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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32화 (32/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32화

다름 아닌 페르메티스였다.

남색의 사냥복을 입은 페르메티스는 개울가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어깨에는 활이 달려 있었다.

“…….”

산사태가 있은 지 꽤 지났으니 기사들은 다들 나를 찾으러 다니고 있을 것이다.

진과 오셀로도 그럴 테고.

하지만 페르메티스가 날 애타게 찾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왜 제일 먼저 나타난 거지?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살아 있었구나?”

보통의 세 살 아이는 이해하기 힘든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속의 악의를 톡톡히 이해했다.

“목숨도 질기지.”

갑작스런 산사태는 역시 계획된 사고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오라버니들은 이곳으로 몰려드는 늑대들을 막느라 좀 늦을 거야. 내가 그사이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역시 뽁뽁 신발에 반응했을 진과 오셀로가 한발 늦는 이유가 있었다.

낙상한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맹수를 미리 풀어 놓는 것 역시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이다.

진과 오셀로가 늑대 무리가 내게 향하지 않도록 유인하는 사이 그들과 함께 움직이던 페르메티스가 내게 한발 앞서 도착했고 말이다.

“지금이라도 싹싹 빌면 살려 줄 수도 있고, 어때?”

하지만 그 말은…… 곧 그들이 도착할 것이라는 뜻.

나는 물러나지 않고 나보다 한참 키가 큰 페르메티스를 올려다보았다.

“하, 조그만 게 귀여운 맛도 고분고분한 맛도 없고, 널 보면 짜증이 올라와. 그냥 죽어 버리면 속이 시원할 텐데.”

진과 오셀로 앞에서는 연신 방긋거리며 미소 짓던 그녀는 나와 독대하자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제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 이게 페르메티스지.

“냐듀…… 너…….”

나는 손가락으로 페르메티스를 가리키며 똑똑히 말했다.

“시러!”

세 살의 눈높이에서 보는 일곱 살은 너무 키가 컸기에 나는 손을 한껏 들어 올려야 했다.

“따등 나! 주그려면 너나 주거!”

그래도 제법 자기표현을 할 줄 아는 세 살이랍니다.

내 삿대질에 페르메티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툭 밀기 시작했다.

“쬐끄만 게, 진짜로 내 손으로 죽여 줄까?”

진과 오셀로 앞에서는 나를 잔뜩 걱정하는 척했겠지.

‘페리는, 페리는’ 해 대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날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중이다.

늑대 밥으로 주기엔 상황이 애매해져 버렸으니.

“가만 보면 직계라고 해서 오라버니들과 같은 줄 안다니까. 어른들이 네게 관심 좀 가진다고 착각하나 본데…….”

보통의 세 살은 이런 어려운 말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페르메티스는 내가 뻔뻔히 살아 자신을 노려본다는 사실에 열이 받았는지 속엣말을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방계의 열등감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주된 감정은 질투이겠지.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이건, 어른들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으니 그것도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이마를 손으로 툭툭 밀며 말했다.

“너 따위는 윈체스터가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서 죽어도 잠깐이면 잊힐걸. 뒷배도 없는 사생아 주제에.”

뽁.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나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페르메티스의 입에 비틀린 웃음기가 걸렸을 때,

타이밍을 잡고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앙!!”

페르메티스는 입술을 비틀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울어 봤자 오라버니들은 늑대 잡느라 바…….”

“……그만.”

페르메티스의 안색이 확 굳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이다.

사실 나는 저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던 분홍 머리카락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내게 정신이 팔렸던 페르메티스는 아뿔싸 한 듯했다.

“으아앙. 페리가 여기, 아야! 아야!”

나는 페르메티스가 툭툭 치던 이마를 매우 과격하게 가리키며 울었다.

“페리가 샤샤 주긴다고 해써!”

오셀로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은 영 달갑지 못하지만, 우선 페르메티스부터 혼내 줘야지.

사실 속으로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아무리 페르메티스의 죄가 명백한 상황이라고 해도, 오셀로는 나중에 페르메티스를 좋아하게 될…….

“오…… 오라버니…….”

페르메티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멈추어 있던 오셀로는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딛기 시작했다.

“……페리는…….”

페르메티스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내 앞에서는 그렇게 의기양양하더니.

마치 큰일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오셀로에게 손을 뻗었다.

“페리는…… 샤샤가 위험한 행동을 해서 혼내…… 악!”

그리고 그 순간 오셀로에게서 뿜어져 나온 흑염의 뱀들이 페르메티스를 위협했다.

페르메티스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오셀로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나도 깜짝 놀랐다.

흑염까지 사용해 페르메티스를 공격하다니. 이것까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

오셀로는 페르메티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내 앞에 섰다.

그의 안색은 그늘이 져 있었고, 눈썹은 굳어 있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오셀로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까지 혼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오셀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을 때, 나는 움찔했다.

오셀로가 손을 뻗어서 내 눈가를 닦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오셀로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친 구석은 없네.”

툭, 튀어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소리로 들려서.

“뱀 녀석이 얼른 오라고 호들갑을 떨어 혹시나 했는데. 이유가 있었군.”

아까의 뱀을 말하는 건가.

오셀로의 흑염이 뱀 모양인 것도 그렇고, 오셀로는 뱀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잠시 후 손을 거둔 오셀로가 페르메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페르메티스는 얼어붙은 채 오셀로를 보고 있었다.

급하게 넘어지며 손이 쓸렸는지 페르메티스의 손에 피가 나고 있었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진 때문에 참고 있었는데…….”

오셀로의 말에 페르메티스는 흠칫했다.

용서를 바라는 것인지 혹은 사과를 기대하는 것인지 모를 눈빛이다.

그러나 오셀로의 입술 사이로 매정한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너 재수 없어, 페르메티스.”

그 말에 페르메티스의 눈동자는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트리샤는 최소한 귀족이었지, 넌…….”

오셀로는 더 이상의 말이 아깝다는 듯 입을 닫았다.

그녀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페르메티스는 제스티아의 딸이나, 제스티아는 노예 정부로부터 페르메티스를 얻었다.

페르메티스가 모계의 성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이제 그마저도 어렵게 되겠군. 네 모친과 너는 이 사태에 대해 책임져야 할 테니까.”

향후의 일을 경고하는 듯한 말을 한 오셀로는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얼어 있는 페르메티스를 두고 오셀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뽁, 뽁뽁, 신발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머리가 조금 복잡하기는 했다. 이러다가 오셀로와 페르메티스, 원수 되는 거 아니야?

내게 원작을 지킬 생각은 없지만 기존의 인물관계도가 틀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화나써?”

여전히 과묵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오셀로에게 물었다.

어둑해지고 있는 시야에 먼 불빛이 보였다.

저녁이 됐으면 무서웠을 법했는데.

내 키보다 큰 돌덩이 앞에서 오셀로가 내게 몸을 돌리자 나는 양팔을 벌렸다.

오셀로의 눈동자 안에 조금 꼬질꼬질한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저 바위를 혼자 낑낑대며 올라갔다가는 치마가 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마차에서 진이 나를 내려줬던 것과 같은 자세로 오셀로는 나를 훅 안아 올렸다.

뽁―

바위에 발을 딛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넌 나만 괴롭힐 수 있어,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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