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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28화 (28/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28화

제스티아가 잔에 자신의 브로치를 넣자 보라색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

이내 그녀의 몸에 옅은 흑염의 기운이 감돌았고,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년에 한 번, 윈체스터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문의 시조 ‘흑룡’에게 인정받고 결속을 다지는 의식.

윈체스터의 피가 진하게 흐를수록 불꽃의 색이 진하고 컸다.

“내 차례군.”

검은 잔에 다가간 오셀로는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를 넣었다.

짙고 화려한 불꽃이 작은 분수처럼 아름답게 솟아올랐고, 여기저기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셀로는 입술 끝을 비틀며 뒤로 물러섰다.

몸에 감도는 흑염이 더욱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으로 진 윈체스터.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진에게 집중했다.

불꽃은 그가 가진 힘을 의미했다.

물론 대련이나 전투는 수련을 통해 증진할 수 있지만 절대적인 능력은 오로지 흑염의 농도에 달려 있었다.

진은 오셀로와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제 단추를 잔 안에 넣었다.

단추가 컵의 표면에 닿기도 전에 검붉은 불꽃이 엄청난 농도로 타올랐다.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두운 밤을 다 밝힐 정도로 그 빛은 밝았다.

“…….”

오셀로 때와 달리 대부분 입을 다물었다.

개중에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진은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윈체스터가의 후계자였다.

그의 분위기와 능력은,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그 나이였을 때와 거의 흡사했다.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잔과 가까운 상석에 앉아 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

나는 레카르도가 어제 전달한 공을 들고 서 있었다.

나름대로 ‘잘 쓰겠습니다.’의 의미였다.

어제 나 때문에 분위기를 약간 망친 것은 맞을 테니.

잠시 뒤 레카르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카르도의 차례가 온 것이다.

그는 잔에 다가가 자연스럽게 소매의 단을 찢더니 잔 안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진의 흑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흑염…… 아니, 뚜렷한 용의 형태가 잔에서 꿈틀대며 빠져나왔다.

그것은 짙고 검푸른 불길이었다.

빛뿐만 아니라 열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위로 쏘아 올리듯 올라간 용 형태의 검은 불길은 공중에서 웅장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화염방사기를 뿜어내듯 거대한 불길이 퍼지다가 사그라졌다.

나는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경외와 두려움의 시선으로 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대박! 이래서 가주구나!

격이 다른 힘을 본 나는 놀란 속을 감추었다.

* * *

의식으로 서로의 힘을 확인하는 차례가 끝나고 다시 왁자지껄한 무도회 분위기가 되었다.

구경을 끝낸 나는 슬슬 방으로 돌아가려고 옆쪽으로 물러나려 했다.

“아가야는, 해 보고 싶지 않아?”

옆에서 들리는 페르메티스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했다.

언제 내 옆에 와 있었지?

내가 경계하는 표정을 짓자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도 넣는 사람이 없는 지금이 기회야.”

내가 보통의 세 살 아이라면 그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불꽃의 모습은 모두를 매료시킬 만큼 아름다웠고, 그런 걸 보면 자기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보통의 아기들일 테니.

하지만 저 뒤쪽에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제스티아를 본 순간 나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챘다.

전에 심연의 그림자로 내 힘을 알아내려고 했었지.

만약 내가 물건을 넣어 힘을 보여 준다면 그들의 목적은 성취되고, 레카르도에게 혼이 나도 나 혼자만 혼나는 것이니.

‘비겁하네. 아기를 이용하려 하다니.’

“예쁘잖아, 화르르륵.”

페르메티스는 친한 척 내게 바짝 붙어, 나의 행동을 유도하려 했다.

“내가 망 봐 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르메티스는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잡았다.

이내 그녀와 함께 잔이 놓인 단상 가까이 다가갔다.

어른들 누구도 한낱 어린아이들인 우리에게 신경 쓰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먼저 단상 가까이 올라간 페르메티스는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니까 올라와.”

나는 페르메티스에게 손 대신 공을 먼저 건넸다.

페르메티스는 공을 자신에게 잠시 맡겼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손으로 공을 잡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네 불꽃은 내 불꽃보다 예쁠 거야. 가자.”

하지만 나는 페르메티스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럼 나는 어머니께 칭찬받고, 너는…….”

페르메티스의 눈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우다다다.

나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렸다.

“아기…… 야?!”

페르메티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 꽤 멀리 도망쳤을 때 손가락으로 페르메티스를 가리키며 외쳤다.

“곤!”

각자 대화에 열중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고, 그 후엔 페르메티스에게 쏠렸다.

“샤샤 곤!”

페르메티스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일곱 살 언니, 미안한데 지난 생과 지금 나이를 합치면 전 스물일곱 살이에요. 허접한 계략에는 당하지 않는답니다.’

내가 비장한 표정으로 ‘곤’ 하고 외치는 이유는 하나.

페르메티스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페르메티스, 지금 뭐 하는 거니? 샤샤의 공을 넣으려고?”

“어른들이 시켰나 보죠. 제스티아라든지.”

혈족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아기의 공을 빼앗으면 어떡해.”

제스티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이 보였다.

누가 보기에도 페르메티스가 내 공을 강탈해 잔에 넣으려다가 들킨 상황.

페르메티스는 당황한 채 입을 열었다.

“아…… 이, 이건 샤샤가 먼저 넣겠다고 한 거예요.”

“말도 못 하는 아이가?”

비웃음 같은 시선이 쏟아졌다.

다들 어제 처연한 표정으로 히끅대던 내 모습을 보았는데, 내가 일부러 페르메티스를 곤경에 빠트렸다고 생각할 리 없다.

페르메티스는 나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너…… 하겠다고 했잖아!”

그때 들리는 목소리.

“그만.”

정적과 함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몇몇 부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레카르도의 목소리에 페르메티스는 달달 떨며 공을 떨어뜨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레카르도의 시선은 공에 향해 있었고, 페르메티스의 잘못을 책망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결국 페르메티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칠칠치 못하게…… 가자!”

제스티아는 단상에 올라가 페르메티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말이다.

속이 조금 시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이용하려 들다니! 쌤통이다.

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아니지만.

“…….”

문득 나는 나를 보고 있는 레카르도의 시선을 느꼈다.

설마 다 본 건 아니겠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하인을 통해 공을 돌려받은 후 조르르 자리를 피했다.

* * *

‘아무튼 그럭저럭 무사히 지나간…… 거 맞겠지.’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 역시 마야의 치마를 다시 잡으려는 순간,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뒤를 돌아본 마야는 레카르도를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네, 공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넌 잠시 나가 있거라, 마야.”

레카르도의 명령에 마야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레카르도의 눈빛이 워낙 서늘하고 확고한지라 그녀는 토 달지 못하고, 나를 두고 나갔다.

레카르도와 독대하고 있는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잡고 있던 분홍색 공에 힘이 꾹 들어갔다.

아까 내가 한 일을 봤을 리 없다.

그가 부관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 페르메티스를 따라갔으니까.

그렇다면 어제 장난감의 출처를 물어보려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사라지는 것을 봤다고 하지는 않겠지?

조금의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마음을 숨긴 채, 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빠?”

내가 소리를 내자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샤샤.”

그의 입술이 달싹이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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