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5화
나는 당연히 그 메시지를 무시하려고 했다.
특별 구역의 주인이 써 놓았던 협박 편지를 잊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참 쎄하게도 내게 장난을 걸었고, 내 앞에 뜨는 다음 창에 나는 고민해야만 했다.
[아이템 ‘푸른 매의 비밀’이 특별 구역에 반응합니다.]
헥토르의 문제를 푼 대가로 시스템에게서 받은 아이템이었다.
푸른 매의 비밀에는 불친절하게도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그런데…… 이 비밀스러운 아이템에 대한 단서가 여기에 있다?
뭔가 위험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모름지기 이런 것은 넘어갈 수 없는 법이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특별 구역의 정원은 1명이라, 내가 방 주인과 마주칠 일은 없다.
나는 용기를 내어 특별 구역에 입장했다.
‘감회가 새롭네.’
수년 만에 찾은 방은 전에 왔을 때와 같았다.
오셀로나 진의 방과 다를 것 없는 구조와 크기, 도서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책들이 꽂혀 있는 서재.
책상과 의자 또한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내가 키가 커져서 의자에 전보다 쉽게 앉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방을 한번 둘러본 나는 의자에 앉았다.
이전보다 다리가 길어진 내 자신에 대해 조금 뿌듯해하면서 말이다.
인벤토리의 ‘푸른 매의 비밀’이 반짝거리며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집었다.
역시 이 방과 연관이 있는 물건일까.
나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역시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 브로치이다.
“흐음…… 모르겠네.”
결국 브로치의 특이점을 찾는 것에 실패하고 한숨을 내쉬었을 때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거?”
책상에 파인 홈. 오늘 처음 발견했다.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책상이었지만 하단에 음각으로 오목 들어간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모양은 내가 가진 브로치와 정확히 일치했다.
“오오! 똑같아!”
나는 책상의 홈을 검지로 스윽 만져 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브로치를 그 안에 넣어 보았다.
그리고 딸깍― 소리가 나며 브로치가 빛나기 시작하는 순간 이거다 하는 생각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하지만 빛이 점점 강해지자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만…… 이거 이러다가 폭발하는 거 아니야?
놀라 의자에서 내려가려는데 눈부신 빛이 시야를 메웠다.
나는 더 이상 그 방에 있는 게 아니었다.
‘에시르의 금공처럼, 기억을 담는 물건이었나?’
아니, 그와는 조금 다르다.
여기는…… 마치 영화관 같았다.
내 앞에는 책상 대신에 거대한 스크린 같은 화면이 있었고, 나는 관찰자로서 앉아 있을 뿐이다.
“저…… 저기요?”
불러도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고, 나 혼자뿐.
에시르의 금공에서는 예측할 만한 것이 있었기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낯선 상황이라서 불안한 마음이 컸다.
“위험한 건 아니죠……?”
내가 알게 될 ‘푸른 매의 비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호기심과 함께 잔뜩 긴장해 있을 때였다.
화면에 ‘1’이라는 숫자가 떴다.
영상은 주요 장면만을 빠르게 보여 주는 식으로 지나갔지만, 나는 화면의 내용이 무엇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저 녀석……?”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시크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너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화면이 전환되며 소년은 나날이 성장해 갔다.
테일러스의 마차에서 내렸던 에반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도 보였다.
“에반?”
― 청명의 힘으로 악을 정화한다.
소년의 목소리는 굵고 낮아졌다.
푸른 눈의 소년은 서늘할 만큼 강한 청년이 되었고, 악랄한 윈체스터 저택에 납치된 테일러스의 사람들을 찾으러 가고 있었다.
원작의 그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내, 악랄한 윈체스터 쌍둥이에 의해 희생된 테일러스의 사람들을 보고 분노하는 에반의 표정.
그의 몸과 손에 푸른 청명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은 전에 보았던 체노아 테일러스의 기운만큼이나 강렬했다.
― 역사 속으로 사라져라, 윈체스터.
조금 이상한 것이, 저택의 분위기는 내가 알고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원래 어두운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섬뜩하고 피폐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닌, 원작을 보고 상상했던 윈체스터 저택이다.
반쯤 미쳐 있는 오셀로의 얼굴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의 흑염은 남녀노소를 구분치 않고 에반의 병사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으…… 미친놈…….”
피를 흘리며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
적과 아군의 구분조차 없이, 악마가 휩쓸고 가기라도 하듯 처참했고.
― 어서 날 죽여 줘.
에반이 죽여 달라는 샤샤 윈체스터를 무심히 지나치는 모습도 내가 책에서 본 그대로였다.
에반은 윈체스터 저택을 청명의 힘으로 파괴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에반의 서늘한 안광에, 내 손바닥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뭐야, 저게.”
그리고 결말에 다다른 듯한 부분.
오셀로는 페르메티스의 배신에 의해 죽고, 에반 테일러스가 레카르도 윈체스터, 내 아빠를 상대하고 있었다.
레카르도의 흑염은 어둠의 기일에 보았던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했다.
하지만 에반의 강함은 레카르도 못지않았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강력한 세계관 최강자들끼리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레카르도가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보이며 밀리기 시작했다.
“안 돼!”
에반의 검날이 레카르도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레카르도가 죽는 모습은 마치 내 심장에 칼이 꽂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렇게 <테일러스의 가주>는 평화를 되찾고 막을 내렸다.
하지만 영화 끝의 쿠키 영상처럼…… 그 뒤에는 어마어마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진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더니, 갑자기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검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분명 흑염이 아니었다.
색만 흑염과 비슷한 검은색일 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이질적이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그것은 삽시간에 온 하늘을 덮으며 아포칼립스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촉수처럼 뻗어 나오는 그림자는 실체가 있었다. 그것들이 대지를 뚫고 일어나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검은 형체에서 뻗어 나온 괴물들이 실체를 드러내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에반은 진에게 일격을 날렸으나 진의 몸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에반의 몸을 덮쳤다.
에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재가 되어 가는 제 몸을 보고 있었다.
― 나는 모든 것을 필멸하는 페르세토스. 메키우스의 후예들이여, 두려워하라.
진이 입술을 달싹이자 다섯 개의 중첩된 목소리로 기뻐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룡 메키우스, 악의 화신 페르세토스. 신화로 내려오는 그 이야기를 역사서와 에시르의 기억에서 듣고 봐서 알고 있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이름이다.
세상은 어둠에 먹히고 있었다.
악과 그림자로 만들어진 괴물들이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땅은 검은빛이 되어 가고 모든 식물들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는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이었다.
‘종말’이라는 단어가 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재가 되어 소멸하던 에반의 몸에서 푸른빛이 강렬히 빛나는 것이 보였다.
번뜩이는 청안에 진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이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청명이여, 나의 몸을 시간의 굴레에 가둔다.
분명 내가 보았던 원작에서는 없던 내용이다.
― 세상을 돌려 멸망을 막겠다. 그리고…… 꼭 너를 파멸시키겠다.
그리고 다음 화면,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 * *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곧 의사가 올 거예요.”
내 불덩이 같은 이마에 샤샤는 젖은 수건을 올렸다.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수건을 또 준비하고 있었다.
창밖은 새카맣고, 나는 머리가 무거웠다.
내가 열이 나기 시작한 것은 특별 구역을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가씨이…… 몸이 불덩이 같아요. 오, 흑룡이시여…….”
아무것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물조차도.
이렇게 아픈 것은 처음이다.
“으…….”
어쩌면 정신적 충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에반의 과거를 보는 도중 ‘2’라는 숫자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에반을 보았다.
어리지만 알 거 다 아는 눈빛의 에반을 말이다.
에반 테일러스는 ‘회귀’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 그리고 진의 몸속에서 페르세토스가 깨어나기 전으로 말이다.
놀라 경악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메시지가 떴다.
[특별 구역의 주인이 입장합니다.]
[인원 초과로 자동 퇴장당합니다.]
순식간에 퇴장당해 ‘푸른 매의 비밀’을 그대로 두고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인벤토리를 열어 보니 푸른 매의 비밀이 들어 있었다.
자동으로 회수된 모양이었다.
[아이템 ‘푸른 매의 비밀’이 특별 구역에 반응합니다.]
메시지도 그대로이다.
원하면 특별 구역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후유증이 대단해서 다시 그걸 보러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아무튼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특별 구역’의 주인은…… 방을 재배정해 나와 같은 복도를 공유하게 된 에반 테일러스이며 그는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회귀했다는 것.
그리고 진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