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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41화 (41/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1화

나는 짧은 다리로 진을 찾아 두다다 뛰었다.

코너를 돌자 다행히 진의 모습이 보였다.

진의 다리를 잡자, 멈칫한 진이 나를 돌아보았다.

살랑이는 하늘색 머리칼과 유독 차가워 보이는 암녹색 눈동자.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덜컹했다.

진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기 전 나는 외쳤다.

“열쐬는 돌려줄께요!”

내 목소리에 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가 영 화난 표정인 것 같아 나는 진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거라는 거 아라요. 샤샤는 나중에 피료할 때 쓸께요.”

옷 안의 열쇠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지니 오라버니가 가꼬 있어도 돼요.”

어차피 지금은 열쇠가 있어도 나는 쓰지 못한다.

진과 불편한 기류가 생기느니 진이 가지고 있고, 나중에 내가 잠깐 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진을 바라보았고 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그 열쇠를 원하는 것처럼 보여서 따라온 거야?”

잠시 망설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이좋케 지내고 싶어요.”

한참의 무거운 정적 후 진이 피식, 소리를 냈다.

그의 입꼬리 끝이 미미하게 비틀려 있었다.

잠시 후 진이 입을 열었다.

“거절할게.”

그의 말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미 눈 밖에 난 건가. 갑자기 목이 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의외의 것이다.

“관심 밖의 것이거든.”

진의 눈을 빤히 보아도 그 속의 감정은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 그가 내게 살짝 허리를 숙였다.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이군.”

짙은 눈동자가 내 눈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후계자가 가지게 되는 흑염은.”

진의 몸 밖으로 흑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둠의 잔에 물건을 넣었을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 흑염은 엄청난 위압감이 들었다.

“……지배욕을 자극해.”

나는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네 작고 귀여운 열쇠 때문이 아니야.”

흑염의 기운이 부드럽게 내 볼을 어루만졌다.

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강한 윈체스터가 둘이나 있으니, 갈무리되지 못한 흑염이 자꾸 들썩이거든. 신이 난 거지.”

그의 말에 등골이 더욱 서늘해졌다.

진은 아직 소년이었다.

그의 흑염은 파괴적이었으나 아직 완벽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갈무리되지 못한 흑염이 이 정도라면…… 진이 레카르도만큼 자랐을 때는 얼마나 강한 흑염을 다루게 되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내가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이 영 불편한 게, 헥토르가 내게 열쇠를 줘서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 저번에는 고마워써요. 금공도 도와주고. 혹씨나 해서…….”

그러나 한숨 돌릴 여유는 없었다.

광포한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가 불편하지 안타니 되써요. 그럼 샤샤는 이만…….”

아무튼 오해를 풀었으니 발을 떼려는 순간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했었지.”

싸늘한 한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겁먹은 내게 진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닿자 재가 되던 꽃이 떠올라, 몸이 움찔했다.

무…… 무서워…….

하지만 진은 내 손을 잡았다.

“사실 나도 그래, 샤샤.”

* * *

사람 한둘쯤 죽여서 던져도 모를 만큼 검은 연못이었다.

낮에는 맑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밤에는 그렇게 검다.

연못의 표면에는 반짝이는 은하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 나는 옷깃을 여몄다.

아무래도 사이좋게 보내기에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처음에는 즐거운 컬렉션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옆에서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시선은 연못을 담고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장식장에 쌓아 놓는 것을 꽤 좋아하거든.”

나직하고, 감정이 없는 목소리에 오한이 조금 올라왔다.

<테일러스의 가주>에 묘사된 진은 소시오패스 부류의 남자였다.

막강한 힘과 천재적인 두뇌, 그는 발아래 있는 모든 것을 가치 없게 보았다.

샤샤 윈체스터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네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되었어. 태엽을 돌린 것도 아닌데.”

진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게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으니까.

“……넌 뭘 찾고 있는 거지?”

그의 질문이 가슴속에 박혔다.

내가 더 아기였을 때, 진은 내가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내가 뭔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간파할 줄은 몰랐다.

“샤샤는…….”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 솔직히 대답하는 게 좋아.”

사이좋게, 라는 말이 이렇게 섬뜩한 것이었던가.

진의 흑염이 대기에 일렁였다.

까딱 말을 잘못하면 저 물속에 처박힐지도 모른다.

나는 괜히 따라왔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뭐, 어차피 선택권도 없었지만 말이다.

진은 성의 없는 대답을 납득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실을 조금 섞기로 했다.

“……아파요.”

그 말에 진의 눈썹이 꿈틀하는 게 보였다.

“샤샤는…… 아플 거에오.”

나는 꽤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중에 아플 거라는 걸 알아요. 샤샤는 아프고 싶지 아나요.”

진의 흑염이 살랑이며 내 몸을 스쳐 갔다.

“……죽고 싶지 아나요…… 그래서 낫는 법을 찾고 이써요.”

그가 진실을 판단하는 과정인 것일까. 흑염은 나를 꽤 샅샅이 훑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싸늘했던 아까의 표정과는 달리 진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썩 아끼는 물건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은 것처럼.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모친에게 꿈의 능력을 물려받은 건가.”

트리샤에게는 꿈으로 미래를 보는 능력도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이 내가 전생에 읽은 책 속 세계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진실을 간파할 줄 안다면, 내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파악할 테다.

깊은 정적과 함께 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군. 어쩌면 암살자를 막았던 것도 흑염이 아니라 퀠른의 능력…….”

차갑고 시리고 무거운 시선, 그것은 한참 동안 내게 향해 있었다.

잠시 후 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빨빨거리며 지냈던 건가?”

도서관도 열심히 들락거리고, 헥토르의 문제도 풀고. 내가 생각해도 요즘 꽤 열정적이기는 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잠시 후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 또 누가 알지?”

나는 고개를 젓고 진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말고는 몰라요. 비밀로 해 줬으면 조켔…….”

윈체스터의 규율은 약육강식, 약한 자는 도태된다.

역사를 보았을 때 직계에도 예외는 없었다.

가문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면, 그 여파가 더 클 것이다.

나는 진이 부디 내 절박함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는 약해빠진 나를 경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잖아도 거슬리던 나를…….

생각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그랬구나, 샤샤.”

걱정에 빠진 나를 진의 저음이 일깨웠다.

그는 다시 연못을 보고 있었다.

진의 입술이 나직이 달싹였다.

눈동자에는 연못에 뜬 밤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내 것을 빼앗겨 본 적 없으니까.”

으슬으슬한 한기가 몸을 타고 손끝까지 퍼지는 기분이었다.

진이 내게 적의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가 되면서도,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혼잣말을 하듯 그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두 번째 비밀도 꽤 아찔하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내는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섞였다.

* * *

윈체스터가에서의 시간은 느린 듯 알차게 지나갔다.

봄이 되면 떠나겠다던 헥토르 할아버지는 몇 년이나 더 저택에 머물러 주시며 나의 학습을 맡았고, 나는 종종 뜨는 퀘스트를 수행하기도 하고 나이가 늘어감에 따라 착실히 레벨을 올리기도 하며 나날을 보냈다.

진은 속을 알 수 없는 조금 위험한 오빠의 포지션으로, 그리고 오셀로와는 원수처럼 티격태격하며 지냈다.

처음 상상했던 살벌한 악당가에서의 생활과는 달랐기에 나는 잘 적응하며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

그렇게 일곱 살을 앞둔 어느 날.

로빈은 경악한 내 얼굴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만나 본 적 있으십니까?”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만나 본 적은…… 모르겠다.

인물 열람의 특수기호가 에반 테일러스와 마주쳤을 때 생긴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얼굴이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런 게 어딨어! 너무 갑작스럽다고.”

“가주님의 결정이라…… 역시 불편하시죠?”

나는 꽤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어찌저찌 살벌한 아빠와 오빠들 사이에서 잘 지내보고 있는데, 내 인생에 또 대형 폭탄이 굴러들어올 모양이었다.

원작에는 없는 형태로 말이다.

“그래도 몇 년만 참으십시오. 뭐, 참을 것도 없죠. 테일러스의 후계자라 해도 볼모로 오는 건데 제놈이 뭘 어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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