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35화
“아가씨,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사라지셔서 놀랐잖아요.”
“쩌기. 꽃 바써! 애뿐 꽃!”
네 살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손가락으로 화단을 가리켰다.
“제 손 꼭 잡고 있으셔야 해요. 알았죠?”
마야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의 목숨이 위태롭다, 라는 생각을 하자 마야에게 미안해졌다.
“우웅.”
사실 화단을 잠시 다녀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또 특별 구역 알림이 떴고, 망설이던 나는 잠시 들어갔다 왔다.
마야의 눈에는 내가 손을 놓자마자 사라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방의, 저번에 봤던 노트에서 협박 편지를 발견했다.
또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찾아내겠다고? 협박 같은 문구를 보았을 때 방의 주인은 여유라고는 모르는 괴팍한 인간이 분명했다.
글씨체도 영 사나운 것이 성질도 더러운 것 같다.
그래, 나도 이런 재미없는 방 싫거든?
장난감 하나도 없으면서!
나는 답장으로 모음 기호 하나를 써 놓고 방을 나섰다.
이제 특별 구역 어쩌고 알림이 뜨더라도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짹! 짹!”
“그래요, 이제 다 왔어요. 윈체스터 도서관 도착.”
특별 구역 때문에 잠시 길을 돌아온 나는, 내 앞에 펼쳐진 별세계를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넓은 공간에 책장이 가득 차 있었고 수만 권은 되어 보이는 책이 정렬되어 있었다.
오늘 마야와 함께 온 곳은 저택 동편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조금 더 일찍 와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늦어졌지만…… 온 김에 실컷 읽고 가자!
“아가씨, 동화책은 저쪽에…….”
“쩌거!”
“네? 하지만 저 책은…… 제국 역사서…….”
“쩌거! 쩌거또!”
나는 신나게 손가락을 들어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가리켰다.
사실 전생에서도 나는 독서를 꽤 좋아했다.
순문학, 에세이, 장르 소설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하나도 재미없을 텐데…….”
마야는 긴가민가하는 눈빛으로 내가 가리킨 책들을 꺼냈다.
내가 의자에 앉기를 원하자 마야는 도서관 의자에 쿠션을 넣어 책상 높이를 맞추어 주었고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웅!”
꼭 내가 특별 구역에서 보았던 <테일러스의 가주>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다른 책으로 정보를 얻으면 되는 일이다.
내가 두꺼운 책의 표지를 넘기고 독서를 시작하자 마야와 하녀들이 신기하다는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삽화 보는 재미가 들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전에 썼던 아이템 덕분에 나는 글씨를 다 읽을 줄 알았고 심지어 고어나 외국어 표기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야누트 제국의 과거와 현재’
제국의 역사는 내가 전생에 읽은 그대로였다.
네 개의 가문이 통치하는 구조, 이능을 지닌 가문의 사람들과 선택받은 직계로 이어지는 강렬한 힘.
네 개의 가문이 탄생하게 된 설화라든지 말이다.
세상의 선을 수호하는 고룡 메키우스가 있었고, 거대한 악의 화신 페르세토스가 세상을 집어삼켜 멸망시키려 했다고 한다.
고룡 메키우스는 치열한 싸움 끝에 악을 봉인하고 세상을 수호했으며, 자신의 거대한 힘을 쪼개어 네 개의 용에 부여했다고 한다.
수룡 헤일로, 지룡 아카다, 백룡 테일러스, 흑룡 윈체스터. 그들이 현재의 4대 가문이고 가문은 고룡이 부여한 힘을 대를 이어 보존하는 것이 그 사명이다.
물론 각 가문이 설립된 뒤 천 년이 흘렀기 때문에 이건 오랜 전설로서 남아 있는 기록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어 했던 ‘메키우스의 열쇠’에 대한 기록은 아무리 책을 찾아보아도 없다.
그럼 엘릭서에 대해서도 찾아볼까.
“꽤 재미난 것을 읽는구나.”
한참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서는 어딘가에서 보았던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갑자기 불려 갔던 아피니제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레카르도의 조부이자 ‘대가주’로 불리는 전대 가주.
위압적인 흑염의 능력을 보유한 헥토르 윈체스터.
“안녕하떼요! 할아버지!”
나는 굴러가지 않는 발음으로 빤히 그를 보며 인사했다.
“할아버지라.”
정확히 말하자면 증조부님이지만 아기에게는 그게 그거이니까 할아버지로 부르기로 했다.
헥토르는 눈썹을 찡긋하더니 웃음을 지었다.
“썩 나쁘지는 않군.”
헥토르 윈체스터는 12년 전 차기 가주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 선언했다.
그 후 레카르도가 가주가 되었고, 그는 노후를 즐기겠다며 전국을 유랑하고 있다. 이렇게 가끔 윈체스터 저택에 출몰하기도 하고.
“그래, 책은 어떻더냐. 네가 읽기에는 어려울 것 같은데.”
“재밌써요.”
내가 판단하기에 헥토르는 위험인물이 아니었다. 가주인 레카르도와 그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가문의 일원들 간의 숙명적 구도에서 중간 지점에 서 있는 사람.
아피니제가 형편없이 약해진 것과, 레카르도가 아피니제를 쉽게 해체할 수 있었던 것은 헥토르 윈체스터가 더 이상 가문의 일에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는 것또 이써요.”
100년 전, 테일러스에서 시작된 끔찍한 저주 ‘카이사’로 제국은 위험에 처했었다.
패망에 가깝던 윈체스터가 다시 재기하게 된 것은 그 이후였다.
헥토르는 윈체스터 공작가의 재부흥을 이끈 가주였다.
그는 기록상에 나오지 않는 것들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요, 텔러스와 친했다고 나오는데, 언제부터 시러했어요?”
내 질문에 헥토르는 입을 닫은 채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고롱 메큐스가 용들한테 힘을 줬을 때는 모두 사이가 조아짜나요.”
그 표정이 조금 굳은 것 같아 나는 내가 말실수를 했나 생각했다.
수십 초가 흐른 뒤 헥토르는 입을 열었다.
“너, 정말로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냐?”
헥토르의 말에 나는, 그가 내가 책을 읽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어린아이가 깨알 같은 글씨의 역사서라니.
설령 글자를 읽을 수는 있어도 이해하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긴 하겠지.
“네.”
잠시 나를 보던 헥토르가 의자를 빼더니 내 맞은편에 앉았다.
“페리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일로 내가 편견을 가진 모양이구나. 허허.”
과거의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지 눈썹을 찌푸리던 헥토르가 말을 이었다.
“……궁금하다면 지금부터 알려 줘야겠지.”
* * *
“제스티아 님의 노예 암시장에 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암시장을 지키는 병사들이 무력화되고 300명의 노예가 풀려났다고 하더군요.”
저택의 복도, 레카르도를 뒤따르던 로웬이 간밤의 일을 보고하고 있었다.
바쉬론과 그의 딸 제스티아는 제국 최대의 노예 암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4대 가문의 협약에 의해 노예제가 금지된 지 오래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사람이나 외국 출신의 패잔병들은 암암리에 노예로 팔리고 있었다.
“주인 없는 사업장이 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제스티아의 시신은.”
빈 복도에 두 사람이 걷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진 창에는 어느덧 조금씩 물들고 있는 초가을의 정원 풍경이 화폭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쉬론 경께서 장례를 치룰 예정입니다.”
제스티아를 수배했지만 그녀는 이미 차가운 시신이 된 채 발견되었다. 누군가 앞서 처리한 모양이었다.
그 원흉은 이번 사건을 모의한 자일 확률이 크겠지.
유력한 범인은 바쉬론의 치료사이나,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바쉬론의 진술에서도 소득은 없었다.
“제스티아의 재산을 압류한 은행에게서 여름 저택을 사들이도록.”
파슈리트 산맥 부근은 채산성이 충분한 땅이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걷던 레카르도가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 그리고 페르메티스 양을 살려 주시는 대신 바쉬론 남작께 받은 ‘오르테니안’은 곧 인수 절차를…….”
말을 계속하던 로웬도 레카르도의 모습에 말을 멈추었다.
열려 있는 도서관의 문 사이로 도란도란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안을 들여다본 로웬은 숨을 들이켰다.
현존하는 윈체스터 중 가장 강한 자들을 둘 꼽으라면 가주인 레카르도 윈체스터와 대가주 헥토르 윈체스터였다.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경이롭도록 강력한 흑염.
레카르도가 왕좌에 오른 사자라면, 헥토르는 일선에서 물러나 낮잠을 자고 있는 사자였다.
세상만사를 초월한, 누구도 그의 관심을 잡아끌 수 없는 아득한 힘과 경험을 가진 자.
제 혈육에게도 약육강식의 규율을 철저하게 적용하는 가혹한 자이기도 했다.
“아하. 헤일로가 우리를 도아준 거네요. 인제 알게써요!”
그 헥토르 윈체스터는 전에 없이 꽤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