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29화
레카르도의 눈썹은 굳어 있었고, 미간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음에도, 은발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흔들리는 것은 내 시야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나는…… 떨고 있으니까…….
‘역시 독대는 무서워…….’
혼…… 내려는 건가. 아니면 그보다 더한…….
경계 어린 눈으로 레카르도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흠칫 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페르메티스를 상대했던 일 말인가?
하지만 그는 부관들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정황을 모를 텐데.
내가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이자 그는 다시 표정을 딱딱하게 했다.
의도를 몰라 긴장하고 있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제 같은 상황은 조심할 필요가 있어.”
어제라면…….
“……직접 보는 게 낫겠군.”
그가 앞으로 손을 폈다.
그러자 투명했던 앞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에 검은 기운이 스며들더니 마치 물이 끓듯 부글대는 것이 보였다.
쭉 편 손의 방향을 90도 정도 틀자 문이 열리듯 그 안이 보였다.
그 안을 본 나는 절로 뒤로 물러났다.
머리가 세 개인 검은 개가 보였다.
도베르만처럼 검은 털을 가진 그 개는 매우 사나워 보였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나를 잡아먹을 듯 짖는 것을 보고 나는 점점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질 뻔했다.
위를 올려다보자 태연한 얼굴을 한 레카르도가 보였다.
어제 울었다고 나를 저 개의 밥으로 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졌을 때였다.
“윈체스터 저택에는 경비병들이 있다.”
레카르도의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었다.
“인간의 살과 피를 좋아하지. 젊거나 어릴수록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더군.”
나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양손을 꼭 잡고 개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리면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달려들 것 같았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경비병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지만, 길 모르는 이들은 종종 밥이 된다.”
그의 말에 나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중세 유럽의 성처럼 보이는 이 저택에, 저런 ‘경비병’들이 있다는 거야?
원작에서도 윈체스터가 테일러스에 스파이를 심듯, 테일러스도 윈체스터에 정보원을 심었다.
암살을 위해 보내지는 자들도 있었고.
그러니 저런 경비병은 보안을 위한 장치인 것이다.
길을 잘 모르는,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면 목을 물어뜯을…….
목 세 개 달린 도베르만은 한참을 으르렁대고 있었고, 레카르도가 다시 손의 방향을 틀자 문이 닫히듯 개의 모습이 사라졌다.
레카르도가 내게 하려는 경고를 알 것 같았다.
함부로 돌아다니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나는 개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얼어 있었고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가 봐라.”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레카르도의 목소리를 들은 마야가 잠시 뒤 문을 열었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마야에게 달려갔다.
“…….”
마야는 내 어깨를 토닥이고는 고개를 깊이 숙여 레카르도에게 인사했다.
그 시간마저 내게는 꽤 길게 느껴졌다.
아까 굶주린 개의 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 * *
“아가씨께서는 똑똑하셔서 벌써 말을 거의 알아듣는다고 하셨는데…… 너무 놀라시지 않으셨을까 걱정입니다. 몸도 약하신 분인데.”
로웬의 말에 레카르도는 입술 끝을 비틀었다.
창밖으로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뭐……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젊고 어릴수록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는 표현은 그…… 아닙니다.”
레카르도가 매섭게 눈썹을 찌푸리자 로웬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윈체스터의 조기 교육은 엄격하다.
진과 오셀로도 다섯 살부터 책상에 앉았으니, 샤샤 윈체스터에게도 예외는 없겠지.
어린아이에게는 꽤 잔학한 장면도 윈체스터로서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협박 같은, 아니, 협박이 분명한 주군의 말씀도…… 아가씨의 안전에 필요할지도.
아가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로 하녀 둘이 노역장에 갔다는 사실은, 이미 레카르도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그 애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영특한 만큼 위험을 마주하기 쉬울 테니.”
“……예, 예?”
듣고 있던 로웬은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가 무슨 위험한 행동을 했다고 이러시지?
레카르도는 말을 이었다.
“시시각각 정확한 판단력은 꽤 즐거워질 만큼 신선했다만.”
“아가씨 말씀하시는 거 맞으십니까?”
레카르도는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지만 짙은 녹안에 분명 흥미로워하는 감상이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로웬은 화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공을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아마 공작 전하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더 좋아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웬은 샤샤가 들고 있던 분홍 공을 떠올리며 말했다.
“페르메티스 양에게 뺏길 뻔했지만요…….”
다시 생각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이기는 했다.
“제스티아 님께는 경고장을 보내겠습니다. 다음에는 자녀 교육에 힘써 달라고요.”
경고장을 받은 제스티아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그래.”
레카르도는 입술을 달싹였다.
꽤 만족스럽다는 듯이.
* * *
레카르도의 서늘한 안광을 떠올리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나마 윈체스터 저택과 윈체스터에 대해 다소 긍정적으로 느꼈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세계관 최악의 악당 가문,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사람들인 것을 알면서도…….
‘다음에 그의 눈에 잘못 띄면 그 개에게 집어던질지도 몰라.’
내게 호의를 나타내는 것 같아 잠시 안심했었다.
“아가씨, 추우세요?”
샤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이불을 한 겹 더 덮어 주었다.
응, 마야. 오한이 돋을 지경이야.
얼른 커서 이 무서운 저택을 꼭 나가야겠어.
나는 마야가 주는 따뜻한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며 몸을 녹였다.
“잠들기 전에 동화책 읽어 드릴까요?”
“시러, 잘래.”
“알았어요. 그럼 동화책은 다음번에 읽어드릴게요.”
마야는 빈 우유병을 받아 가며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 척박하고 무서운 저택에 마야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가씨, 머리 한쪽이 풀어지셨네요?”
빈 우유병을 두고 온 마야가 내 머리를 빗기며 말했다.
아직은 숱이 워낙 적어 모르고 있었는데, 묶은 머리 한쪽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리본을 떨어뜨리셨나 봐요.”
“업써.”
“이제 혈족들께서도 모두 돌아가셨고, 내일부터는 저택이 썰렁하겠어요.”
“우응.”
“정원의 장미들도 활짝 피었을 텐데, 내일은 동쪽 정원에 다녀올까요?”
내 머리를 부드럽게 빗으며 마야가 물었다.
아냐, 마야.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 아까 본 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아까의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나는 자꾸 눈이 감겼다.
“어머, 앉아서 조시네. 귀여워라.”
마야의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 * *
진은 모두가 모였던 총회장 앞에 섰다.
손 한번 대지 않았는데도 그의 흑염은 둔중한 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달빛이 비치는 빈 공간 안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짙은 눈에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파랗게 서늘함이 내려앉아 있을 뿐.
가운데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어둠의 잔이 덩그러니 있었다.
그와 그의 동생, 그의 아버지가 작은 물건을 넣었던 잔이었다.
잔은 윈체스터의 물건을 순식간에 불태우며 고귀한 피의 존재를 증명했다.
“…….”
차가운 눈으로 그 잔을 바라보던 진은 손을 천천히 올렸다.
그의 손에는 회색 리본이 들려 있었다.
한때 어느 아이의 머리에 앙증맞게 묶여 있던 것이다.
그가 잡은 회색 리본은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가 잡은 손을 낮추어, 회색 리본의 끝이 어둠의 잔 안에 닿았을 때.
진은 리본을 잡은 손을 놓았다.
타닥― 피어오르는 수십 가지 색깔의 선연한 빛. 용의 환영이 잠시 뇌리를 감쌌다.
흑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상이다.
세상에 이런 색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
진은 한참 동안 잔을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다시 손을 내린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는 잔에서 꺼낸 회색 리본을 손에 쥔 채 고개를 숙여 그 향기를 맡았다.
그것은 조금도 타오르지 않았다.
탄식 같은 작은 한숨과 어울리지 않는 즐거운 안광이 그의 눈에 맺혀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윈체스터가 귀여울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