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20화
“바쉬론 남작께서 기습을 당하셨대요, 아가씨.”
일어나자마자 들린 마야의 말에 나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아피니제가 열렸었고, 레카르도의 백부인 바쉬론에 의해 나는 큰일이 날 뻔했었지.
원래부터 갈등이 있어 보이던 레카르도의 짓인가 생각했을 때 마야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로젠토 암흑가의 고아들이 연관된 것 같다던데, 수치스러운 일이죠. 양다리에 독화살을 맞아 앞으로 거동이 힘들 것 같다고 하시네요.”
고작 고아들 따위에게 당하냐는 듯한 어조의 말이었다.
윈체스터가에서 약하다는 것은 곧 수치.
하지만 나는 로젠토의 고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무언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윈체스터 형제는 악당 가문의 아들들답게 어릴 적부터 암흑가를 평정했는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때 쯤에는 로젠토의 지하 세력이 모두 윈체스터 형제의 아래에 있었다.
만약 진과 오셀로가 로젠토의 지하 세력과 접촉한 것이 지금보다 더 전의 일이라면…….
‘설마……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억측이네. 그럴 이유가 없잖아.’
내가 바쉬론에게 당할 뻔한 일로 그랬나, 생각하던 나는 비약이 심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진과 오셀로가 원작과는 달리 나와 꽤 가까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원작에서 본 형제는 누군가에 공감하거나 동정심을 가지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유.”
“우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야는 우유를 데우러 가고 나는 푸른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보았다.
아직도 내 팔은 통통하고 짧았고, 손 역시 솜뭉치처럼 귀여웠다.
‘나 언제 크지…… 답답해.’
벌써 두 살이었다.
하지만 걸음걸이는 아장아장 수준이었고 말도 제대로 하려면 한참 먼 것 같고…….
다 큰 어른의 정신으로 아기의 몸에서 지내는 것은 꽤 힘들었다.
다행인 것은 하루 절반 인상을 잠으로 보내는 아기인 만큼, 자주 잔다는 것.
몇 번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지나는 일상이니 시간이 가기는 한다.
그래도…… 얼른 커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조사하고 싶은 것들도 많고.
“아가씨, 여기 우유요.”
마야는 내게 데운 우유를 넘겨주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에 배치된 하녀들과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로빈의 배속 문제도 있고, 아가씨께 배정된 예산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해서 집사님을 만나고 와야 할 것 같아요.”
로빈이라는 말에 나는 어제 레카르도가 내게 기사를 배속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야는 싱긋 웃었다.
“이럴 때 보면, 말을 다 알아들으시는 것 같다니까.”
잠시 마야가 나가고 하녀 둘이 문을 닫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단발의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볏짚색의 머리를 묶고 있었다.
하녀들은 마야보다는 조금 많은 나이로 보였는데, 대충 나를 힐끗 보더니 저들끼리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공자님들과도 가장 거리가 먼 이곳이라니…… 이제 무슨 낙으로 살지.”
“집무실 먼지를 그렇게 닦아 대도 공작 전하께서 눈길 한번 안 주셨는데, 공자님들이라고 뭐 달라질 거 있어? 로웬 님도 딱딱하기 그지없으시고.”
“우리 같은 하녀들 인생이야 상전 눈에 띄는 것만 한 출셋길이 없는데.”
표정을 보니 꽤 불량한 언니들 같아 보였다.
마야가 나가기 전만 해도 얌전한 얼굴이었는데, 아기인 나만 있으니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대화를 봐서는 북쪽 건물에서 근무하던 하녀들 같았다.
가문에서 영향력 없는 어린 여자아이인 내 밑으로 배속되었으니 좌천된 느낌이려나.
“여기는 상전…… 같지도 않은 상전이네.”
하녀는 나를 보며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상전 같지 않은 상전이라니, 나는 볼에 바람을 넣었지만 하녀는 쳐다볼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동료 하녀에게 돌렸다.
“왜, 그래도 혹시 모르지. 듣기로는 저 아가씨 때문에 아피니제가 폐지되었다는데?”
“……설마, 난 애는 질색이야.”
“사실 나도 그래. 전도유망한 공자님들이라면 몰라도.”
마야가 없는 틈을 타 그녀는 접객용 소파 위에 앉았다.
다른 하녀도 그 맞은편에 앉아 등을 기대었고, 둘 다 아기를 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좋게 생각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둘은 이내 몇 마디를 더 나누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고 그들 쪽을 보았는데, 그들은 이미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야가 나간 지 30분 정도 지났다.
‘저택 탐험이나 해 볼까.’
서툰 걸음걸이지만 이제 제법 걸을 줄 아니, 한번 도전해 볼 법했다.
아피니제도 해체되어 다들 집에 간 후이고 이 저택에 윈체스터 성을 가진 나를 위협할 것은 없으니…….
나는 속으로 도전을 외치고 조심조심 방을 나섰다.
* * *
“테일러스에서 협박 서한을 보냈다는 거 들었어요? 오, 공작 전하께서 어떻게 하실지.”
“이참에 그놈들은 아작이 나야 해. 윈체스터의 병사들은 준비되어 있다고.”
푸근한 인상의 하녀와 갑옷을 입은 병사장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은 나는 슬금슬금 고개를 뒤로 뺐다.
“아무튼 남자들은 다들 전쟁광이라니까.”
“그 위선자들이 검은 낯짝을 드러냈는데 피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
“어련하시겠어요. 참, 정어리 파이 먹고 갈래요? 많이 구워 놓았는데.”
광활한 윈체스터 저택에서 길을 잃는 것은 너무 쉬웠고, 그러니까 이건 딱히 내가 방향 감각이 없는 탓은 아니었다.
‘서쪽이, 이 방향이 아니었나.’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뭐가 되었든 앞으로 걸어 나가 보기로 했다.
‘아…… 지도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상태창을 보아도 유감스럽게도 맵 기능은 없었다.
나 같은 귀여운 아기를 ‘무직’이라고 표현해 놓는 시스템에 뭘 바래! 흥!
코너를 돈 나는 순식간에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으야야!”
이마를 살짝 부딪친 나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울음을 참았다.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러니까…… 넘어지면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기의 본능이다.
우쭈쭈 하며 나를 일으켜 줄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휘청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웅?”
그런데 어쩐지 넘어지기 전보다 조금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이 길이 맞는 건가……?
아까 대화하던 하녀와 병사장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는 보지 못했던 길이 보였다.
‘응? 뭔가 있을 거 같은데?”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회랑을 마주한 나는 쭉쭉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잘하면 탈출…… 아니, 독립로를 미리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랑은 꽤 어둑했지만 나는 위풍당당하게 걷기 위해 노력했다.
솔직히 조금 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그냥 돌아갈까?
그리고 기둥 하나를 돈 순간 검은 문 하나가 보였다.
문은 어마어마하게 컸고, 중량도 엄청나 보였으며 나로서는 해석할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
당연하게도 나는 들어갈 생각이라고는 없었다.
공포영화의 법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들어갔다가 무슨 안 좋은 꼴을 당하려…….
“으갸갸!”
슬슬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눈을 한번 깜빡이자, 나는 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특별 구역에 입장하였습니다.(1/1)]
“으아아…….”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짝 얼어붙은 나는 울 타이밍조차 놓쳤다.
그리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움츠린 채 생각했다.
데려온 게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 아기예요. 한 번만 봐주세요.
[해당 구역은 외부의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문을 돌아보았지만 문은 꽉 닫힌 그대로였다.
[해당 구역에서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특별 구역이 대체 뭐야…… 간 떨어질 뻔했잖아.’
다행히 몬스터나 나쁜 놈이 있는 방 같지는 않아 보였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방이기는 했지만 인테리어 구조가 윈체스터가의 여타 방과는 다른 것 같았다.
온통 흰 대리석이라니, 레카르도가 봤으면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리고 저건…… 테일러스의 문장?’
촛대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 나는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책이 몇 권 없는 책장이 있었고, 책상이 보였다.
나는 낑낑대며 의자 위에 올라 책상 위에 있는 책으로 손을 뻗었다.
꼭 이런 곳에 중요한 단서가 있다 이거지.
하지만 책이 멀리 있어서 손은 닿지 않고, 간신히 책의 제목만 보일 뿐이었다.
<테일러스의 가주>
그것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
저거…… 저걸 봐야 한다.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특별 구역의 주인이 입장합니다.]
[인원 초과로 자동 퇴장합니다.]
새롭게 떠오른 글자를 보며 눈을 깜빡한 순간, 나는 어느 어둑한 방에 나동그라졌다.
그곳에는 웃옷을 벗은 채 왼쪽 어깨의 상처를 스스로 소독하고 있는 분홍 머리카락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내자 오셀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몇 초 뒤 오셀로의 눈썹 사이가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꼬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