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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47화 (47/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7화

샤샤의 방을 나오던 레카르도는 헥토르를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레카르도가 샤샤의 방에 들어가고 한숨 돌린 사용인들은, 헥토르의 등장에 더욱 긴장하고 서 있던 차이다.

“샤샤는 어떠하더냐.”

헥토르의 말에 레카르도는 답했다.

“회복하는 데 사나흘이 필요하다더군요.”

“사나흘이라. 가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었는데, 오래 걸리겠군.”

아쉽다는 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가주께서는.”

레카르도가 서늘한 눈빛으로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만 거처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카르도의 말에 사용인들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제안이었으나, 축객령에 가까운 언사였다.

여기서 헥토르가 화를 내기라도 한다면 샤샤의 방 문짝을 포함해 반경 몇 미터 내의 사용인들은 저택 밖으로 날아갈 것이다.

“허. 나를 내쫓으려는 건가.”

당연히도 헥토르의 노쇠한 눈썹이 사납게 굳었다.

그의 몸에서 거친 흑염이 일렁이려는 찰나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리도 약한 어린아이를 상대로 매일같이 여덟 시간씩 수업하는 것은 과한 처사입니다.”

“과한 처사라. 메치스가 집필한 대륙 역사론의 일곱 권을 다 꿰고 있는 아이에게 말인가.”

그 말에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대륙 역사론은 진조차 열 살은 되었을 때 떼었던 책이다.

‘저러니 대가주가 수년간 머물 만도 하지.’

레카르도는 머리가 지끈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샤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입니다.”

“뭐라고?”

“적에게 가문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샤샤는 혹독한 날씨에 밖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레카르도의 말에 헥토르의 표정이 그제야 움직였다.

“그러다 결국 저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내 헥토르의 시선은 천천히, 에반의 방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전해 들었다.

갑작스레 에반의 방이 변경된 이유에 대해서. 물론 헥토르는 샤샤를 제법 기특하게 생각했다.

벌써 의견을 개진하고 가문을 돕다니.

그 과정에 있었던 일이 이 병증의 원인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다.

“……그랬군.”

탄식 같은 헥토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지닌 것은 많으나 그 그릇이 되는 육체가 약하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몸도 약한 아이가 공부에만 매달려 있으니 더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는 당연한 우려였다.

헥토르의 시선이 레카르도 윈체스터를 향했다.

딱딱하고 차가운 눈빛의 레카르도는 샤샤의 방문 앞에 서서 헥토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 아버지가 되었군.’

“대가주의 말대로 벌써 대륙 역사론을 끝냈을 정도면 이미 남들보다 3년은 빨리 가고 있는 것이니, 방학을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쩐지 치솟는 아니꼬운 마음에, 흠, 하고 헛기침을 한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강인한 신체에 강인한 정신이 깃드니, 몸을 정비할 휴식년도 필요하긴 하겠지. 하지만.”

두 윈체스터가 주고받는 말에 로웬은 내심 아쉬워했다.

헥토르가 저택에 있는 동안 영지의 불안한 정세가 매우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테일러스의 가세는 영 기울어, 두 가문의 위상이 뒤바뀌었다.

헥토르는 이어 말했다.

“마음이 편해야 몸도 편해지는 법. 약을 먹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병세의 차도가 덜하지.”

헥토르의 말에 레카르도는 눈썹을 꿈틀했다.

제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알아챈 헥토르는 입술을 비틀며 말을 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에 먹을 소화제 고민을 하고 있더군. 얼마나 험악하게 굴었으면. 쯧.”

헥토르는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샤샤에게 휴식년을 주겠다. 대신 그동안 편한 사이가 되어 보도록 하거라. 부녀간에 말이지.”

― 제가 배우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께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샤샤가 뗀 것은 대륙 역사론 정도가 아닌, 아카다의 탑에서나 배우는 고급 지식들이었다.

그러한 성취들은 헥토르가 느끼기에 그저 놀라울 따름.

‘돈독한 관계를 맺어 천재의 마음을 얻는 것도 가주의 역할이지.’

헥토르는 생각했다.

‘샤샤 그 녀석은, 훗날 가문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잠시 후 헥토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레카르도는 눈썹을 굳힌 채 로웬에게 말했다.

“가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로웬은 레카르도의 뒤를 따랐다.

아까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는 등골이 서늘했었다.

그나저나 아픈 아가씨 방 앞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신경전이나 벌이고, 세상 다시 살고 볼 일이다.

“로웬.”

“네, 공작 전하.”

“내가…… 무서운 인상인가.”

“…….”

‘설마 그걸 이제 아신 겁니까’라는 말을 로웬은 간신히 삼켰다.

* * *

내가 정신을 제법 차린 것은 앓아누운 지 딱 사흘이 지나서였다.

“모두의 걱정이 흑룡께 닿았나 봐요. 이리 호전되셔서 다행이에요.”

마야는 차이베리 파이를 먹기 좋게 내 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대가주님도 다녀가시고, 가주님께서도 다녀가시고, 진 공자님도…… 세 분 다 바쁘실 텐데 아가씨께 지극정성이셨죠.”

솔직히 말해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열이 들끓어서 그런지, 누가 내 방에 왔다 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야의 ‘지극정성’이라는 말이 꼭 과장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윈체스터의 남자들은 누군가의 고통에 신경을 쓸 만큼 다정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아플 때만은 예외. 부담스러울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고는 한다.

방에 몇 번이나 찾아온다든지, 얼른 낫게 하라며 의사를 협박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약육강식의 윈체스터에서 아프다는 것은 수치나 다름없어서, 환영받지 못하는 일인데 말이다.

“참, 그리고 아가씨.”

마야는 문 앞에 놓아두었던 선물 상자를 들고 왔다.

침대에 앉아 파란 상자를 받아 든 나는 마야를 올려다보았다.

“오셀로 공자님께서 보낸 소포예요.”

그 말에 나는 손을 움찔했다.

오셀로…… 잘 지내고 있을까. 사실 아픈 와중에도 오셀로의 얼굴이 종종 떠올랐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뭐 이상한 걸 보내지는 않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소포를 풀었다.

“…….”

그리고 나는 소포 안에 손을 넣어 푹신한 그것을 꺼냈다.

“어머나, 귀여워라.”

마야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가 아기 때 침대에 두었던 곰 인형과 닮았는걸요.”

오셀로가 내게 보낸 선물은 다름 아닌 곰 인형이었다.

갈색의, 조금 심술궂게 생긴 곰 인형에는 작은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나는 곰 인형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셀로가 보냈을 법한 선물은 아닌 것 같은데…….

“쿡…….”

괜히 웃음이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며 내게 곰 인형 선물을 보낸 것일까.

미소 지으며 곰 인형을 보고 있는데, 소포 안에 쪽지가 하나 눈에 띄었다.

나는 쪽지를 꺼내 눈으로 글씨를 읽었다.

‘갖고 싶은 게 있거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으면 곰에게 말해.’

오셀로다운 살벌한 쪽지였고 오셀로다운 거친 필체였다.

‘저주 기능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메시지이다.

내가 곰 인형을 빤히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를 했다.

마야가 문을 열자, 문밖에는 선물 상자로 보이는 것들을 잔뜩 든 하인들이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공작 전하께서 아가씨의 쾌차를 흡족해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이건 진 공자님이…….”

“대가주님께서 다음 봄에 찾아뵙겠다고 하시며 선물을 남기셨습니다.”

그들은 내 방에, 선물을 쌓기 시작했다.

“아가씨, 하녀들이 한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건 로웬 경이 보내신 거예요.”

나는 수북이 쌓인 선물들을 보았다.

두 달 전에 감기 몸살이 걸렸을 때도 빨리 나으라는 메시지와 함께 비싼 선물들을 잔뜩 받았었다.

마야는 싱긋 웃으며 내게 귀띔했다.

“아가씨가 아프신 동안, 저택이 얼마나 삭막했는지 모른다고 다들 난리예요.”

나 같은 어린애가 아프다고 삭막할 정도의 저택은 아니지 않나.

“하녀들도, 하인들도, 다들 아가씨가 낫기만을 기다렸는데 가주님이나 공자님은 더하셨겠죠.”

선물을 둔 하인들이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을 차례로 풀어 보았다.

레카르도는 엘르 토이숍에서 몇 가지 장난감을 주문해서 보냈는데 구성이 꽤 깜찍했다.

아마 로웬이 골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헥토르는 도서관에는 없던 몇 종류의 책을 선물했는데 연금술에 대한 책이 내 흥미를 끌었다.

‘일이 있어 잠시 떠나야 할 것 같구나. 1년 뒤에 또 만나자, 손녀야.’

내가 아픈 사이에 떠나셨다는 사실이 아쉬우면서도 ‘손녀’라는 말에 어쩐지 마음이 따스했다.

조만간 헥토르의 거처로 답장을 보내야겠다.

책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꼭 읽어 봐야지.

그리고 진이 보낸 선물은 예쁜 리본 묶음과 동그란 자주색 공이었다.

자주색 공은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했고 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페리도트…… 귀한 광물을 보내셨어요.”

마야가 저 정도로 놀란 것을 보면 진짜 비싼 게 맞는 모양이었다.

“윌너스 광산에서도 일 년에 한두 개 나오는 거예요. 나중에 데뷔탕트 무도회 때 이 보석으로 티아라와 목걸이를 만들어 가시면 다들 아가씨께 눈을 떼지 못하겠죠.”

선물을 받은 건 나인데 마야가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하아, 언제 그때까지 기다리죠?”

하지만 나는 먼 훗날의 무도회 상상만 하며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푸른 매의 비밀’을 통해 보았던, 진의 몸 안에 잠자고 있었던 페르세토스.

그것은 세상을 멸망시켰었다.

그런 걸 본 이상 어떻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종말의 광경은 괴이하고 끔찍했으며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전에 내가 보았던 인과율에 대한 꿈도…… 페르세토스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마야.”

“네, 아가씨.”

“에반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의외의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마야가 말했다.

“에반 테일러스 공자님 말씀이시죠? 그냥 방에 머물고 계세요.”

“사흘 내내?”

“네.”

에반은 나와 같은 건물에 머물게 되었다.

그 말은, 내가 에반 테일러스와 접촉하더라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알아내야 할 것이 많았다.

기껏 엘릭서를 찾아 병을 고쳐 보았자, 세상이 멸망하면 끝이니까.

“나, 한번 에반을 만나 봐야겠…….”

그러니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결국은 접촉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여는데, 갑자기 마야가 비틀대더니 픽 하고 쓰러졌다.

“마야!”

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내려와 마야에게 다가갔다.

뭐지……? 내가 열에 들끓었던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과로해서 쓰러진 건가?

쓰러진 마야를 흔들다가, 사람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

무언가가 내 입을 막았다.

그제야 나는 내 등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단단한 몸이 내 등에 닿았다.

바싹 얼어붙은 채 고개를 돌리자 시리도록 새파란 청안을 빛내며 나를 보고 있는 에반이 보였다.

“……샤샤 윈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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