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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7화 (17/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7화

“그만하거라. 과하다.”

바쉬론의 발이 다시 바닥에 닿은 건 헥토르의 전언이 있은 뒤였다.

헥토르의 나직한 명령에 레카르도의 흑염이 바쉬론의 목을 놓았고 그는 고꾸라지듯 바닥에 넘어졌다.

아직도 나를 안고 있는 마야의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윈체스터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힘들 것이다.

나 또한 바짝 얼어서 상황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니.

“…….”

레카르도 공작, 그리고 헥토르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레카르도 공작의 살기는 그가 체노아와 대면했을 때보다 짙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도 제때 나타나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저 수염 아저씨가 ‘심연의 그림자’라고 하는 이상한 사술로 나를 아프게 했을지도.

“가주의 가족에 대한 공격은.”

레카르도의 입술이 달싹였다.

“가주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대가주.”

윈체스터의 가칙은 유서 깊은 것이지만, 결국 대원칙은 하나였다.

‘약육강식’

가장 강한 흑염의 능력을 가진 자가 가주가 된다.

물론 지나치게 파괴적인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아피니제가 존재하지만, 결국 가주보다 약한 개개인들의 모임일 뿐이다.

바쉬론 윈체스터는 레카르도의 큰아버지로, 바쉬론은 레카르도의 부친을 독살했다는 혐의가 있고, 레카르도는 제 아버지를 독살한 혐의를 가진 바쉬론에게서 가주직을 빼앗고 그의 외아들을 불구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바쉬론의 양딸인 제스티아가 가진 윌너스 광산 채굴권을 가문 소속으로 되돌려 놓았다.

다른 이들 또한 레카르도 윈체스터에게 갖는 감정은 비슷했다. 경외와 두려움, 그리고 적대감, 질투.

물론 이에는 레카르도의 젊은 나이와 항렬도 한 축을 할 것이다.

“가족이라, 네가 그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구나.”

아까부터 인상을 쓰고 있던 헥토르가 입술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

“레카르도의 말이 맞다. 처음부터 어긋난 일 처리였지.”

호기심이 섞인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이내 저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바쉬론을 보고 말했다.

“일어나거라, 백부로서 보이는 추태에 일말의 부끄러움이 있다면.”

바쉬론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이번 일은 네가 심했다. 이건 누가 봐도 납치나 다름없지 않더냐.”

정식 절차대로라면 그는 먼저 레카르도에게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사병을 보내 마야를 협박하지 말았어야 했고.

“가문에 미심쩍은 것이 있다면 마땅히 그 존재를 아피니제에도 보고하고 공유해야 하는 것을…….”

“그만하라고 하였다.”

헥토르가 꾸짖듯 눈썹을 굳힌 순간이었다.

레카르도에 필적할 만한 거대한 어둠이 공간을 집어삼키는 듯한 환영이 덮쳤다.

찰나에 엄청난 존재감이 이곳을 압도하고, 마야는 비틀거리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헉…… 헉…….”

과연 전대 가주인가. 나는 몸을 움츠린 채 상황을 관망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땍땍대던 바쉬론도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 기운을 견뎌 내고도 태연한 얼굴은 레카르도뿐.

“그렇다고 문까지 부수고 들어올 것은 없었는데, 애꿎은 가문 재산만 소모되지 않았느냐.”

헥토르는 쯧, 하며 레카르도에게 한마디 했다.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나는 조금 따지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진작 이 자리를 파투 냈으면 되는 일이잖아요!

레카르도는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채 아피니제 구성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가주의 권한으로 아피니제를 폐지하겠습니다.”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던 헥토르가 레카르도를 다시 보았다.

마야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아피니제의 원탁에 앉아 있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카르도의 뒤에 선 로웬조차 놀라 굳은 표정이었다.

“……아…… 아…….”

바쉬론은 뭐라고 입을 열다가 제 가슴을 잡았다.

“레…… 레카르도, 아피니제 폐지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제스티아가 간신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일 테고.”

잠시 나를 보던 레카르도의 입술이 제스티아를 향해 비틀렸다.

“아피니제는 가주 홀로 대응하기에 벅찬 외부의 위협을 조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이나.”

레카르도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오늘로서 증명했습니다. 아피니제는 외부의 적들과 같은 주장을 하며 가주와 윈체스터를 위협하는 쓰레기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쓰레기들, 이라는 정의에 제스티아가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잠시 거두었던 흑염의 칼날이 촉수처럼 넘실대며 솟아오르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존재할 가치가 없지.”

이 자리에서 레카르도를 막아 낼 수 있는 것은, 전대 가주인 헥토르뿐일 것이다.

아피니제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구였으나, 독재 체제의 의회처럼 독재자가 얼마나 강력한지에 반해 약해지는 기구이기도 했다.

나는 마야의 품에 안겨 이 살벌한 상황을 숨죽이고 듣고 있었다.

젠장할, 가족 모임 한번 살벌하네.

이내 서늘한 레카르도의 시선이 도발하듯 헥토르를 향했다.

“대가주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헥토르는 한참 동안 말없이 레카르도 윈체스터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의견을 묻고자 하는 눈이 아니라.”

그리고 일순간 헥토르의 뒤에서도 검은 어둠이 뻗어 나왔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기운이었다.

“나를 책망하려는 눈이구나. 고얀 놈.”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댔다.

저기요, 두 분. 여기서 싸우시려는 건 아니죠?

두 분 같은 분들이 싸우면 저택 다 날아간답니다.

잠시 후 레카르도의 기세가 점점 잦아들더니 살기로 가득 찼던 그의 눈이 조금 빛을 되찾았다.

레카르도가 입술을 달싹였다.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책에서 레카르도 윈체스터 공작은 가족도 믿지 않는 남자였지만, 유일하게 속을 드러내는 상대가 전대 가주이자 조부인 헥토르 윈체스터였다는 지문을 읽은 적 있었다.

둘은 썩 친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자로서 서로의 강함을 어느 정도 존중하고 있다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레카르도가 기세를 누르자 헥토르 역시 어둠을 거두어들이고 말했다.

“오랜만에 바람을 쐴 겸 여기 들렀건만, 이것저것 참으로 골치 아프게 하는구나.”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잠시 내게 시선을 옮겼던 헥토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피니제는 네 마음대로 하거라, 레카르도. 나는 어차피 관심조차 없었으니.”

“대가주님!”

“대가주님! 안 됩니다!”

헥토르의 말에 원로들이 모두 항의하듯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헥토르가 매서운 기세로 돌아보자 다시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바쉬론은 다 잃은 표정이었다. 아버지인 헥토르조차 저리 나오면 이제 아무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자식들도, 손주도 제대로 된 놈이 없으니…….”

이내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나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윈체스터의 미래는 어찌해야 할꼬.”

시야 가득 들어차는 노인의 얼굴에 나는 숨을 삼켰다.

걱정하는 말투와 달리 그의 눈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 *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가주님. 레카르도 공작 전하께서도 분명 고마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헥토르를 배웅하며 로웬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레카르도는 아피니제의 문을 부순 데다가 아피니제의 폐지를 선언한 뒤 곧장 물러갔기에 뒷수습은 로웬의 일이었다.

“감사할 것쯤이야, 나도 영 거슬리던 터였다.”

헥토르가 가주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을 때, 장남 바쉬론은 그 자리가 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죽은 차남, 에녹이 낳은 자식인 레카르도는 바쉬론을 누를 정도로 강한 흑염의 정수를 보여 주었고, 이에 후계 자리는 레카르도로 정해졌다. 헥토르도 레카르도를 정당한 가주로 인정했다.

“기나긴 아피니제의 역사도 이제 끝이겠구나.”

헥토르는 모자란 제 장남을 떠올리며 혀를 쯧, 찼다.

“바쉬론, 어리석은 것. 더 명을 재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을.”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샤샤라고 했던가, 그 아기.”

로웬은 헥토르의 뒤에 선 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금쯤 샤샤는 레카르도 공작과 함께 있을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인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아가씨께서는…… 어리고, 작고, 성장은 빠르시나 몸도 조금 약한 편이셔서 아프실 때도 많고…….”

“쯧. 그거 말고, 레카르도의 태도 말이다.”

“네?”

로웬은 헥토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뭐…… 확실히, 샤샤 아가씨에 대해서는 태도가 묘하게 달랐다.

샤샤가 아피니제에 끌려갔다는 말을 듣고는 지금까지 보필했던 로웬 자신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짙은 살기를 내뿜으셨지.

그러고 보니, 아피니제도 거슬려 하기는 했지만 이용 가치가 있어 내버려 두는 입장이셨는데…….

헥토르는 하늘을 보고 피식 웃으며 입술을 비틀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재미있는 일도 있는 것이지.”

로웬은 멍하니 헥토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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