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39화
밤이 한참 깊어서야 나는 책을 덮었다.
마야는 하품을 한번 하고 내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을 리가 없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아까 낮에 최소한의 낮잠을 자기는 했지만, 역시 오랜 시간 독서를 하기에는 아직 한참 약한 몸이다.
“이제 방에 갈래.”
“네, 잘 생각하셨어요……. 어머, 세상에. 벌써 자정이야.”
도서관 의자에서 나를 내려 준 마야는 나를 품에 안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마석들이 간접 조명 역할을 해 주고 있어서 복도가 그리 어둡지는 않았지만 창밖은 완전히 깜깜했다.
“보고 싶으시다던 내용은 찾았어요?”
“웅, 근데…….”
아까 책에서 본 내용을 생각하던 나는 입을 닫았다.
생각이 복잡해서 언어로 표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잠시 뒤 방에 도착하자 뒤따르던 하녀들이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는 헥토르에게서 받은 금공이 보였다.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금공 곁에서 눈을 감았다.
오늘은 어떤 꿈을 꾸게 될까, 불안했다.
* * *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흰 대리석으로 건축된 웅장한 방 안이었다.
시야가 넓어지고 나는 내가 유령처럼 둥둥 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양발을 진의 흑염과 같은 색의 어둠이 휘감고 있었는데 어쩐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 아버지.
물빛 드레스를 입은 열두 살 여자아이가 방에 들어서자, 검은 머리카락을 묶은 장발의 남자는 퀭한 얼굴로 제 딸을 돌아보았다.
소녀의 머리카락은 붉은빛이었고 청안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의 제복에는 테일러스가의 문장이 있었고, 나는 그가 카이사 테일러스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100년 전 끔찍한 저주를 불러온 희대의 인물.
방에 들어온 소녀의 얼굴은 두려움에 젖어 있었고, 남자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소녀의 손에는 공이 들려 있었는데 그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 역시 내 꿈을 훔쳐본 게 너였어. 건방진 계집애 같으니라고!
소녀는 내 생각대로 에시르 테일러스일 것이다.
― 악과 거래하시면 안 돼요. 페르세토스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소녀는 두려운 와중에도 카이사 테일러스에게 용감히 외쳤다.
― 아버지를 이용해 봉인을 풀려고 한다고요. 잘못하면 제국이 전부…….
― 닥쳐라! 나는…….
남자는 소녀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마치 야차와도 같은 무서운 표정으로 말이다.
― 페르세토스를 통해 악을 징벌하여 제국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나는…….
― 어둠은 악이 아니에요, 윈체스터는…… 균형의…….
하지만 소녀의 말은 계속되지 못했다.
카이사 테일러스의 몸에서 나온 잿빛의 어떤 기운이 소녀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소녀의 눈은 점점 두려움에 질려 갔다.
― 나는 제국의 영웅이자 구원자가 될 것이다. 나는 최강의 존재가 될 것이다.
들고 있던 공이 툭 떨어졌다.
남자의 몸에서 나온 재가 내 시야를 뒤덮었고 무시무시한 경고 문구가 떴다.
[해당 정보는 발현자의 정신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카이사와 에시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것은 한낱 물건에 새겨진 뚜렷한 사념일 뿐이다.
― 나는 선택받은 자이다. 고룡이…… 메키우스께서 나를 선택하셨어. 그분께서는 불경한 이들을 정화하고 세계에 빛이 가득하기를 바라신다.
카이사의 눈동자는 정상적인 눈이 아니었다.
텅 비어 있는, 무언가에 중독된 듯한 그런 눈.
“에시르!!”
나는 목청을 높여 에시르를 불렀다.
헥토르는 나에게, 카이사가 에시르를 해한 이유를 알아내라고 했다.
정답은 에시르가 퀠른의 능력으로 카이사의 온전치 않은 꿈을 훔쳐보고 그의 음모를 알아채서.
내가 보았던 환상은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더 살펴보았다.
그리고 카이사가 에시르를 이용한 실험에서, 고룡 ‘메키우스’를 불러내어 따지기를 원했다는 구절을 발견했다. 실패했지만 말이다.
카이사는 메키우스에게 무엇에 대해 따지려던 것일까.
“…….”
에시르는 내 쪽을 보았다.
나는 내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에시르의 금공에서, 에시르의 과거가 재생되고 있는 것일 뿐.
그럼에도 나는 온 힘을 다해 에시르에게 손을 뻗었다.
“에시르!”
그리고 그 순간 에시르를 뒤덮던 카이사의 재가 하얀 먼지로 산화하고 내 눈앞에 에시르의 모습이 선명히 나타났다.
에시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에시르의 붉은 머리카락과 청색 눈동자가 내가 아는 누군가와 꼭 닮아 있었다.
단 한 번 본 적 있었으나, 영원히 이별하게 된.
― 악이 선을 집어삼키는 날이 올 거야.
― 퀠른에게 오랜 사명을 주마.
― 메키우스의 열쇠가 네 용들을 다시 모으리니.
― 이는 필시 고룡의 전언이다.
여러 갈래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에시르의 기억들. 전언, 목소리.
‘메키우스의 열쇠, 책을 뒤져도 찾을 수 없던 용어가 여기서 나오다니.’
네 용을 모은다고?
무슨 의미일까.
이내 에시르가 전하는 말에 분노를 터뜨리는 카이사의 핏대 선 얼굴.
카이사는 자신이 선택받은 자이며, 테일러스가 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 언젠가 봉인이 풀릴 악에 대비하여 윈체스터 놈들과 손을 잡고 준비해야 한다고? 닥쳐라. 나는 그놈들을 멸절시키고 그 힘을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에시르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었다.
유리관에 누워 있는 에시르와 점차 차오르는 용액.
나는 그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에시르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에시르의 입술이 달싹였다.
“샤…… 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며 문구가 떠올랐다.
[아티팩트에 감도는 흑염의 기운이 위력적인 기억을 중화합니다.]
[금공의 모든 사념을 읽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눈을 뜨자 내 방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들었느냐.”
순수한 감탄이 섞인 목소리의 주인은 헥토르 윈체스터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헥토르를 보았다.
헥토르의 뒤쪽, 마야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깨워도 아가씨가 일어나지 않으셔서…… 걱정했어요.”
* * *
“악이 사라난다고 해떠요! 사이조케 지내야 한다고…….”
도서관 안,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헥토르 윈체스터에게 말을 전했다.
100년 전 카이사 테일러스가 제 딸 에시르를 죽인 이유는 제 야망에 에시르가 방해되었기 때문이다.
뭔지는 몰라도 에시르는 퀠른의 피가 흘러서인지, 계시를 받았던 것 같다.
성스러운 목소리로, 네 가문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었지.
그러나 카이사는 오직 자신만이 고룡 메키우스에게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다.
“카이사는 자기가 최고가 되려고 해써요. 그래서 에시르를 죽여따고요!”
[퀘스트 완료 : 헥토르 윈체스터의 과제를 완수하였습니다.]
[업적 : 지능(+3)이 증가합니다.]
에시르는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그런 제 딸을 그렇게 만들 정도로 카이사는 미쳐 있었던 것일까.
“그니까 따른 가문에도 알려서…….”
“이미 알고 있다.”
헥토르 윈체스터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네에?”
“에시르의 진실이 밝혀져서 세 가문이 힘을 합쳤고, 카이사를 막아 냈었지.”
내가 방금 금공에서 보았던 진실이, 이미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라고?
그런데 왜 아직도 가문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화합하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한 모양인가 보구나. 그런 섬찟한 예언을 받고도 왜 윈체스터와 테일러스는 반목하고 있는지.”
“오래돼서요?”
나는 나름의 추론을 꺼냈다.
이미 그 일이 있고 나서 100년이니, 경계심이 옅어지기는 했을 것이다.
내 말에 헥토르는 피식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탓도 없지는 않지. 하지만 진짜 이유는 두 가지인데…….”
“…….”
나는 헥토르의 말에 집중했다.
“첫째는 자존심.”
그 순간 가슴속에 무거운 추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메키우스가 봉인한 악, 페르세토스가 부활해서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고작 자존심 때문에 서로 반목하고 있다고?
“오랫동안 이어진 감정의 골은 이제 되돌리기에는 너무 깊지. 멀찍이 서서 서로를 괄시하는 수밖에 없지. 자존심은 곧 긍지이자, 가문의 정체성이니.”
헥토르가 말을 이었다.
“어느 쪽이 숙이고 들어가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는데, 쉬이 결론이 나겠느냐.”
듣던 나는 눈썹을 굳히고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세상이 망하면 가문도 소용없써요!”
내 비장한 목소리에 헥토르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가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샤샤.”
한참을 웃던 헥토르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감 때문이란다. 공동의 적이 생기자 가문들은 힘을 모아 적을 막아 냈다. 악의 힘을 빌린 카이사를 단죄했지.”
그 말에 나는 멍하니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다시 적이 나타나면 모두는 또 힘과 지혜를 모을 것이다. 아무리 강한 적일지라도.”
<테일러스의 가주>에서 읽은 세상은 확실히 평면적이었다.
선과 악이 뚜렷했고 사람의 유형도 그러했다.
하지만 내가 보는 세상은…… 달랐다. 살아 숨 쉬고 이렇게 박동하고, 찬란하게 빛난다.
비록 여기가 악당 가문이고, 내가 악당의 딸일지라도. 우리는 저마다의 서사가 있다.
책상 위에 놓인 금공이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거렸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헥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이 정도까지 이끌어 내다니. 네 탁월한 정신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샤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