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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8화 (18/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8화

레카르도 윈체스터의 집무실, 큰 의자에 앉은 나는 발을 뻗어도 발끝만 의자의 바깥으로 조금 나올 뿐이었다.

집무실의 바깥에 마야가 대기하고 있었고 이 어색한 공간에는 나와 레카르도뿐이었다.

나는 내 맞은편,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나를 응시하는 레카르도를 애써 모른 척하며 벽면의 장식과 훈장을 구경했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편할 날이 없을까.

“……으갸야.”

어디에선가 날아온 잠자리가 내 코 주변에 앉으려 하자 나는 팔을 휘둘렀다.

잠자리는 결국 못 앉고 날아갔지만 나는 재채기를 했다.

“에취!”

재채기를 한 뒤 레카르도를 보자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굳어 있는 것 같았다.

‘이만 저 좀 돌려보내 주세요.’

나와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레카르도는 나를 이리로 데려왔다.

정확히 말하면 날 안고 온 것은 마야이지만…… 마야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상전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것이 그녀의 일일 뿐.

잠시 앉아 나를 응시하던 레카르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긴 다리로 두어 발짝 내딛자 그는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마야.”

그가 입술을 달싹이자 문밖에서 마야가 들어왔다.

마야는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 아이에게 딸린 시녀가 너 하나뿐인가?”

예상외의 질문에 잠시 레카르도를 보던 마야가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트리샤가 친정에서부터 데려온 시녀인 마야의 시중을 받았다. 그 외 윈체스터가의 하녀가 배정된 적은 없었다.

진과 오셀로 각자에게 전속 시종들과 기사들, 병사들까지 배정된 것과는 달랐다.

나는 후계와는 거리가 먼 사생아에 셋째이기도 하고 여아이기도 하니까, 그 정도로 보호해야 할 필요성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막 걸음마를 하는 어린 아기에게 별도의 예산을 할당할 리 없었다.

윈체스터가의 예산은 아피니제가 구성하고 가주가 비준하니까.

“하녀들에, 기사도 하나쯤은 있는 게 낫겠군.”

레카르도의 말에 마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피니제를 해체한 이상 윈체스터가의 예산 권한은 이제 레카르도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사람을 붙여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이야! 아이!”

물론 아까처럼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것은 싫지만, 어쩐지 내 장기적인 계획에 걸림돌이 될 것만 같았다.

내가 옹알이로 싫다는 표현을 해 보아도 닿지 않았고 레카르도는 뒤이어 입술을 달싹였다.

“기사는…… 로빈이 적당하겠군.”

레카르도의 말에 마야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듣고 있던 나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빈은 레카르도의 부관이자 최측근인 로웬 헤르토스의 친동생이다.

로빈은 아직 십 대 후반에 기사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실력이 뛰어난 편이었으며 장차 윈체스터 가문의 핵심 전력 유망주였다.

원작에서는 진 윈체스터의 수족이 되는 악당으로 테일러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남주인공 에반에 의해 끔살당하는…….

“알겠습니다.”

마야는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야디! 우야!”

나는 항의했지만 레카르도나 마야가 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아가씨도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공작 전하.”

마야는 나의 격렬한 반응을 왜곡 중이었고.

“…….”

레카르도는 마음에 드는 것인지 안 드는 것인지 모를 눈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마야에게 말했다.

“오늘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은 네게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미소가 떠올랐던 마야의 입술이 굳었다.

레카르도의 태연한 얼굴과 목소리에 나는 더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잘생기고 멀쩡한 얼굴로, 사람을 죽이니 마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네, 공작 전하…….”

마야는 사냥 대회에서 나를 죽이려는 살수에게는 죽자고 달려들었지만, 오늘 아피니제에서의 일은 가문 내부의 일이었다.

한낱 시녀인 마야로서는 상전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바쉬론이 내게 끔찍한 능력을 사용하자고 했을 때는 절대 그곳에 와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겠지만 말이다.

“이후에도 이 아이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있다면.”

레카르도는 전에도 마야의 생사여탈권을 흔든 적이 있었다.

마야가 100일 무렵의 나를 두고 잠깐 방을 나갔다 왔을 때였지.

입술이 파랗게 질린 그녀는 떨리는 손을 겨우 감추었다.

레카르도 공작의 무시무시한 살기는 금방이라도 마야의 목줄을 틀어쥘 것 같았다.

레카르도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 * *

“흑흑 아가씨…… 죄송해요…….”

방에 들어온 마야는 나를 침대 위에 올리고 울먹울먹 사과했다.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만약 공작 전하께서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피니제 회의실 밖에는 이미 바쉬론의 사병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도망간다고 해도 어떻게든 도로 끌고 갔을 것이다.

“아이야. 아야.”

나는 내 발치에 이마를 파묻고 훌쩍이는 마야의 머리를 토닥토닥했다.

그러자 마야는 살짝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으흑, 우리 천사 같은 아가씨…… 못난 저를 위로해 주시는 거예요? 저번에도 저 때문에 큰일이 날 뻔하시고, 저는 아가씨를 지켜드리지도 못하는데…….”

“우우! 우유유!”

“자비로우신 공작 전하, 그 은혜를 목숨으로라도 갚아야겠죠? 만약 다른 윈체스터 나리셨다면 그 자리에서 저는 손목이 잘린 뒤 목이 뎅강…….”

“우퍄우퍄! 우퍄퍄!”

나는 열심히 옹알이를 하며 소리를 질러 마야의 한탄이 귀에 들어오지 않게 했다.

무지막지한 아동 전집만 봐도 그렇고, 윈체스터가에 아기를 위한 언어 필터란 없었다.

“방금, 오빠라고 한 건가?”

“히이이이익!!”

그리고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난 하늘색 머리카락에 나는 경기를 하듯 뒤로 콩 넘어졌다.

속에서 욕지거리가 솟아올랐지만 입 밖으로 뱉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 진 공자님!”

뒤늦게 진을 발견한 마야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 뒤 마야는 뒤로 넘어진 내 어깨를 붙잡아 나를 다시 세워 주었다.

눈앞에 별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대체 언제 여기에 온 거야.

한동안 관심 좀 덜 받나 싶더니 왜 요즘 이렇게 밀물처럼 윈체스터들이 밀려드는지 모르겠다.

“샤샤는 이렇게 놀라는구나.”

진의 입술이 비틀리는 모양이,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으에.”

나는 고개를 돌리며 진을 내보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마야는 마냥 진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어머, 부끄러워하시는 것 좀 봐요. 낯을 가리시는 건지.”

“샤샤는 낯 안 가려.”

진은 한마디 하더니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아는 것 같은 그 눈과 마주칠 때면 나는 항상 심장이 떨렸다.

“지금까지 가린 적 없었는데, 갑자기 가릴 리가.”

그래, 울음을 터뜨리고 낯가리는 척을 해 보자 생각했던 순간 진은 내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하, 그런가요.”

빨개진 눈으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마야였다.

진은 잠시 말없이 있더니 입을 열었다.

“방금 아버지께 들렸다가 로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샤샤의 전속 기사가 된다더군.”

진의 말에 마야는 잠시 진의 눈치를 살폈다.

“아…… 네, 공자님.”

나 또한 겉으로 티 내지는 못했지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원작에서 로빈은 진의 전속 기사였으니까.

진이 제 기사로 거두고 많은 권한을 주고, 그가 수족으로 쓰던…… 진의 소유.

진의 성격상 어렸을 때부터 로빈을 제 수하로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카르도 공작은 내 전속 기사로 로빈을 지목했다.

“아마 최근에 벌어졌던 일들 중, 아가씨에게 위협적인 일들이 많으니…… 공작 전하께서 특별히 신경을 쓰신 것 같습니다.”

마야는 진의 기분을 살피며 말을 계속했다.

역사상 윈체스터의 후계자 다툼은 수십 명의 목숨이 스러지고 수백의 피를 흘릴 만큼 격렬했다.

하지만 이번 대에 대해 사람들의 걱정이 없다시피 한 이유는, 아직 어리기는 해도 쌍둥이인 오셀로가 진을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고 막내인 나는 출생이 한미한 어린 여자아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내 스킬…… 어쨌든 능력이 얼마 전 화제가 되었고, 로빈마저 내 소속의 기사가 되니 진이 불쾌할 만했다.

“아마 다시 가문이 평온해지면, 공작 전하께서도 기사를 거두실지도…….”

“잘됐어. 로빈은 꽤 능력 있는 기사니까.”

마야는 진의 말에 흠칫 말을 멈추었다.

진의 푸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맺혀 있었다.

“샤샤를 잘 지켜 줄 거야.”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오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

마야도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역시 후환은 없는 것이 낫겠지? 샤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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