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4화
“에반 테일러스가 도착해서 방을 안내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서쪽 탑의 가운데 방으로 배정했습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레카르도에게 로웬이 보고했다.
레카르도의 볼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집채만 한 곰을 끌고 오고 있었다.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니 로웬은 태연했다.
“손님이 왔으니…….”
레카르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짙은 녹색 눈에는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뭉쳐 있었다.
“……융숭히 대접해야겠지.”
“공자님께도 채비하라 전하겠습니다.”
레카르도는 제가 방금 떠나온 설산을 바라보았다.
윈체스터의 겨울은 가혹했다.
강한 짐승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그곳에서, 그는 산 중의 왕을 단칼에 사냥했다.
흑염이 거들지 않아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
그리고 레카르도는 문득, 저를 보고 있는 미미한 눈빛을 느꼈다.
미력한 숲의 짐승이 보내는 듯한 그 시선의 주인은 제 허리 높이 정도의 어린아이였다.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은발의 아이는, 얼마 전 보았을 때보다 조금 자란 듯했다.
윈체스터의 땅을 밟고 있으면서, 그 녹안은 염치없게도 맑고 순진무구했다.
“안…… 녕하세요.”
샤샤의 목소리에 눈썹을 꿈틀 움직인 레카르도는 귀찮다는 듯 볼에 묻은 피를 닦았다.
병사들은 다 한결같은 시선으로 공작저의 작은 공녀님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터무니없이 귀엽게 생겼을까!’
괴물처럼 곰을 단칼에 베어 넘기는 윈체스터 공작의 딸이라고 하기에는, 혼자만 등 뒤로 밝은 빛을 내뿜고 다니는 존재감이 어색했다.
샤샤는 찬바람에 조금 볼이 붉어진 채 레카르도에게 다가갔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러고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귀엽게 인사를 했다.
차가운 바람이 샤샤 주변에서만 훈풍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왔지?”
‘이 날씨에’가 생략된 지문일 것이다.
샤샤는 진과 오셀로와는 달리 일 년에 서너 번은 감기를 앓는 체질이다.
레카르도가 서늘한 시선을 마야에게 보내자 샤샤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제가 나가자고 했어요. 마야는 잘못 없어요.”
“…….”
“부탁이 있어서…….”
샤샤는 조금 우물거리다 레카르도에게 말했다.
레카르도는 모를 것이다.
제게 말을 걸기까지 샤샤가 속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얼마나 치열하게 해야 했는지.
레카르도가 눈썹을 찌푸리자 로웬은 근처의 병사들을 물렸다.
레카르도와 샤샤 사이에, 찬 바람이 휭 불었다.
잠시 후 샤샤가 입을 열자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레카르도를 보는 샤샤의 눈동자는 꽤 간절했다.
* * *
“서쪽 탑은 에반이 지내기에 적절하지 않아요”
에반의 거처에 대해 항의하는 나를 레카르도는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나도 안다. 주제넘게 참견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야 했다.
“북쪽 기지와 가까워서 분명 알아채고 말 거예요.”
어른들이 듣기에는 그냥 꼬맹이가 아무 말이나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저택 내에서 영재로 각광받고 있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해도 도서관에 틀어박히는 나날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나 스스로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레카르도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며 자라오기도 했고.
레카르도가 눈썹을 찌푸린 채 아무 반응이 없자 나는 제발 알아 달라는 듯 외쳤다.
“가문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 말에 레카르도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는 한참 동안 내 눈을 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북쪽 기지에 대한 것은 대가주가 이야기해 주었나?”
북쪽 기지는 윈체스터 저택의 비밀 방어선 중 하나였다.
직계가족과 참모급만 알고 있으며, 나도 헥토르 할아버지를 통해 얼마 전 알게 되었다.
수천 개의 폭탄이 저장되어 있으며, 탈출로와 이어지기도 한다. 살상력 높은 무기를 만들기 위한 거대한 실험실도 있고 말이다.
“……네.”
“어린애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군.”
레카르도는 인상을 찡그리고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이내 나를 응시했다.
“에반은 모를 거예요.”
원작을 읽었던 나는, 에반이 북쪽 기지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서상으로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테일러스의 간자들도 알아낼 수 없었겠죠. 하지만 에반이 이를 알아채고 테일러스에 보고하면 앞으로의 상황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원작에서 에반이 만약 저 기지를 알고 있었더라면 조금 더 쉽게 윈체스터를 점령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셀로가 배신자인 페르메티스에게 빠지지만 않았더라도, 진이나 레카르도는 북쪽 기지로 이동해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겠지.
북쪽 기지의 존재에 대해 들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잠시 후 레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거처로 마땅치 않다는 것이 네 판단인가.”
그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과연 내 의견을 받아들여 줄까, 심장이 뛰었다.
“…….”
한참 동안 나를 보는 그 눈빛은 꽤 진지했고, 오묘한 흥미를 담은 채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적 후 그가 말을 이었다.
“유용한 의견이다.”
수긍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내 레카르도가 나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급히 할 말이 있더라도 공녀의 몸으로 이런 날씨에 뛰쳐나오는 것은 적절치 않으니.”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본능적으로 위축되었다.
“콜록.”
닦는다고 닦았겠지만 여전히 그의 볼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녹색 눈에 담긴 감정은 꽤나 엄해 보여 호기심인지 살의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다음에는 자제하거라.”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가? 어쩐지 얼떨떨하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 의견이 레카르도에게 먹혀들었다는 것이다.
“네, 아버지…….”
잠시 후 몸을 다시 똑바로 세운 레카르도는 로웬을 불렀다.
“에반 테일러스의 방을 다시 배정한다.”
“존명.”
로웬은 레카르도의 명을 받들었다.
창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던 에반의 눈빛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었다.
레카르도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리고 너는.”
* * *
― 일주일에 한번 나와 저녁 식사 자리를 갖는다.
4대 가문 어디에서든 통용되는 진리가 있다.
― 왜…… 왜요?
어른이건 아이건, 가주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는다는 건 인정받았다는 증표이자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것.
― 뭘 배웠는지 확인하고 싶군. 이제 많이 자라기도 했고.
그리고 나는 불과 일곱 살에 망할 영광을 받았다.
“…….”
물론 거절할 수도 있었다.
레카르도가 그렇게 긴 검을 차고 있지만 않았어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얼굴에 붉은 피를 묻히고 무서운 모습만 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직접 말하지 말고 익명의 편지라도 쓸걸.’
나는 내 입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쓸데없이 마음만 급해서 레카르도에게 직접 말할 생각을 하다니, 미쳤었지.
“망했어…….”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후우…….”
레카르도의 낮은 목소리가 귀에서 아른거렸다.
식사 같은 건 진이랑 하라고! 악당 아빠야!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셀로도 가고…… 나도…… 간다…….”
사르르 눈을 감으려 했을 때, 눈앞에 오랜만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특별 구역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