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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24화 (24/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24화

윈체스터 저택의 돔 형 총회장.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1년에 한 번, ‘어둠의 기일’이 되면 윈체스터의 성을 가진 혈족들의 모임을 위해 사흘간 개방하는 곳이었다.

설화에 나오는 흑염의 근원인 ‘흑룡’을 찬양하는 것이 명분상의 목적이다.

하지만 윈체스터의 후손들이 긴밀히 교류하며 정보를 나누고, 협력하고, 윈체스터의 세를 과시한다는 것이 실제 목적이었다.

파티 후 둘째 날에는 각자의 물건 하나씩을 어둠의 잔 안에 넣으며, 자신이 어둠에게 선택받았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오늘은 기일의 첫날이었다.

고풍스럽고 화려한 총회장을 여유롭게 거닐며, 손님들은 간만에 찾은 윈체스터 저택의 풍광을 즐겼다.

웅장한 음악이 끊이지 않고 연주되었고, 요리사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요리들과 술을 준비했다.

“공녀님에 대한 소문 들었어요?”

“공녀님은 무슨. 정식 혼인도 하지 않은 퀠른가의 여자에게서 낳은 서녀인데.”

“적자들보다도 외양은 닮았다던데요. 은발에 녹안…… 재미있는 일이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샤샤 윈체스터에 대한 소문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래도 테일러스를 압박할 계기가 되었으니…… 가주께서도 관심을 가지시는 거겠죠.”

“작년에는 바쉬론 경이 마음만 앞섰지.”

“습격의 범인은 테일러스겠죠? 독화살에서 테일러스의 독이 발견되었다고 들었어요.”

“다리가 낫지 않아 이번에 꽤 유명한 치료사를 들인다던데, 차도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곳에 모인 50명 정도의 절반 이상은 레카르도 윈체스터와 8촌 이내의 방계 혈족이었다.

사실 직계를 기준으로 8촌을 넘기면 ‘윈체스터’라는 성을 사용할 수 없었고 흑염의 이능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제국에서 ‘윈체스터’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아피니제의 멤버로서 레카르도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레카르도답지 않아. 분명 뭔가가 있어. 바쉬론의 습격 사건도 그렇고…… 그 꼬맹이에게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그중 하나인 제스티아는 제단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샤샤 윈체스터가 태어난 뒤, 윈체스터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은 상당히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레카르도, 그 꼴 보기 싫은 녀석이 가주 자리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짜증 나는데, 바쉬론과 제스티아가 윈체스터 저택에 심은 첩자들과의 연락도 족족 끊기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드디어 꼬리가 잡히나 싶었는데…… 레카르도는 과민 반응을 했다.

고작 막내, 서녀인 계집아이 하나에 말이다.

“냄새가 난단 말이야.”

제스티아의 곁에 있던, 그녀의 딸 페르메티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알아볼게요,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페르메티스는 올해 일곱 살로, 진과 오셀로와는 두 살 차이였다.

제스티아를 닮은 구불거리는 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노예 출신의 아버지를 닮아 붉은색이었다.

제스티아는 페르메티스를 낳은 뒤 제 애첩이었던 남자 노예를 죽여 버렸다.

그것이 윈체스터의 성을 물려주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오빠들은 제게 친절하니, 제가 물어보면 잘 알려 줄 거예요.”

페르메티스는 자신이 있었다.

진 윈체스터와 오셀로 윈체스터 형제는 또래의 다른 윈체스터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곤 했지만 제게는 친절한 편이었다.

제스티아가 페르메티스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뭐든지 단서를 가져와. 쓸 만한 거면 좋고.”

“네, 어머니.”

페르메티스는 제스티아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었다.

페르메티스는 글자를 익히기 시작할 무렵부터 계략과 계책에 대한 기술을 열심히 배운 만큼 열 살 정도의 어린애들은 쉽게 구워삶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훈련받은 다른 윈체스터의 아이들도, 페르메티스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어, 저기, 진 아니에요?”

잠시 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페르메티스는 반갑게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진은 오셀로에 비해 대화가 통하는 스타일이었고, 매너와 예의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그들의 모습이 보이자 페르메티스의 눈썹이 조금 굳었다.

“진과 오셀로 사이에 저 아기…….”

“은발과 녹안이에요. 저 아기가 그 막내?”

모인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피니제에 있었던 멤버들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샤샤 윈체스터를 바라보았다.

귀엽게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과 하얗고 오동통한 얼굴.

커다란 눈은 반짝이는 녹색이었다.

입고 있는 라벤더색의 드레스는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는데, 아기가 걷는 길을 따라 묘하게 어두운 이곳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 같았다.

샤샤 윈체스터의 양옆에는 오셀로와 진이 있었다.

둘은 아기의 손을 잡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서늘하고 차가운, 레카르도의 분위기를 그대로 닮은 하늘색 머리카락의 진 윈체스터.

그리고 다혈질에 까칠하고 사나운 분위기를 풍기는 분홍 머리카락의 오셀로 윈체스터.

그들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 * *

뚜벅뚜벅 걷던 나는 발을 멈추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렇게 살벌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상대적으로 따스하게 느껴지는 눈빛도 있었지만, 고작 아기인 나를 의심하듯 보는 눈초리부터 경계하듯 보는 눈초리까지…… 시선의 온도는 다양했다.

진과 오셀로는 익숙하다는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윈체스터 가문은 약육강식이 모토라고 했다.

보통은 가장 강한 흑염이 주어진 아이가 대대로 직계의 자리를 이어받지만, 레카르도 윈체스터의 아버지…… 에녹 윈체스터,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는 가주가 아니었다.

그는 경쟁에서 도태되었고 가주의 자리는 바쉬론에게 넘어가야 했지만, 12년 전 불과 열일곱 살이던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압도적인 힘으로 바쉬론을 누르고 가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계는 원작대로 진이 될 것이다.

진의 흑염은 레카르도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처럼 강한 수준이라, 누구에게 위협당할 일은 없다.

문제는 후계의 첫걸음도 내딛기 전에, 에반 테일러스에 의해 가문이 멸문할 예정일 뿐.

“우야…….”

말이 트이면 이 둘에게 귀띔이라도 해 줘야 하나.

영 귀찮긴 해도 내게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는데.

나는 진과 오셀로를 보며 잠시 이른 고민을 했다.

이내 나를 향한 시선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고, 다시 삼삼오오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발랄한 목소리가 옆쪽에서 들려왔다.

“오라버니들!”

고개를 돌리자, 예닐곱 살쯤 된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눈은 붉은색이었고 얼굴은 꽤 예쁜 편이었다.

누구 닮았는데, 생각한 순간 나는 조금 떨어져 있는 제스티아와 눈을 마주쳤다.

제스티아는 나를 보더니 피식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뭐지……? 느낌이…….

“페르메티스.”

오셀로가 눈썹을 찌푸리며 평이한 어조로 그 이름을 불렀다.

약간은 귀찮다는 반응 같기도 하고.

진은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아는 얼굴을 대하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오라버니들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보통 쑥스러워할 만도 한 이 또래의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진솔한 감정 표현이었다.

그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진과 오셀로에게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빠들 둘 다 키가 큰 거 같은데요? 페리는 아직 너무 작은데.”

그러고는 손을 펼쳐 제 머리에 대어 보였다.

“올해 일곱 살이었나?”

“네, 일곱 살이요. 나도 오셀로 오라버니만큼 쑥쑥 크고 싶은데에. 진 오라버니가 알려 주었던 토리베리를 많이 먹었는데도 크지 않아.”

약간의 애교를 덧붙이며 페르메티스는 조금 울상을 지었다.

진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너도 곧 클 거야.”

오셀로는 딱딱한 무표정이었고 페르메티스는 금세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겠죠? 그런데 오셀로 오라버니는 오늘도 조금 무서워. 그래도 사냥 대회에서 1등했다고 들었어요. 우와아.”

다른 건 몰라도 페르메티스라는 이 애, 사회성 하나는 끝내주는 것 같다.

“멋있어요, 오셀로 오라버니. 그리고 축하해요.”

“……응.”

오셀로는 페르메티스가 영 불편한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할 뿐이었다.

<테일러스의 가주>에서, 반사회성으로는 1위를 달리는 오셀로다웠다.

오셀로의 반응에 기가 죽을 만도 하지만, 페르메티스는 환하게 웃으며 진에게 말했다

“저희 여름 저택에 사냥감들이 많아요. 올해에도 오빠들이 와서 샤냥 놀이도 하고 페리랑 놀아 줬으면 좋겠다.”

눈웃음 지으며 말하는 페르메티스를 보고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슈리트 산맥에는 적당한 놈들이 많지. 그런데 그전에…….”

진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샤샤를 소개했던가?”

페르메티스는 그제야 나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샤샤! 맞아요! 아기가 태어났다고 들었는데 처음이네요.”

아까 물어봤을 법도 한데.

“오라버니들이 너무 반가워서 아기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잊었네요. 바보 같은 페리.”

‘에고’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페르메티스는 환하게 웃었다.

“안녕, 아기야. 나는 페리야.”

나를 향해 싱긋 웃는 그 눈동자 표면에 내 얼굴이 비치자, 나는 그제야 어딘가 익숙한 ‘페르메티스’라는 이름을 기억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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