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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33화 (33/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33화

나는 멍하니 오셀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뇌리에 여러 번 들렸다.

“…….”

청록색에 가까운 녹안에 노을의 붉은 기가 서려 있었다.

오셀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바위 위로 올라온 그가 태연하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오셀로의 뒷모습이 어른처럼 보였다.

“…….”

나는 오셀로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윈체스터 저택에서 태어난 후 나는 원작의 내용을 여러 번 곱씹었다.

사실 그들에 대한 선악은 판단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둠의 윈체스터’, ‘제국 최악의 악당 가문’.

분명 책에서 묘사된 이들은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악행들도 있었다.

지금도…… 이들이 악당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소설 내용에 내 판단마저 맡겨 버리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 사람들은 더 이상 책 속의 사람들이 아닌, 이렇게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인데…….

바람에 사락거리는 오셀로의 분홍 머리카락이 속을 간질였다.

“샤샤.”

오셀로의 손을 잡고 풀숲을 지나자 진의 모습이 보였다.

노을을 등지고 서 있는 진의 눈썹이 굳어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널브러진 늑대 수십 마리가 보였다.

짙은 피 냄새가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서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다친 곳은…….”

진의 입술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의 진과는 달리 여유라고는 없는,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던 진의 손끝은 내 머리에 닿지 않았다.

늑대의 피를 잔뜩 묻힌 제 손을 우려하기라도 한 듯이.

멈칫한 진은 제 손을 거두었다.

“……없어서 다행이야, 샤샤.”

웃음기라고는 없는 그의 사나운 눈빛에 나는 심장이 다시 덜컹했다.

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우리들 사이로 불어왔다.

오셀로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고, 진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다시 태어난 이후로부터 줄곧 나의 목적은 뚜렷했다.

망할 악당 가문 따위는 내가 벗어나야 할 곳.

레카르도 공작, 그리고 오셀로와 진은 내가 멀리해야 할 사람.

그저 그런 관계일 뿐인데…….

“아가씨……?”

저 멀리서 한쪽 팔을 깁스로 감싼 마야가 내게 달려와 시선을 맞추며 앉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영 괜찮지가 않다.

가슴이 욱신거리고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오셀로와 진에게 이런 마음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제 내가 진짜 샤샤 윈체스터여서겠지.

그들의 외부에 있기를 바랐으나 나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윈체스터라는 소속감은, 그리고 진과 오셀로의 행동은 나를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그들과 정말 가족이 되어 버리면…….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놀랐을 거야. 사건이 있어서.”

“네?”

“우선 마야와 함께 들어가. 진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셀로의 말에 마야는 나를 안아 들었다.

마야의 어깨가 코에 닿자 안도감이 들었다.

복잡한 생각은 한 풀 사그라졌다.

* * *

페르메티스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여름 저택으로 윈체스터 가주의 직속 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 명에 이르는, 흑갑옷을 입은 최강의 기사들.

테일러스와의 전쟁에나 내보낼 만한 최정예였다.

그들은 여름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선두에는 레카르도의 부관 로웬이 흑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집 안에는 제스티아도 없고, 제스티아가 있더라도 이런 무시무시한 기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웬은 말에서 내린 뒤 저택 앞에 서 있는 진과 오셀로, 샤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진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명을 받고 모시러 왔습니다, 공자님.”

우리 셋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서 있던 페르메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샤샤에게 한 짓이 오셀로에 의해 까발려졌다.

당황한 채 진에게 부정했지만 진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 오라버니들, 페리를…… 항상 예뻐해 주셨잖아요. 네?

흔들리는 눈동자로 매달려도 돌아오는 것은 경멸뿐.

― 페리는 다들 샤샤만 예뻐하는 게 샘이 났을 뿐이에요. 그리고 사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페르메티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지만 나는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았다.

내가 휙 돌아서 마야에게 고개를 파묻자 오빠들은 페르메티스를 두고 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 페르메티스와 사냥을 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깜깜해진 밤하늘을 보고 진이 중얼거렸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가주인 레카르도에게 보고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시무시한 기사들을 보냈다.

“…….”

그들은 두려운 얼굴로 얼어 있는 페르메티스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위력 과시를 위한 것이다.

“아가씨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웅.”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웬이 다행이라는 듯 무겁게 미소 지었다.

이내 그가 서늘한 시선으로 페르메티스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페르메티스는 옆의 로웬을 힐끗 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니 죄 짓고 살 짓은 하지 말지.

페르메티스가 내 이마를 툭툭 때리며 내 목숨에 대해 지껄이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아직도 기분이 더럽다.

우리는 올 때 타고 온 마차에 올랐다.

돌아갈 때는 레카르도의 기사들이 우리를 호위할 것이다.

“오…… 오라버니, 이대로 가시면…….”

안절부절못하던 페르메티스가 끝내 다가와 오셀로의 옷깃을 잡았다.

“이대로 가시면 페리는 어떡해요.”

페르메티스는 눈물이 고인 채 오셀로에게 말했다.

“서로 할 말은 이미 주고받은 것 같은데.”

하지만 오셀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싸늘한 목소리.

페르메티스는 아까 그의 흑염에 의해 밀쳐지던 순간이 떠오르는지 흠칫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울먹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요. 물론 샤샤에게 무례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오라버니들께 버림받을 만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샤샤도 멀쩡하잖아요!”

페르메티스를 응시하던 오셀로가 그녀에게 잠시 고개를 숙였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나는, 오셀로가 페르메티스의 귀에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페르메티스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으로 보아 좋은 내용은 아닐 것 같았다.

이내 바싹 얼어 있는 페르메티스를 두고 오셀로는 마차에 올랐다.

우리는 어두운 밤, 마차를 타고 다시 윈체스터 저택으로 출발했다.

진이 오셀로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페르메티스에게 뭐라고 한 거야?”

하지만 오셀로는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입을 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기가 듣기에는 부적절한 것일 확률이 꽤 컸으니까.

“조사 결과가 어찌 되든 간에,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린 제스티아 님과 페르메티스에 대해 가문에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윌너스에 이어 여름 저택까지 빼앗기게 된다면 얼굴이 볼만하겠군.”

오셀로의 옆에 앉은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앞에서는 로웬과 진의 대화가 들려왔다.

“만약 아가씨를 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을 꾸몄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철저하게 조사해 줘. 페르메티스는 이제 와서 부정하고 있지만…… 이건 누가 봐도 사고가 아니야.”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진이 말을 이었다.

“관련이 있다면 죽음으로 책임을 물어야겠지.”

그 애에게 제법 친절하게 굴던 모습과는 다른, 냉정한 속내를 드러내는 목소리였다.

손톱만 한 달이 어렴풋이 대지를 비추는 어두운 밤.

달그닥, 달그닥,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살의 내 몸은 고되었는지 잠에 빠져들수록 흔들리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던 나는 뭔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이내 내 오른쪽 머리가 뭔가에 닿았고 베개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너.”

오셀로의 낮은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귀에 흘러들었다.

“또 혼자만 태평하지, 샤샤.”

나는 이내 깊고 포근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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