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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25화 (25/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25화

<테일러스의 가주>는 로판 소설이 아닌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인 에반 테일러스 위주로 전개가 이루어졌고, 작가의 취향인지는 몰라도 딱히 히로인이 있지는 않았다.

여자 등장인물들의 비중은 극히 한정적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메마른 러브 라인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생각하는 에반의 연인 후보가 둘 정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페르메티스 윈체스터였다. 다른 하나는 남자인 마탑주 카실리온이다.

제스티아 윈체스터의 늦둥이 딸 페르메티스 윈체스터.

그녀는 제스티아의 조기 교육으로 타고난 악당이었지만, 십 대 시절 에반 테일러스를 만나며 그의 정의로운 사상에 감화되어 간다.

결국 에반 테일러스의 친구가 되어, 악랄한 윈체스터의 기밀 정보들을 그에게 넘겨주고 에반이 윈체스터를 함락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윈체스터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것이다.

여기서 별미인 것이 그녀와 오셀로 윈체스터의 관계였다.

오셀로 윈체스터는 8촌이던 페르메티스를 위해 뭐든 할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했다.

집착하게 된 시점이…… 여름에 페르메티스가 오셀로의 실수로 길을 잃어 죽게 될 뻔한 이후라고 했었는데.

달갑지 않은 사과를 한 오셀로에게, 페르메티스가 꼭 안으면서 ‘오라버니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라는 말을 한 후라고 했었지.

아무튼 페르메티스의 배신을 알고 난 뒤 죽음의 문턱에서도 오셀로는 그녀에게 ‘너라도 무사해서 다행이야.’라는 말을 남긴다.

소시오패스 사이코로 작품의 주된 빌런 중 하나를 담당했던 오셀로가, 마지막만은 여운을 남기고 죽게 된다.

찐사랑이었다는 둥 미친 악당 미화하지 말라는 둥 갑론을박의 댓글이 달렸던 화였지.

그런데 이 애가…… 그 페르메티스?

“…….”

붉은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어딘가 불길했다.

“아직 말을 잘 못하나 봐요. 아기니까. 아앙, 귀여워.”

불길할 수밖에.

에반 테일러스를 만나기 이전의 그녀는 악당으로 키워진 아이이다.

그리고 에반에게 감화한 후…… 윈체스터의 입장에서는 배신자가 된다.

잔혹하고 어두운 윈체스터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며, 이제는 세상에 빛을 주고 싶다는 페르메티스의 말은 독자로서는 꽤 반갑게 느껴졌지만…….

나는 윈체스터이다. 샤샤 윈체스터. 원작에서는 윈체스터 가문과 흥망을 같이했던 인물.

물론 이후 어떻게든 탈출과 독립을 할 테지만 그녀는 내게 반가운 인물은 아니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안 해…….”

나는 반사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오셀로의 팔을 잡았다.

오셀로는 눈썹을 꿈틀하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 가야?”

페르메티스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미안한데 너랑은 친해지고 싶지 않아.’

“안 해. 시여!”

진은 잠깐 어색해진 그 분위기를 관망하더니 입을 열었다.

“낯을 가리는 거야, 페리.”

“낯이요? 그게 뭔가요, 오라버니? 페리를 싫어하는 건 아니겠죠?”

페르메티스는 걱정이 가득 찬 눈으로 진을 보며 물었다.

“낯선 사람을 보고 경계하는 거야. 샤샤가 보기에는 네가 낯설 테니까.”

“……그…… 그렇구나. 페리도 아가 때 이랬을까요?”

“응.”

발랄하고 환했던 페르메티스는 주눅이 든 표정을 했다.

“페리는 아가야랑도 친해지고 싶은데. 그래서 같이 여름 저택에서…….”

그리고 오셀로에게 슬쩍 시선을 올렸다.

위로해 달라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오셀로는 내 손을 잡았다.

“이리 와. 달갑지 않은데 참을 필요 없어.”

오셀로가 나와 함께 휙 돌아서자 페르메티스가 눈썹을 움찔했다.

이내 그녀는 상처라도 입은 듯 얼어붙어 나를 보았다.

나는 오셀로에게 끌려가듯 발을 움직였고, 진이 페르메티스를 달래 주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오…… 오라버니…….”

“오셀로는 샤샤가 우는 소리를 싫어하거든. 페리는 나와 있자.”

“네…… 네에. 하지만 저 너무…….”

나는 아장거리며 겨우 오셀로의 빠른 발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언제나처럼 심통이 가득한 눈썹의 각도와 표정.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어차피 나중에 페르메티스를 좋아하게 될 텐데…….

“난 쟤 마음에 안 들어. 쟤 엄마가 싫어서 더욱.”

오셀로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중에 페르메티스를 좋아한 오셀로는 슬픈 최후를…….

“너도 그렇지?”

멈추어선 오셀로가 불쾌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린 채 묻는 순간 어째서인지 그의 미래가 떠올라 가슴이 쿵쿵 뛰었다.

* * *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파티 후반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파티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보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는 파티에 어울리는 정장 차림이 아닌, 긴 망토가 달린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에 찬 탁한 빛의 무거운 검집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사람이라도 해치고 온 듯, 피 냄새를 풀풀 풍기는 그가 상석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레카르도를 향했다.

부관 로웬의 갑옷에도 혈흔이 튀어 있었다.

“음악이 영 아니군.”

자리에 앉은 레카르도의 말에 악단 지휘자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음악이 끊기고, 부들부들 떠는 그의 손이 보였다.

레카르도는 피식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냥을 하고 온 것뿐인데 다들 나를 괴물 쳐다보듯 보는군.”

그의 몸 뒤로 흑염이 저리도 짙은데 다들 그럴 수밖에.

그 사냥이 동물 사냥인지, 사람 사냥인지는 모를 일이다.

거만하고 고고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던 제스티아의 표정도 어둡게 굳어 있었다.

“한 잔 주게.”

모두가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경계하는…… 윈체스터의 가주, 레카르도 윈체스터.

“…….”

부관 로웬이 건넨 잔을 받아 목을 축인 레카르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피 냄새를 지울 만큼 즐거운 곡으로 연주해. 좋은 날 주인이 분위기를 망치면 곤란하니.”

“명 받들겠습니다, 공작님.”

벌벌 떠는 목소리로 대답한 지휘자가 힘껏 손을 내젓기 시작했다.

웅장하지만 잔잔했던 곡은 경쾌하지만 호전적인 분위기의 곡으로 바뀌었다.

쥐 죽은 듯 레카르도의 등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지만 레카르도의 등장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마야가 먹여 주는 과일을 받아먹던 나는 멍하니 레카르도를 보고 있었다.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확연히, 윈체스터 가문의 사람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성인 남녀를 통틀어 압도적으로 잘난 저 외모도 그렇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흑염의 존재감도 그렇고 말이다.

들어오는 순간 압박감을 느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딸꾹.”

“아가씨?”

그리고 영 거칠어 보이는 레카르도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사람은 많았고, 나는 상석과는 꽤 거리가 있기에 안 볼 줄 알았는데.

눈이 마주쳐 버렸다.

나는 딸꾹거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레카르도가 입꼬리를 잠시 올리는 듯싶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제게 다가온 윈체스터의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레카르도에게 굽실대며 뭔가를 청하는 듯한 얼굴과, 고고한 레카르도의 표정.

으. 그의 검집에 시선을 돌린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딸꾹.”

“어머, 추우세요, 아가씨?”

마야는 가져온 숄을 내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오셀로는 조금 옆에 떨어져, 라임 주스를 홀짝이고 있었다.

또래의 애들 서넛이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가, 오셀로가 휙 하고 노려보자 숨을 들이켜며 뒤돌아 사라졌다.

마야는 그런 오셀로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사교계에 데뷔하려면 한참 지나야겠지만, 가문에서의 데뷔는 성공적이네요, 아가씨.”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공자님들이 직접 에스코트해 주실 줄이야.”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힘이 약하거나 서출이거나 하면 무시당하고 괴롭힘당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다.

마야가 읽어 준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과 오셀로가 에스코트해 주며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나에 대해 뭔가 속닥댈 의지를 잃은 것으로 보였다.

아마 오늘의 나는 모두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했을 것 같다.

“참고로…… 공작 전하께서 명령하셨대요.”

그리고 들려 온 마야의 속삭임.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딸꾹.”

나는 레카르도 공작을 바라보았다.

원작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그는 세심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 유형이었다.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자라,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암왕’.

그가 무언가를 행하면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악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정말 나를 호의적으로 보는 것일까? 원작을 읽은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

그러니 그의 생각이 파악될 때까지 나는 앞으로도 그를 잘 경계할 생각이었다.

그는 홀로 잔을 비우고 있었고, 눈에는 짙은 어둠이 서려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눈앞에 언젠가 보았던 상태창이 떴다.

[특별 구역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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