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37화 (37/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37화

“카이사에 대한 여론 약화로 아카다에서조차 나서기 곤란하다는 전언이…….”

부관의 말에 체노아는 은잔을 집어던졌다.

부관의 어깨를 친 은잔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은잔 안에 있던 포도주가 피처럼 붉게 흩뿌려졌다.

“카이사! 카이사! 망할 카이사! 그 빌어먹을 사냥 대회만 아니었어도!”

체노아의 푸른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테일러스를 지지하던 두 가문이 경계심을 드러내게 된 것은 사냥 대회 이후였다.

저주받은 술법 카이사가 부활했다는 내용은 곧장 제국에 퍼졌고, 모두의 화살은 빌어먹을 윈체스터 놈들이 아닌 테일러스를 향했다.

심지어 그놈들이 보낸 첩자에 대해 공개 비난했지만 다른 가문들에서는 힘을 보태지 않았다.

완전히 소외된 것이다.

아마 다른 가문들이 경계의 시선을 거두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전처럼 사업과 정치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윈체스터의 조건을 들어주는 방법밖에 없을 듯합니다.”

윈체스터는 건방지게도 평화 협정을 맺는 대가로 볼모를 요구했다.

이에 부당하다 따졌지만, 카이사의 술법이 부활한 이상 볼모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가문들의 의견이었다.

그들은 윈체스터로 테일러스를 견제하길 원했으니까.

“……젠장할.”

체노아 테일러스에게 자식은 둘뿐이었다.

에반 테일러스, 장차 청명을 이어받게 될 후계자.

그리고 첩에게서 얻은 갓난 사내아기.

에반 테일러스는 때가 되도록 청명이 발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보잘것없는 이능을 가졌음이 확실하다.

“공자님께서는 영리하십니다. 볼모로 가 계시는 동안 윈체스터의 약점을 알아내실 수도 있겠죠.”

부관의 말에 체노아는 눈썹을 굳혔다.

그 약해빠진 녀석을 보내는 데 아쉬움은 없었으나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이다.

테일러스의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그건 에반 녀석을 믿을 수 있을 때의 일이겠지.”

“……확실히 공자님께서는 말수가 적고, 속을 내비치지 않는 분이기는 합니다.”

에반이 자신을 바라볼 때, 체노아는 가끔 서늘함을 느꼈다.

그래 보았자 테일러스가의 후계로 태어난 에반이 스스로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오묘하게 불길한 느낌이랄까.

그러니 볼모로 보내도 제 역할을 다하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공작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점을 고려해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시간도 끌어 보고요.”

체노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간이라.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 그리고…….”

체노아는 말을 이었다.

“윈체스터 공작가의 셋째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라.”

체노아는 사냥 대회의 무도회에서 봤던 영상을 떠올렸다.

“셋째라면 샤샤 윈체스터…… 그 어린아이 말씀입니까.”

“보통의 어린아이가 아니다.”

고작 돌쯤 된 아기가 카이사의 저주에 걸린 남자를 막아 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

“편지, 읽지 않을 거야?”

연무장에서 돌아가는 길, 진의 질문에 오셀로가 답했다.

“버리라고 했잖아.”

하인이 막 전해 준 페르메티스의 편지가 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린아이의 필체로 열심히 쓴, ‘오셀로 오라버니’에게 보내는 편지.

하지만 오셀로는 짜증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싫은 관계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지.”

진의 말이 옳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살아남았으니.”

적대적 관계의 바쉬론이 완전히 숙청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았다.

“언젠가 이용할 가치도 있을 테고 말이야. 우리는 바쉬론에 대한 꾸준한 정보가 필요해.”

진의 말을 무시하고 있던 오셀로는, 마지막 말에 고개를 돌려 싸늘히 말했다.

“위협이 되지 않았을 때라면 그러겠지.”

“페르메티스가 네게 위협이 된다고?”

진은 농담하지 말라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과 오셀로의 능력의 편차보다, 오셀로와 페르메티스의 능력의 편차가 열 배는 더 컸다.

레카르도에게 바쉬론이 영 거슬리지만, 위협까지는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이라도 흑염으로 그 애의 목을 쥘 수 있는 네가?”

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셀로의 뒤에서 흑염이 일렁이며 새어 나왔다.

오셀로는 형형한 눈으로 진에게 말했다.

“내게 위협이 된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 말에 진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닫혔던 입술 사이가 조금 벌어졌다.

잠시 후 오셀로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래,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나 후회는 되는군. 그게 나았을 텐데.”

“오셀로.”

“그러니 그 편지는 태워 버려. 그날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살의가 들끓으니까.”

오셀로의 눈에 짙은 살기가 담겨 있었다.

“감히 누구 동생에게 손을 대.”

한참 오셀로를 바라보던 진의 손에서 새카만 기운이 솟구쳤다.

이내 진의 손에 있던 페르메티스의 편지는 재가 되어 버렸다.

페르메티스의 편지가 재가 된 것을 본 오셀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표정하게 있던 진은 비어 있는 제 손을 응시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 단순함이 나보다 일찍 듣게 만든 걸까? 샤샤의 발소리를…….”

잠시 후 오셀로가 저택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 공 조!”

정원에 잠깐 놀러 나온 참으로 보이는 샤샤와 마야가 보였다.

샤샤에게서 벗어나 데굴데굴 굴러가던 공이 오셀로의 발치에 멈추었다.

샤샤가 오셀로에게 다시 외쳤다.

“오셀로! 공! 공 조!”

“…….”

진은 오셀로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샤샤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통해 오셀로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

뻥, 샤샤의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이…… 이……!!”

샤샤의 눈썹 끝이 휙 올라갔다.

샤샤가 두 번째 손가락을 쭉 펴며 오셀로에게 삿대질을 했다.

“나빠! 바보! 우…… 우…… 나빠!!”

샤샤는 방방 뛰며 오셀로에게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샤가 표현할 수 있는 부정적인 단어는 아직 그게 전부였다.

오셀로는 피식 입술을 비틀었다.

“얼른 뛰어가서 공 잡아야지. 짧은 다리로는 조금 힘들려나.”

놀리는 듯한 오셀로의 표정에 샤샤는 오셀로를 한 번 더 매섭게 노려보고는 그가 공을 찬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마야는 곤란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샤샤를 따라갔다.

진은 샤샤를 보다가 시선을 오셀로에게 옮겼다.

아까만 해도 죽일 듯 살기를 내뿜던 녀석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택 안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진의 입술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 * *

“오셀로…… 미…… 틴놈.”

공 좀 얌전히 주워 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헥헥대며 겨우 공을 잡았다.

“아가씨? 방금 무슨 말씀을?”

“웅?”

“하하, 제가 잘못 들었겠죠? 아니에요.”

마야는 더위를 먹은 것 같다며 손부채질을 했다.

내 품에는 무겁지 않은 공 하나가 안겨 있었다.

금색 천과 금사로 만든 공은 헥토르 윈체스터가 내게 준 선물이자 과제였다.

헥토르 윈체스터는 일주일 전부터 윈체스터 저택에 머물며 나와 종종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책으로는 알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내게 해 주었다.

오늘 그는 100년 전의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든 가문들이 ‘카이사’에 치를 떠는 이유와, 그 당시 테일러스의 가주가 카이사를 통해 실험했던 악랄하고 반인륜적인 행위들.

아기로서 듣기 괴로울 정도의 내용이었지만, 윈체스터답게 헥토르는 내게 이야기해 주는 것에 가감이 없었다.

조금 필터 정도는 거쳐도 좋으련만.

이야기를 마친 헥토르는 가져온 무언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 이건 카이사 테일러스의 딸 에시르가 가졌던 공이다. 불과 열두 살이었지만, 제 아비에 의해 생을 마감했지.

내가 읽은 <테일러스의 가주>는 에반 테일러스에 대한 서사 중심이었고, 테일러스는 절대적인 선역 가문이었다.

카이사의 저주에 대해 나오기도 하지만 고귀한 가문의 역사 속 있었던 잠시의 오점 정도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헥토르 윈체스터에게 들은 그 이야기는 세계대전 당시의 인종 학살을 떠올리게 할 만큼 잔혹했다.

이쯤 되면 빛의 테일러스에서 ‘빛’은 압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 카이사에게는 자식들이 다섯 있었지. 하지만 죽은 것은 에시르뿐이었지. 이 공에는 왜 에시르가 죽었는지 이유가 들어 있다. 샤샤 네가 그 비밀을 알아낸다면…….

나는 공을 보며 골똘히 고민했다.

― 다음에는 네가 궁금해하던 내용에 대한 단서를 주지.

나는 헥토르에게 책을 보고 궁금했던 내용이라고 엘릭서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흑탑에 있는 지식을 뒤져봐야 할 것’이라며 차근차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흑탑은 윈체스터의 오랜 지식을 보관하는 전설적인 장소로 도서관과는 달리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아마도 그곳에 나를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 테스트해 보는 느낌이다.

이 공을 받은 뒤 그런 생각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어차피 나의 최종 목표는 엘릭서, 그리고 원작에서처럼 병약한 삶이 아닌 건강한 웰빙 라이프!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게다가.

[‘오래된 지식인의 신뢰’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퀘스트 기능이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