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0화
“대가주께서 샤샤 윈체스터에게 열쇠를 주셨다더구나.”
바쉬론의 말에 페르메티스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그 열쇠가, 흑탑의 열쇠는 아니죠?”
“맞다.”
“말도 안 돼요!”
페르메티스는 완전히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빽 소리를 질렀다.
흑탑은 가문이 설립된 이래로 쌓아 온 오래된 지식과 기술, 각종 유물들을 보관하는 방대한 마공간이었다.
흑탑의 열쇠는 흑탑 외에도 흑염의 힘이 서린 저장 공간들을 자유자재로 열 수 있었다.
가주는 흑탑의 열쇠를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자에게 맡기는데, 보통은 가주의 아내가 관리자가 되었다.
레카르도는 아내가 죽은 뒤 주인을 잃은 열쇠를 헥토르에게 맡겼었다.
헥토르가 흑탑의 열쇠를 물려줄 자를 찾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고, 아마 새 주인을 찾는 건 진의 혼인 후가 되지 않을까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쥐콩만 한 샤샤 윈체스터라니.
― 나도 너 시러!
적대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꼬맹이가 떠오르자 페르메티스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대가주님까지 레카르도의 뜻대로 움직이신다면…….”
바쉬론의 눈에 차가운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이 빠진 호랑이와 다를 바 없어지겠지.”
바쉬론의 말에 페르메티스는 주먹을 꼭 쥐었다.
바쉬론을 치료했던 자는 계획이 실패하자 제스티아를 살해하고 도피했다.
자신을 ‘예언자’라고 칭하는 자였지.
“할아버지, 저…….”
페르메티스는 건방진 아기를 떠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 애에게 질 수 없어요.”
윈체스터 직계에게 8촌 이상의 방계 인척과의 결혼은 권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순혈의 흑염을 보존하는 효과가 있으면서도 근친혼에서 오는 유전병은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과 오셀로를 낳은 친모도 레카르도와 10촌의 먼 인척 사이였다.
그리고 페르메티스의 모친인 제스티아는, 대가주 헥토르의 형 메체스의 손녀이다.
당숙이던 바쉬론의 수양딸로 후원을 받으며 자랐지만, 가계도로 따진다면 그녀의 딸 페르메티스는 진과 오셀로와는 8촌 사이인 것이다.
“그건 제 거라고요. 그 애 것이 아니라…….”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바쉬론이 페르메티스에게 하던 말이 있었다.
― 너는 장차 윈체스터의 안주인이 될 것이다.
바쉬론만이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대가주 헥토르 윈체스터도, 페르메티스의 기량을 살피고는 했으니 말이다.
페르메티스가 생각하기에도 윈체스터의 인척들 중 자신만 한 여자아이는 없었다.
그런데 그 눈엣가시 같은 어린 계집애가 열쇠를 받았다고?
페르메티스는 조금도 납득할 수 없었다.
“페르메티스.”
바쉬론의 입술이 경고하듯 달싹였다.
“경거망동하여 일을 망치지 말고 기다려라.”
* * *
나는 방패에 검 두 개를 올린 모양의 펜던트를 손으로 올려 골똘히 관찰하였다.
이 펜던트는 정교하게 제작된 열쇠라고 했다.
어쩌면 엘릭서에 근접한 정보도 이 열쇠를 통해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열쇠를 사용할 수 없었다.
신기하게 생긴 틈에 펜던트를 넣었지만 그것은 돌아가지 않았다.
흑탑 입구에서 낑낑대고 있자 지나가던 오셀로가 한마디 했지.
― 지금 네 수준으로는 못 들어가.
― 머?
― 흑탑은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는 이만 들여보내거든.
그럼 쓰지도 못할 열쇠를 왜 준 거야. 시험의 시험의 시험의 시험이라는 건가.
내가 볼을 부풀리고 있을 때 내 손에서 열쇠를 가져간 오셀로가 그것을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자 철컥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새카만 내부가 드러났다.
반색하며 들어가려는데…… 역시나, 보이지 않는 투명 문에 쾅 부딪쳤다.
엉덩방아를 찧은 나를 보며 오셀로는 피식 웃었다.
― 흑탑이 초대한 사람은 나인데, 왜 네가 들어가.
망할 자식, 다 알면서도…….
― 들어가서 가지고 나와! 머든지!
― 흑탑의 물건은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없다는 것도 모르다니. 생각보다도 바보구나.
그리고 오셀로는 얄밉게 문을 닫고는 내게 열쇠를 돌려주었다.
‘넌 한참 멀었어’라는 표정이 그의 눈빛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눈물이 핑 돈 채 오셀로를 노려보자, 나를 향해 살짝 허리를 낮추고 얼굴을 들여다보던 오셀로가 입술을 달싹였었다.
― 억울하면 얼른 커, 꼬맹아.
오셀로의 입술 끝에 맺힌 미소가 얄미웠다.
― 열쇠, 잃어버리지 말고.
역시 놀리는 거겠지. 아무튼 오셀로는 휙 돌아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침대에 누워 못 쓰는 열쇠나 바라보고 있는 처지이다.
확실히 오셀로는 매우 강하기는 하다.
후계로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진처럼 저세상 능력은 아니지만, 오셀로의 흑염은 어지간한 방계의 성인 남자들도 제압할 정도라고 한다.
나도 그 정도는 되어야 문을 열 수 있는 건가.
오셀로 치사한 놈 같으니라고! 좀 가서 도와주면 덧나나…….
탑 안의 막대한 정보를 가진다면 지름길이 될 거라 여겼는데…… 역시 지름길은 없는지도.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열쇠를 잡은 손을 내렸다.
우선 가지고 있기는 해야겠다. 의외로 빨리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우우…….”
“우유 드릴까요?”
“아니. 기지개 편 거야.”
두 손을 하늘로 쭉 뻗으며 말했다.
얼른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대가주님의 의중은 뭘까요. 그 열쇠…….”
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를 인정하신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모두의 관심이 아가씨에게 쏠릴 텐데.”
아피니제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마야가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흑탑의 열쇠는 꽤 상징적인 물건인 것 같았다.
방계 혈족뿐 아니라 다른 가문에조차 내가 부각될 수도 있겠지.
“아마 다들 진 공자님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거예요.”
“열쐬 가질 사람?”
“직계 후계자가 결혼할 때, 결혼 예물과도 같은 의미이거든요.”
며느리에게 이 집 곳간을 맡긴다. 뭐, 그런 건가.
흑탑의 열쇠로 흑염의 힘이 서린 다른 공간들도 열 수 있다 하니 그 의미가 맞는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하던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미래가 정해진 후계자와, 후계자의 것을 자꾸 빼앗는 배다른 여동생.
나는 이미 로빈을 빼앗은 전적이 있다.
만약 진이 열쇠를 자기 것, 그러니까 미래의 자기 와이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게 빼앗겼다고 느낀다면…….
‘설마, 그랬다면 금공 때도 안 도와줬겠지. 아니, 그때는 열쇠까지 뺏길 줄은 몰랐으니 도와준 게 아닐까.’
― ……경고 하나 하지. 윈체스터의 그 누구도 믿지 마.
진의 서늘한 목소리가 뇌리에서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하녀와 이야기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바짝 얼어 있는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레카르도의 부관 로웬이었다.
* * *
나는 이제 흘리지 않고 포크질을 할 수 있었다.
스스로 스푼으로 수프도 떠먹을 수 있었고.
그래도 가끔 손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살벌한 식사 자리에서는 정말이지…….
“샤샤에게 흑탑의 열쇠를 주셨더군요.”
레카르도는 영 못마땅한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고, 대가주 헥토르 윈체스터, 레카르도 윈체스터, 진 윈체스터, 오셀로 윈체스터까지……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네 윈체스터들이 한 식탁에 있었다.
“왜, 주고 싶은 아이가 따로 있었더냐.”
헥토르 윈체스터의 말에 레카르도는 그건 아니라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내 레어 굽기의 스테이크를 자르며 그가 말했다.
“적어도 자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니 이르다고 생각할 뿐.”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로빈 외에도 경비 병력이 충원된 느낌이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딸을 꽤 과보호하는구나.”
그나저나 자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나이라니…… 살 떨린다. 보통 자녀가 많이 자랐다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하진 않잖아.
대충 내가 어떤 가문의 일원인지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어제 내가 진과 오셀로를 사자 굴에 데려갔을 때는 별말 않더니.”
사자 굴이라는 말에 나는 마야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윈체스터 영지에서도 가장 깊은 늪지대에는 꽤 지독한 몬스터들이 서식한다.
살상력도 강하고 정신 계열 마력을 쓸 수 있는 몬스터들이 있어서, 기사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던…….
“저희와 저 약해빠진 녀석은 다르죠.”
오셀로가 한마디 거들자 헥토르는 껄껄 웃었다.
“그래, 가족은 한편이지.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그림이구나.”
그리고 내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열쇠를 사용하게 될 때는 어떨지 아주 기대가 된다.”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잠시 뒤 조용히 밥을 먹던 진이 식기를 놓았다.
그리고 헥토르와 레카르도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헥토르는 고개를 끄덕였고 진은 표정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윈체스터가 모두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내가 식사 자리에서 단연 가장 신경 쓰고 있던 인물은 진이었다.
마야의 말대로라면 내가 가지는 것이 어색한 열쇠이고, 정말 진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받아들인다면…….
‘데드 플래그.’
제법 친해졌다고 해도 윈체스터는 윈체스터이다.
잠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저도 가 보게씁니다.”
레카르도가 눈썹을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수락의 표정으로 보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식사 자리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