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5화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말을 해야지.”
오셀로는 삐딱한 눈으로 내게 시비를 걸며 다가왔다.
“우뱌, 엄마마…….”
나는 팔을 버둥대며 오셀로에게 항의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기가 말을 하기란 쉽지 않단다.
윈체스터 공작가의 남자들은 왜 하나같이 아기 이해도가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약해빠져서는…….”
그 점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병약’한 캐릭터인 샤샤 윈체스터로 환생한 한계이지 않은가.
별것도 아닌데 감기에 걸리고, 별것도 아닌데 쓰러지고…….
“너 그리고…… 그거 뭐야?”
오셀로가 내게 바짝 다가와 이마를 맞대듯 훅 들어왔다.
“오아?”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오셀로는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막았잖아. 누가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나는 혼자 옹알거리며 모른 척을 했다.
“우야야?”
[SS급 스킬 ‘검은 지배(LV.1)’를 획득하였습니다.]
[해당 스킬은 사용자의 레벨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카이사’라는 저주에 지배된 남자가 나를 공격했을 때 나는 검은 지배라는 스킬을 획득했었다.
이후의 문장들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문맥상으로 보아 내가 쓰기에는 과한 스킬이니 스킬의 위력을 낮추어 준다는 것 같았다.
SS급이면 굉장히 좋은 축이려나.
“너 사실 내 말 다 알아듣지?”
“우뱌뱌뱌!”
“다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 같아.”
나는 가슴이 뜨끔했지만 까르륵 웃고 박수까지 치며 미친 척, 아니, 아기인 척을 열심히 했다.
나중에 말을 하게 되어도 내가 직면한 상황에 대해 이들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내 목표는 최대한 빨리 윈체스터 가문을 떠나 엘릭서를 찾아 병약한 몸을 치유하고 평온하게 사는 것.
시스템의 정체는 모르지만 일련의 작용으로 나를 방어할 수단이 생긴다면 좋은 것이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쬐그만 게 벌써 흑염을 쓸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오셀로가 내 작은 주먹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설명이 안 된단 말이야.”
이내 그의 시선이 내 초롱초롱한 녹색 눈으로 향했다.
“우웅?”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잠시 후 오셀로는 손을 뻗어 내 오동통한 볼을 잡았다.
분명 원작에서 샤샤 윈체스터는 가족들의 관심 밖이었는데, 왜 이렇게 다들 나를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
오셀로가 영 나를 놔줄 것 같지 않자 나는 팔을 버둥거렸다.
“우야야! 아내!”
내가 짧은 팔을 버둥대자 오셀로가 흠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못 들은 척하는 것에 더해, 화까지 내다니. 영 버릇이 없어.”
미친놈아. 나 아기라고.
오셀로는 다른 손으로 내 다른 쪽 볼을 잡았다.
“뿌뿌!”
양 볼이 잡힌 나는 화난 표정으로 오셀로를 바라보았다.
“혼내 줄 수도 없고. 하.”
저 뒤의 마야는 중재해 줄 생각도 안 하고 쿡쿡 웃고 있었다.
“내 촉으론 넌 멍청한 보통 아기가 아니야. 다 알아낼 테니…… 두고 봐.”
오셀로의 볼이 어쩐지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마야, 너도 잘 감시해. 내일도 올 테니까.”
“네. 물론이죠, 공자님.”
겨우 내 볼을 놓은 오셀로는 잠시 손을 뻗어 내 머리 위에 올리려다가 멈칫한 뒤, 손을 다시 거두었다.
그리고 훅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마야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를 엄청 귀여워하시는 것 같아요. 솔직하지 못하시기는…….”
아니, 어딜 봐서.
저게 귀여워하는 사람의 태도야? 맨날 시비나 걸고.
“아가씨가 쓰러졌을 때, 흑염을 내뿜으며 체노아 공작님께 달려들려 하셨었대요. 진 공자님이 막으셨지만…… 화도 굉장히 많이 내셨고, 어찌나 아가씨를 걱정하시던지.”
저…… 정말……? 에이, 설마.
나는 내가 눈으로 보는 것만 믿을 생각이었다.
“아무튼 다행이에요. 아무 일 없으셔서.”
그래. 너도 다행이야, 마야. 많이 안 다쳐서.
마야의 따뜻한 말에 나는 다시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야가 내 기저귀를 갈아 주었고, 나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먹었다.
[인물 열람]을 펼쳐 인물들의 달라졌을 인과율을 확인하려다가, 그냥 안 하는 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에 들었다.
* * *
“제기랄…… 제기랄…… 카이사가 왜 거기서 나와!”
테일러스의 백색 저택. 저택이라는 말보다는 신전이라는 용어가 어울릴 것 같은 외관의 건물.
동쪽 탑의 원탁에 홀로 앉은 체노아는 분한 듯 중얼거렸다.
원로들이 이미 체노아에게 잔소리를 실컷 쏟아 내고 간 이후였다.
체노아 테일러스의 부관 루크는 왼쪽 볼에 긁힌 상처가 있었는데, 방금 체노아가 던진 유리잔 때문이다.
주인의 심기가 불편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테일러스 공작가에 큰 위기가 닥친 지금 같은 순간에는 더더욱.
“그 소란을 떨 것이었으면 윈체스터의 성을 가진 애새끼 하나라도 죽였어야지. 어떤 멍청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내면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
저주 ‘카이사’의 정황이 확실한 이상, 범인은 무조건 테일러스 소속이었다.
베루스에서는 테일러스 공작가에게 범인 색출과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모처럼 윈체스터의 약점을 잡았고 이를 도마에 올리려 했는데, 반대로 모두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가 잡은 약점 따위는 저주 ‘카이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체노아가 분노에 차서 씩씩거리고 있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아치형의 입구에서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체노아 테일러스의 후계, 에반 테일러스.
그 아이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체노아를 향해 다가갔다.
에반에게 시선을 돌린 체노아는 제게 오는 에반에게 강렬한 청명의 기운을 내뿜었다.
에반은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졌다.
아이의 표정은 단조로웠고, 짙은 눈에 두려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체노아는 경멸하는 눈초리로 에반을 보며 말했다.
“사냥 대회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성적을 올렸더구나.”
멸시가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에반은 감정 없는 얼굴로 멈추어 있을 뿐이었다.
체노아는 그 모습조차 질린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오셀로 윈체스터의 공격을 일격도 막아 내지 못했다는 말이 떠돌더군. 나 또한 어릴 적 썩 강한 축은 아니었으나…….”
그는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에반에게 말했다.
“너 같은 반편이만큼은 아니었다.”
부관 루크는 숨을 삼켰다.
“수치스러운 놈.”
장차 청명의 주인이 될 ‘에반 테일러스’. 모두가 이 아이를 청명의 후계로 알고 있었다.
대부분 장손이 가장 강한 이능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레카르도 같은 특이 케이스를 빼고는.
하지만 에반 테일러스는 테일러스 가문의 장손이었음에도 일곱 살이 된 지금까지 청명이 발현하지 않았다.
에반이 체노아와 똑 닮은 흑발과 청안이 아니었다면 아마 공작 부인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났을 것이다.
멸시하는 표정으로 제 아들을 보던 체노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에반은 넘어진 모습 그대로 체노아의 발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부관 루크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에반을 보다가, 체노아를 따라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한참 뒤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사냥 대회였다.
가문의 원로들이 강요하여 참여했을 뿐.
적의를 드러내던 오셀로 윈체스터에 대해서도 별다른 흥미는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전과 마찬가지로 늘 있던 이벤트일 뿐이었다.
쓰러트려도 귀찮은 일만 생길 뿐인.
― 네가 자랑스럽다, 에반. 윈체스터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줬구나.
칭찬 한 줌과 과도한 기대, 일그러지는 운명.
에반의 눈이 어둑해지는 하늘을 향했다.
하루하루의 삶은 지옥과 다름없는 형벌일 뿐이었다.
이 지독한 운명은 테일러스의 탓도, 윈체스터의 탓도 아니었다.
실낱같던 인간성은 자신에게 이미 남아 있지 않음을 알았다.
정신이 마모되다 못해 청명조차 더는 발현하지 않게 된 이번 시점, 그는 이미 ‘에반’이라는 제 이름을 버렸다.
차라리 반가운 일이었다. 헛된 노력을 계속하지 않아도 되니.
“…….”
하늘에서 비가 후드득 떨어졌다.
마른 대리석에 동그란 자국을 남기며 빗소리는 커져 갔다.
그 비를 맞으며 에반은 공허한 눈으로 찰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한낱 어린 아기의 동그란 녹안, 그리고 느껴지는 이질적인…….
뚝, 뚝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에반은 입술을 비틀었다.
변화? 착각이겠지.
그의 눈에는 새카만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