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22화
“공자님!”
뒤늦게 달려온 마야가 오셀로 앞에 허리를 숙였다.
“너는 어디에 갔다가 이제 오는 거지?”
오셀로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제가 아가씨에 대한 예산 배속 때문에 잠시 집사에게 다녀오느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하녀들에게 아가씨를 맡겼습니다. 사죄드립니다.”
하녀들은 새파래진 얼굴로 덜덜 떨며 머리를 숙였다.
“…….”
그래, 잘했어, 마야.
하녀들은 벌받아 마땅하지만 아기인 내가 사람 죽는 모습을 꼭 봐야겠냐고.
나는 마야에게 달려가 마야의 어깨를 짚었다.
“마야야.”
그리고 오셀로를 돌아보았다.
이쯤 됐어, 오셀로. <테일러스의 가주>는 전체 연령가라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하녀들을 보니, 이 정도면 저들에게도 충분한 인생의 교훈이 된 듯했다.
마야가 이어 말했다.
“새 하녀를 데려오고…… 저 둘은 북쪽 헛간으로 보내겠습니다.”
그 말에 하녀들은 흑, 하고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북쪽 헛간이라면, 사냥한 몬스터들을 해체하는 곳인데?
하녀들 같은 자유민이 아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노예들이 죽을 때까지 강제 노역을 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아무튼 환경이 매우 혹독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
목이 죄는 듯한 살기를 내보이던 오셀로의 기운이 점차 잦아들었다.
잠시 후 오셀로가 하녀들에게 말했다.
“목숨을 건진 것을 천운으로 여겨라.”
어쩐지 다음에 눈에 띄면 죽이겠다는 협박으로 들렸다.
오셀로의 분노를 가라앉힌 마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야가 뒤를 돌아 매섭게 눈치를 주자 두 하녀들은 뒤로 물러나 사라졌다.
오셀로는 한참 동안 나를 보다가 마야가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참고로 꼬맹이 때문에 화난 거 아니니까 허튼 생각은 마.”
오셀로의 짙은 눈동자 표면에 내가 서려 있었다.
그 차가운 목소리에 내 눈이 일렁이자 오셀로는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가차 없이 휙 돌아서며 오셀로가 말을 덧붙였다.
“윈체스터가 하녀 따위에게 모욕당하는 걸 두고 보지 않을 뿐이야.”
마야는 오셀로가 복도 너머로 사라지기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오셀로의 뒤에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흑염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 * *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 것들에게 아가씨를 맡긴 제 잘못이 크지만, 아가씨도 그렇게 함부로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요.”
침대에 나를 앉히며 한숨을 쉬는 마야의 시선을 나는 애써 피했다.
뭐, 잘못은 잘못이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넘어진 곳이라든지.”
마야는 내 무릎과 다리를 살폈다.
부드러운 레이스가 펄럭였다.
그리고 이내 따뜻한 물그릇을 가져와 내 손발을 깨끗이 씻겨 주었다.
“우유 우유.”
벌러덩 누운 내가 옹알대자 마야는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가씨.”
마야가 등을 돌려 잠시 우유를 타는 동안 나는 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아까 이동한 방에서 책 한 장을 뜯어 온 것이다.
원래는 책을 통째로 잡으려 했으나, 책 종이가 잡힌 순간 퇴장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오셀로의 방에서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가져온 것은 이 종이 한 장밖에 없었다.
<테일러스의 가주>라는 제목의 책을 떠올리며 나는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이미 야누트어를 익힌 나였기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붉은 노을이 지지 않는 낮이 지나면 별 하나 없는 어두운 밤이 온다.
어둠의 근원이 뿌리 뽑혀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뿌리는 테일러스에서 왔는지도 모르겠다.
윈체스터는 적어도 카이사와 같은 악독한 술법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으니.
세상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득하고, 나는 홀로 있었다.
스물일곱 번째이다.’
응? 내가 알던 <테일러스의 가주>라는 소설과 다르다.
이 내용은 누군가 직접 쓴 일기에 가까웠다.
나는 내용을 다시 읽어 보았다.
‘세상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득하고, 나는 홀로 있었다.
스물일곱 번째이다.’
전에 쓴 문장들보다 조금 흐트러진 필체가 눈에 띄었다.
이것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갔던 그 방의 주인일까?
그리고 스물일곱 번째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멸망, 불길하고 초조한 단어다.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가씨, 우유 타 왔어요.”
문득 눈앞의 우유병을 바라보던 나는 착 하고 그것을 두 손으로 잡았다.
우유병의 온기가 놀란 내 가슴을 따스하게 달래 주었다.
* * *
“으흑…….”
“흐흐흑…….”
눈물을 훔치며 어깨를 숙인 채 나오는 하녀 둘을, 로빈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록센 영지를 정리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차이다.
전도유망한 진 윈체스터 공자의 호위 기사로 임명받는가 싶었더니, 막내 아가씨의 기사가 되라니……. 조금 김이 빠지기도 해서 심란한 찰나였다.
윈체스터 가문에서의 출세는 물 건너간 건가 싶기도 했다.
“저 하녀들은 왜 대낮부터 울상입니까?”
로빈의 말에, 그의 가까이에 있던 노시녀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촐싹거리며 잇속만 좇더니 저렇게 될 줄 알았어. 남들이 충고해 줄 때 들었어야지. 결국 저리 험지로 쫓겨나지 않소.”
“예?”
“일 년 새에 저택 분위기가 이렇게 바뀐 것을 보고도 눈치가 없다니까.”
그 말을 듣고 로빈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멀리 우뚝 보이는 성벽과, 견고한 요새와도 같은 윈체스터 저택.
“대체 뭐가 변했다고 그러시는 겁니…….”
주변을 둘러보던 로빈은 문의 모서리를 따라 스펀지형의 쿠션을 덧대고 있는 하녀들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날카로운 모서리들과 구조물들이 쿠션으로 덮이고 있었는데 쿠션은 제 무릎부터 허리께까지에 위치했다.
무언가의 키에 맞추듯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저것들이 군데군데 붙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뭡니까?”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넘어져서 이마가 찍히는 것을 방지하는 물건이라우.”
“예?”
“혹은 손이 베이거나 부딪히거나 하면 안 되니까.”
로빈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알기로 저택에 걷지 못하는 불구는 없었다.
“눈치가 없는 것을 보면 기사님도 얼마 버티지 못할 듯한데, 쯧쯧.”
노시녀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무슨 일인지 말해 주세요.”
“말할 수 없다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인님들은 공공연하게 이야기가 떠도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그리고 사내들답게 쑥스러움도 있으시지.”
로빈은 노시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주인님들의 기분에 맞추어, 언짢은 일 없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일 뿐.”
노시녀는 ‘기사님도 잘해 보라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뭘 잘해 보라는 거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서 있을 때였다.
“음~ 음음♪”
큰 과일 바구니를 든 하인이 로빈의 뒤를 스쳐 지나갔다.
윈체스터의 귀족들은 어린아이들조차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저택에서는 단 냄새를 맡기 어려웠다.
하지만 먼 곳으로부터 달콤한 퓨레 향이 풍기고 있었다.
“대체…… 달라진 것이…….”
로빈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우뚝 멈추어 뒤돌아보았을 때 로빈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했다.
어린 소년에게 어떻게 저런 기운이 새어 나올 수 있을까.
강한 기사이지만 평범한 인간인 로빈으로서는 경이로운 느낌이 들 정도의 기운이었다.
그래서 더욱, 눈앞의 진 윈체스터의 기사가 되지 못해 아쉽기도 했고 말이다.
“로빈 경.”
진의 목소리에 로빈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진 공자님을 뵙습니다.”
짙은 흑염을 내뿜는 진이 로빈에게 다가와 섰다.
거인이 다가오는 듯한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이내 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오늘은 경과 놀고 싶군.”
그 말에 로빈이 숙인 고개를 들고 진을 바라보았다.
진의 서늘한 녹안이 짙은 이채를 띠고 있었다.
“놀이라 하심은……”
“경이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야.”
진의 뒤에서 피어오르는 선연한 흑염에 로빈은 긴장한 채 진을 바라보았다.
자격이라면…….
“……!”
일순간 아까 노시녀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어린아이 키 높이의 보호 장비들과, 묘하게 겁에 질린 얼굴로 이쪽을 보는 하녀들이 보였다.
진은 등골이 서늘해지도록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꽤 중요한 것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