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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27화 (27/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27화

‘X됐다.’

형편없이 박살이 난 깜짝볼과 그것을 밟고 나를 응시하고 있는 레카르도를 본 순간 나는 바로 생각했다.

더 이상 깜짝볼의 효력은 지속되지 않는지 홀린 눈의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을 되찾은 상태였다.

“…….”

내게 시선이 쏠리자 마야는 화들짝 놀랐다.

“아, 아가씨. 언제 거기에 가신 거예요.”

기둥 뒤에서 쭈뼛쭈뼛 나온 내게 마야가 달려왔다.

저번과 달리 그래도 적절한 장소에 이동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더 큰 의심을…… 아닌가, 지금도 상황이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너…….”

오셀로도 눈썹을 찌푸리는 것 같았다.

다른 공간에 다녀온 것을 들킨 건 아니겠지?

원작의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숙력된 암살자들의 기습을 쉽게 알아차릴 정도로 예리하고 감이 좋았다.

그의 짙은 녹안을 바라보는 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거…….”

붉은 입술이 달싹이는 것에 나는 움찔했다.

그의 발치에 있는 박살 난 깜짝볼이 내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잠시 관심받는다는 것에 취해 그가 엄청난 악당이라는 것을 잊었던 걸지도 모른다.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네 것인가?”

상당히 거리가 있었음에도 서늘하게 내리꽂히는 그 살벌한 눈빛에 나는 얼어 버린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파티 분위기를 망친 것에 대한 비난인가. 혹은 내가 뭔가 했다는 것을 눈치챈 건가?

마야 역시 당황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아가씨 장난감 중에…… 이런 건 없었는데…….”

좌중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진의 시선도 페르메티스의 시선도, 제스티아의 시선도……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서 잘못하면 큰일이 날지도…….

그러니 이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내 입이 벌어진 것과 같은 순간이었다.

“샤…… 샤샤는!”

이래 봬도 이 몸은 세 살이다.

세 살의 아기란 언제 어디서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무서운 아저씨와 눈만 마주쳐도 우는 게 자연스러운 시기!

“몰라요…….”

내 눈에는 금세 서러운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의 포인트는 불쌍하게 울음을 참는 모습이니까.

본래 우앙, 하고 거칠게 터지는 울음보다 이렇게 주먹을 꼭 쥐고 눈물만 흘리면 더 불쌍해 보인다.

뭔가 더 묻기도 애매한 분위기가 되어 버리고.

“히끅…….”

나를 응시하던 진과 오셀로가 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아…… 아가씨…….”

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에 몰입하다 보니 진짜 서럽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

깜짝볼이 물리적 충격에 그렇게 쉽게 부서질 줄은 몰랐다.

주의 문구라도 적어 놓았어야지.

히끅.

아직도 레카르도가 나를 보고 있었다.

“…….”

레카르도는 잠시 후 찡그린 눈썹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이리 와라.”

나는 울먹이며 레카르도의 앞에 다가가 그를 바라보았다.

꽤나 불쌍한 표정이었는지, 그가 눈썹을 한 번 더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나를 바라본 후 제 미간에 손을 짚은 레카르도가 마야에게 말했다.

“아기를 데리고 들어가라.”

마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공작 전하.”

* * *

아찔했던 밤이 끝나고 나는 그날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간밤에 레카르도 앞에서 서럽게 히끅대던 일로, 나를 주시하던 친척들 몇은 그 경계가 옅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숨죽여 울먹이는 내 모습에 심지어 동정의 여론도 생겼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모친도 잃었고, 험악한 공작과 이복 오빠들 사이에서 꽤 기가 눌려 자라겠군.’이라거나, 울먹이는 모습이 엄청 안쓰러웠다나 뭐라나.

그리고 어제의 깜짝볼은 폐기되었다고 한다.

“그 장난감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정말…….”

마야가 내게 물었지만 나는 옹알이로 대응할 뿐이었다.

“윈체스터에 들어오는 모든 물건들은 바늘부터 옷장까지 모두 철저히 검수받은 것들이에요. 아가씨 장난감도 그렇고…….”

마야는 내 머리를 묶어 주며 말했다.

“분명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공작 전하도 아가씨가 위험하실까 경계하셨던 것 같아요.”

철저한 검수의 이유는 품질 검증만은 아닐 것이다.

윈체스터가는 적이 많았다.

외부의 적도, 내부의 적도 많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날은 내부의 적을 구분하기 힘든 날.

‘레카르도가…… 설마 날 걱정해서?’

싸늘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언제나 그랬듯 걱정 같은 따뜻함은 없었다.

원작의 레카르도는 누군가를 믿거나 사랑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제 자식들일지라도.

“아냐.”

거울 속의 나는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세 살 아기의 모습이었다.

아직은 내가 뭘 하더라도 나를 의심할 사람은 없겠지만, 앞으로는 행동거지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오늘 저녁에는 어둠의 잔에 물건을 넣는 행사가 있어요. 저 연기는 흑룡께 제물을 태우는 건데…… 아마 오늘도 틀림없이 멋진 장면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창밖의 몇 군데에서 흰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진 공자님께서는 어떤 불꽃을 보여 주실까요? 작년에 정말 멋지셨다고 들었답니다.”

“부꼳?”

윈체스터의 연례행사이자 중요한 의식이었다.

“불이 예쁘게 솟아오르는 거예요. 아가씨도 좀 더 크면 잔에 물건을 넣게 되실 거예요.”

밤과 어둠을 좋아하는 윈체스터의 시조이자 근원, ‘흑룡’.

그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고 어둠의 잔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색을 통해 흑룡의 후예라는 것을 확인받는다.

불길의 농도와 화려함을 통해 누구의 능력이 더 강한지, 누가 흑염에게 후계로 선택받았는지 우위를 가늠하기도 한다.

약육강식이 규율인 가문에서, 일족에게 피를 묻히지 않고 서로의 강함을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어머, 공자님들께서 돌아오셨어요.”

마야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핑크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머리카락이 저 밑에 보였다.

레카르도와 진, 오셀로는 사냥을 하러 떠났는데 둘만 돌아온 모양이었다.

둘 다 검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연한 머리카락의 색 때문인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얼굴에 피가 튀겼는지, 흰 수건을 꺼내 제 볼을 닦던 오셀로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오셀로 공자님께서 여기를 보고 계신데요?”

그 말에 움찔한 나는 침대 가드로 얼굴을 숨겼다.

창살 사이, 피식 웃는 듯한 오셀로의 얼굴이 문득 보였던 것 같다.

그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부끄러우세요, 아가씨?”

나는 싱긋 웃으며 웃는 마야를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제 이후로 드는 생각인데, 가족들과 거리 유지는 꼭 필요한 것 같았다.

그들의 관심을 받을수록 나의 행동에 제약이 걸린다.

그러다가 만약 내가 환생자라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윈체스터 가문은 제국 최악의 악당 가문이다. 나는 그저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작은 끝부분에 걸터앉아 있을 뿐.

“아가씨, 로빈입니다.”

그때,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빈은 6개월 전쯤 내게 배속된 기사였다. 원래 더 일찍 배속되었어야 했는데 부상을 입었다며 조금 늦어졌었지.

원작을 읽었기에 상상했던 오만하고 거친 기사의 이미지와 딴판의 성격으로 매우 친절하다.

“선물들입니다.”

마야는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로빈?”

나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품 한가득 새 장난감들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엽 자동차와 풍선, 빛이 반짝이는 고양이 인형, 곰돌이 인형, 말랑거리는 재질의 동그란 원반, 지금의 내게는 시기가 지난 것 같은 기린 치발기…….

그리고 어제 부서진 깜짝볼과 제법 비슷하게 생긴 공도 세 개나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에는 모두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다.

‘엘르 토이숍’이라는 마크가 찍힌 빨간 리본.

로젠토에 있는 고급 장난감 가게로, 내 장난감 대부분이 그곳 출신이었다.

“아니, 로빈이 무슨 돈이 이렇게 많아서…… 이거 하나가 초임 기사들 월봉은 될 건데요.”

마야는 로빈이 가져온 장난감들 중 고양이 인형을 들며 물었다.

헉, 이게 그렇게 비싼 거야?

장난감 종류가 많지 않길래 내게 배정된 예산이 쥐꼬리만 한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 규모가 내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윈체스터가의 딸이라 이건가?

“당연히 제가 산 건 아니고…….”

로빈은 작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했다.

“전부 혈족들께서 보내셨습니다.”

“네?”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아가씨를 호의적으로 보는 분들이 생겼다는 거겠죠.”

그냥 불쌍한 척했던 것뿐인데? 아니면 오빠들이 에스코트해 준 덕분이려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새로운 장난감이 생겨 기분이 좋아졌다.

선물이란 원래 그렇지 않은가.

나는 깜짝볼을 닮은 분홍색 공을 꼭 안았다.

로빈이 내 귀에 곁들였다.

“그건 공작 전하께서 보내신 겁니다.”

어제 부수었던 깜짝볼 대신인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레카르도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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