
부관 로웬은 차분한 목소리로 공작의 앞에 서서 보고했다.
레카르도는 잘 벼려진 검날을 깨끗한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는데, 손수건에는 붉은 피가 묻어났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레카르도의 녹색 눈동자 표면에는 번뜩이는 검날이 담겨 있었다.
“분쟁의 기운이 심화되면 아무래도 아피니제의 반발이…….”
레카르도의 말에 로웬은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피니제라.”
아피니제는 가주와 별개로 존재하는 윈체스터 가문의 의사 결정 기구 중 하나로, 윈체스터 성을 가진 방계의 귀족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진 공자님이라면 납득할 만하지만, 아무래도 아가씨에 대한 문제라…… 아시지 않습니까. 아가씨는 후계가 될 가능성도 없고 모친의 신분도.”
주된 의사 결정 권한은 가주인 레카르도에게 있지만, 가문의 일에 아피니제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한국식으로 하면 종중과 같은 종친회가 이와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제출한 성명문은 다분히 공격적이었으며, 그것을 계기로 100년 만에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흑염의 후계자도 아닌, 정식 혼인도 하지 않은 여자에게서 낳은 어린 딸 때문에 그리 극단적인 방향으로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피식 입술을 비트는 레카르도의 모습에 로웬은 어깨를 움찔했다.
“한때 윈체스터는 야누트의 근본이었다. 자기들의 비겁함을 감추려 양보와 평화라는 미명 아래 윈체스터를 변방 한구석으로 물러나게 한 이들이 지금의 아피니제를 장악한 자들이지.”
레카르도의 눈빛은 서늘했고, 은은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로웬은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
레카르도는 이전 가주들에 비해 월등하게 흑염의 능력이 강했고, 그 때문에 모든 윈체스터들에게 견제받고 있었다.
레카르도가 가주가 된 지 12년, 그사이 바뀌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던 것들도 많이 바뀌었고 말이다.
“그리고 로웬.”
레카르도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로웬은 얼어붙었다.
그의 검날 끝이 제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것을 모욕하는 밥버러지들을 가만둘 만큼 도량이 넓지 않다.”
“……공작 전하.”
“후계건 후계가 아니건, 목줄을 채워 키우는 개새끼이건 간에 말이지.”
그제야 로웬은 제가 섣불리 했던 말실수를 깨달았다.
“공작 전하, 제가 무례를…….”
얼어붙은 로웬을 보며 레카르도의 입술이 차갑고 느긋하게 움직였다.
“이 빠진 방계들의 의견을 대변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만,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겠지.”
로웬의 시선이 피 묻은 손수건으로 향했다.
잠시 후 레카르도가 서서히 검날을 거두었고, 로웬은 즉시 허리를 숙였다.
로웬의 얼굴이 두려움에 굳어 있었다.
“큰 실수를 했습니다, 공작 전하.”
로웬은 늘 레카르도 윈체스터를 존경했다.
그 압도적인 흑염의 이능은 경외감까지 느끼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윈체스터가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듣고 보는 것이 많아지는 만큼 자신의 의견을 섞게 되었다.
그 모든 게 주제넘은 짓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다.
로웬을 바라보던 레카르도는 무료한 눈빛으로 검날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제 앞에서 푹 쓰러지던 작은 생명체의 모습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서, 그는 눈을 잠시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