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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42화 (42/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2화

* * *

헥토르가 말했다.

“지금의 정국도 100년 전 있었던 일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지.”

나를 습격했던 카이사의 저주는 그 파장이 어마어마했다.

중립 역할을 하던 아카다와 헤일로가, 그 일 이후에는 모두 우리의 편에 섰을 정도이니.

반면 고립되다시피 한 테일러스는 결국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00년 전의 전범 가문이니 어쩔 수 없다.

문제는 레카르도가 테일러스에 요구한 조건이, ‘볼모 요구’인 것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볼모’라는 표현은 쓰지 않고 ‘양 가문 간 평화를 위한 상호 교류’라 일컬었지만 모두가 그 뜻이 볼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체노아 테일러스는 지난 5년간 갖은 핑계로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영 집중을 하지 못하는구나.”

내게 고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던 헥토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죄송해요.”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지구 반대편에서 폭풍을 일으킨다는 이론과 이 사태는 다를 바 없었다.

원작에는 없었던 일이다.

나를 습격했던 카이사의 저주 때문에, 에반 테일러스가 악당 가문인 윈체스터에 오게 되다니.

만약 원작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고구마 구간이라며 독자들이 항의를 했겠지.

“뭐, 이런 날도 있는 거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헥토르의 이야기 종료 선언에 나는 책을 닫았다.

“그 녀석이 궁금한 모양이로구나.”

그리고 이어진 헥토르의 말에 나는 움찔했다.

헥토르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원래부터 에반 테일러스에게 관심이 많았지.”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알아챈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무리 원작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하더라도, 에반은 원작 속의 주인공이다.

그의 거취, 성격, 능력……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입을 꾹 닫자 헥토르가 말을 덧붙였다.

“보기 좋은 꽃에는 가시나 독이 있기 마련이다. 빛의 저편에는 어둠보다 짙은 그림자가 있고. 명심하거라.”

그는 나의 호기심에 대해 경계하는 듯했다.

“네, 할아버지.”

나를 보던 헥토르가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었다.

“에반 테일러스가 올 때쯤엔 오셀로 녀석이 떠난 뒤라 다행이군. 그 녀석이 있다면 꽤 시끄러울 일이 많을 텐데.”

헥토르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셀로가 어딘가 가나요?”

“볼모 제안은 맞교환이다. 명분상으로는 서로의 아들을 맡아 키우며 가문 간의 우호를 유지하는 것이지.”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맞교환이요?”

“그들이 우리에게 줄 아들은 후계자인 에반 테일러스고, 우리 쪽에서 보낼 아이는 오셀로이지.”

만약 일방적으로만 우리가 볼모를 요구했더라면 헤일로와 아카다가 쉽게 우리 편을 들었을 리가 없다.

그들은 힘의 균형이 깨지는 것 또한 경계하고 있으니 말이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방식으로, 레카르도는 에반을 요구한 것이다.

각자 아들을 교환해야 한다면 테일러스는 하나뿐인 후계자 에반이겠고, 우리는 후계자인 진이 아닌 오셀로가 나가야겠지.

잠시 생각하던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일어났다.

“왜 그러느냐.”

헥토르가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물었다.

“안 돼요.”

“뭐?”

“안 된다고요. 오셀로는…….”

아무리 정략적인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을 사고파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의자에서 내려가 발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헥토르에게 말했다.

“아버지께 취소해 달라고 부탁드릴 거예요. 할아버지도 도와주시면 안 돼요?”

내가 간절히 바라보자 헥토르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셀로 그 녀석이 가겠다고 먼저 자원했다.”

나는 그 말에 멈칫했다.

오셀로가…… 테일러스 공작가에 가겠다고 했다고?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잖아.

불과 어제도 오셀로는 태연하게 나를 괴롭혔었다.

“녀석도 생각이 있겠지.”

“할아버지, 저…… 가 볼게요.”

나를 응시하던 헥토르는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를 생각하는 동생의 우애가 제법 가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도서관을 나서 오셀로의 방으로 향했다.

이제 저택의 길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아가씨, 공자님께 서운해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마야도 알고 있었던 거야?”

“아가씨…….”

마야가 내 뒤를 따라 말렸지만 나는 오셀로에게 따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방문 앞에 다다르자 문득 멈칫했다.

따져……? 내가 무엇을……?

“…….”

오셀로는 나의 이복 오빠, 한때는 내가 피하고 싶어 하던 악당.

꾹 쥐었던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만족스러웠지만 미래를 생각했을 때 위험을 피해 가고 싶은 것은 여전했다.

나는 윈체스터인가, 혹은 윈체스터로 살 것인가?.

아직까지도 대답을 정하지 않았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끼익―

그리고 때맞추어 문이 열렸다.

문 안에 정복을 차려입은 오셀로가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덧 마야보다도 큰 키와 미형으로 자란 소년의 모습.

오셀로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내 그는 내게 손을 뻗었고, 내 볼에 꽤 차가운 손길이 닿았다.

“……너…….”

오셀로의 입술이 달싹였다.

못마땅한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울어.”

나는 흠칫했다.

오셀로가 눈물을 닦는 느낌에, 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셀로는 물기 고인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황급히 그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냥…… 그냥, 운 거야.”

언젠가 오셀로가 페르메티스를 밀어내고 나를 구해 주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를 위해 하녀들에게 분노를 드러냈던 그 순간도.

그리고 나를 바위 위로 들어 올리며 하던 말.

― 넌 나만 괴롭힐 수 있어, 꼬맹아.

예정된 그의 결말이, 가문의 결말이 어떠하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정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오셀로와는 지겹게도 많이 부딪쳤으니까.

“내가 테일러스에 간다고 해서 슬퍼하기라도 하는 거야?”

“…….”

대답지 않았다.

슬픈 감정인가, 스스로도 확신이 들지 않았으니까.

“……울린 사람은 꽤 많은데.”

내가 꾹 입을 닫고 있자 입술을 비틀며 내게 말했다.

“날 위해 울어 준 사람은 네가 두 번째네, 꼬맹아.”

오늘의 오셀로는 그다지 심술궂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진짜 갈 거야?”

“응.”

“위험하잖아. 그냥 안 가면 안 돼?”

“여기에서보다 얻을 게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에반 테일러스라는 속이 새카만 그 녀석도 우리 가문의 약점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켤 텐데.”

오셀로는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며 말했다.

“나도 그쪽으로는 소질이 있어서 말이야. 이참에…… 아버지께 인정도 받아야겠지.”

“하지만…….”

“샤샤.”

오셀로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오셀로의 눈동자 속, 흔들리는 내 눈망울이 보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열심히 크고 있어.”

“…….”

그가 제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말했다.

“네가 얼마나 컸을지, 돌아와서 확인해 볼 거야.”

오셀로의 뒤편 창밖에 새빨간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셀로의 분홍색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붉어 보였다.

암녹색의 눈동자조차 새까맣고 붉게 보였다.

손을 내린 그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유독 쓸쓸하게 보였다.

“여전히 작으면 혼날 줄 알아.”

심술궂지 않은 오셀로의 모습이 낯설다. 어색할 정도로.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오셀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번에 테일러스의 볼모가 오는데, 그 김에 하인들과 하녀들이 근무지를 바꿀 수도 있다는 거 들었어?”

“나는 본관 2층!”

“나도! 아가씨 방과 가까운 곳으로!”

어린 하녀들이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서, 우리 같은 낮은 연차들은 턱도 없지. 전에는 다들 공작 전하와 공자님들의 눈에 들기 좋은 방을 원했다던데…… 요즘은 아가씨와 가까운 근무지가 경쟁률이 가장 세잖아.”

주근깨 많은 하녀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만도 하지. 영애들 중 아가씨 같은 분이 어디 있어. 저번에는 경비대장님께 근무표 배열표를 만들어 주셨대.”

“뭐? 그게 뭐야.”

“경비대장님이 매월 경비병들 근무 일정 짜느라고 골치 아파서 하루를 다 날리시잖아. 자택 경비병만 수백 명이 넘는데 밤과 낮을 나누어 짜야 하니까.”

“그렇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일전에는 근무 일정이 꼬여 5일 내내 밤낮없이 근무한 경비병 하나가 낮에 졸도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숫자로 만들어서, 겹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쉽게 짜는 거야. 돌판으로 되어 있는데, 아무튼 아가씨가 배우는 ‘수학’이라는 것이 관련되어 있대.”

하녀의 말에 다른 하녀들이 감탄했다.

“세상에, 그런 고급 학문을 우리 같은 아랫사람을 위해 쓰시다니.”

고용인까지 삭막해질 수밖에 없는 윈체스터 공작가에서, 샤샤는 자라면 자랄수록 두각을 드러냈다.

아직은 조용히 끙끙대는 하인들을 돕거나 유용한 것을 알려 주는 정도였지만 샤샤의 미담은 이미 모든 고용인들에게 퍼져 있었다.

“……또 그 녀석 이야기인가.”

하녀들의 말을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는 레카르도였다.

저택의 분위기는 샤샤가 태어나기 전과 비교하면 사소하지만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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