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36화 (36/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36화

천 년에 이르는 4대 가문의 역사에서 테일러스와 윈체스터가 반목하게 된 것은 300년 전부터였다.

윈체스터에 방문했던 테일러스의 공작 부인이 암습자에 의해 살해당하며 불화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그 뒤 점점 교류가 끊기며 악감정이 심해졌다고 한다.

와중에 아카다와 헤일로의 가문까지 끼어 편 가르기 냉전이 시작되었던 적도 있고…….

100년 전 그 갈등은 극에 달했고, 아카다와 헤일로에게 외면받아 멸문 직전까지 간 윈체스터는 매우 위태로웠던 시기였다.

그리고 승기를 확고히 하겠다며 테일러스가 불러온 재앙 ‘카이사’. 그것은 제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 놀랄 만한 위력과 잔혹함은 제국의 많은 백성을 희생시켰고 헤일로와 아카다는 테일러스의 행위를 규탄했다.

그중 헤일로는 윈체스터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카이사의 저주를 소탕했었다.

이 사건은 윈체스터의 부활의 단초가 됨과 동시에 테일러스의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

무수한 세력 싸움의 끝에 네 가문의 힘이 다시 비등해진 게 지금이다.

“알겠느냐.”

[특성 획득! 꼬마 탐구자!]

헥토르 할아버지가 알려 주는 백 년 전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순간 눈앞에 무언가가 떴다.

[끈질긴 노력으로 꼬마 탐구자가 된 당신, 열렬한 호기심을 칭찬합니다.]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당신의 길을 닦아 다양한 특성을 획득하세요.]

[※특성 적용은 프로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름 : 샤샤 윈체스터(LV.3)]

[직업 : 무직 ]

[특성 : 딸랑이 마스터(근력+3) 꼬마 탐구자(지능+3) ]

특성이라는 것은 중복 적용이 되는 모양이다.

지능이 올랐다는 것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할아버지! 쬐고!”

나는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헥토르를 보고 싱긋 미소 지었다.

별 반응 없이 나를 보던 헥토르는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 혼잣말을 했다.

“왜 그 녀석이 네게 예민한지 알겠군.”

그리고 그때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고개를 훅 들어 보니 청색 제복을 입은 레카르도와 로웬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란 나와는 달리 헥토르 할아버지는 이미 레카르도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듯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대화를 하고 있었다.”

헥토르의 대답에 로웬은 조금 놀란 눈빛을 했다.

“……어떠셨습니까.”

당사자인 나를 두고 레카르도는 헥토르에게 평가를 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냥 궁금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뿐인데 갑자기 시험 성적표를 기다리는 기분.

헥토르의 입술이 열렸다.

“진 녀석이 저만할 때와 별 차이가 없더군.”

로웬의 표정이 더욱 놀라움에 물들었다.

가문에서의 진에 대한 평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슬슬 교육을 받게 해라.”

예상치 못했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알기로 윈체스터가의 아이들이 ‘교육’을 시작하는 시기는 다섯 살 전후였다.

교육에는 신체 훈련과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 흑염을 다루는 방법 등이 포함된다.

직계, 방계에 따라 분산되어 있던 교육 방법을 7대 가주가 체계화했고, 진과 오셀로 역시 그러한 교육 과정에 따라 교육을 받고 있었다.

“……어립니다.”

레카르도의 말대로 나는 아직 나이 기준에 차지 않았다.

헥토르는 끌, 혀를 찼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그것이 적당한 시기이지. 이 시기에 글을 다 떼고, 역사를 이해하는데 그냥 놓아두는 것은 옳지 않지.”

괜히 최선을 다했나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교육이라는 것을 받게 되면 지금처럼 한가로운 자유 시간은 사라지겠지?

“…….”

레카르도가 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나는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레카르도가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받겠느냐?”

흠, 어쩌지. 무조건 싫다고 해야 하나.

이미 우는 것이 통할 분위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조기에 교육을 시작한 영재 같은 걸로 불리며 이목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그 포지션에는 진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냥…….”

그래서 나는 이 난감한 상황을 다른 방법으로 헤쳐 나가기로 했다.

“공부하는 것보다 할아버지가 쪼아요!”

내가 싱긋 웃으며 내 의견을 말하자 레카르도가 눈썹을 꿈틀했다.

“할아버지랑 이야기하구 놀게 해죠요.”

나는 헥토르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민망할 정도의 크고 긴 정적이 감돈 뒤, ‘허’ 하고 헥토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금 괴팍한 할아버지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해 주는 이야기들은 꽤 흥미로웠다.

잠시 후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당사자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레카르도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근래 별다른 일정도 없고, 당분간 내가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하겠다.”

그 말에 로웬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대가주 헥토르 윈체스터, 윈체스터가에서 유일하게 레카르도의 흑염과 필적할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여생을 편히 보내고 싶다며 레카르도에게 가주 자리를 주었고, 그렇게 레카르도가 12년간 가문을 이끌었다.

하지만 레카르도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가 항렬을 뛰어넘었다는 이유로 여전히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레카르도의 힘으로 그들을 누를 수도 있었지만, 이는 팔이 아프다고 잘라 버리는 것과 다름없으니 로웬은 꽤 오랫동안 골치 아픈 신경전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다음 여행은 좀 늦추어도 나쁘지 않겠군.”

이런 상황에서 대가주가 윈체스터 저택에 머물게 된다면, 레카르도에게 힘이 될 것이다.

‘설마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서 남기로 하신 건가.’

헥토르의 긍정적 영향은 가문 내뿐 아니라, 가문 외에도 미칠 것이다.

“그렇지 않더냐, 샤샤.”

“네! 할아버지!”

수십 년 동안 윈체스터를 이끌며 가문을 재부흥시킨 백발노장 헥토르 윈체스터가 윈체스터 저택에 머문다는 소문만으로도 테일러스의 전의에 영향을 끼칠 것이 뻔하다.

잠시 샤샤를 보던 레카르도는 입술을 달싹였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 * *

“…….”

노트 안에 크게 그려진 것을 발견한 에반은 눈썹을 찡그렸다.

‘ㅗ’

하늘을 날고 있는 용의 옆모습을 본뜬 기호로, 뜻은 ‘비상’, ‘날아오름’.

그리고…… ‘희망.’

‘퀠른어인가.’

에반은 종이를 찢어 구겼다.

이 고도로 복잡한 공간에 이토록 쉽게 침입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능력자일 것이다.

은발 머리카락의 주인, 제 정체를 나타내고 싶어 하는 자.

빌어먹을 회귀의 원흉인 페르세토스가 아니면 누구일까.

이토록 선명하게 제 운명에 난입하려 하는 자는.

에반의 청색 눈동자에는 새카만 분노가 깃들었다.

― 미련한 녀석, 테일러스가의 모자란 둘째 녀석조차 일곱 살에 흑염을 각성했는데. 테일러스의 후계자인 네가 여덟 살인 지금도 이 지경이니 내 낯을 들 수가 없다.

이번 회귀는 달랐다.

늘 네 살 생일에 각성하던 청명이, 아직까지 각성하지 않았다.

사냥 대회 후 벌어지는 윈체스터와의 갈등.

그것이 시발이 되어 테일러스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다른 두 가문은 서서히 테일러스의 편으로 융화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테일러스를 경계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버지인 체노아 공작은 이른 히스테리를 보였다.

언제나 말미에 가서야 히스테릭해지던 그는 어제도 하인을 둘이나 죽였다.

“…….”

테일러스는 구겨진 종이를 든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스물일곱 번에 이르는 지난 회귀에서는 없었던 과정이다.

마치 운명이 보낸 장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제 공간에 침입한 누군가.

짙은 청색 눈을 한 소년, 에반 테일러스는 제 손을 펴며 말했다.

“네가 누구이건.”

정신과 인격은 시간만큼 무한하지 않았다.

포기하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반복하던 시간들을 지나며 닳고 닳아 이름조차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저번에 쓴 메시지는 진심이었다.

흙으로 덮어 버렸던 싹이 생각 속에서 다시 비죽 올라오면, 괴롭지만 여전히 살아 있구나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잔혹한, 희망이라는 단어 말이다.

“……뭐가 되었든 대답해야 할 거야.”

손가락 사이로 청안이 번뜩였다.

“내가 살아갈 이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