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8화
그 입술 새로 나오는 내 이름을 듣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에반 테일러스!
에반 테일러스가 내 입을 막고 있었다.
고작 일곱 살의 내가 발버둥 친다고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다.
마야도 에반이 기절시킨 걸까……?
“너.”
뒤에서 살기가 실린 에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소년답지 않은 서늘한 목소리였다.
“……누구야.”
‘이름 불렀으면서 누구냐고 묻긴 왜 묻는 거야!’
아무리 원작의 정의로운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나를 위협하는 사람!
나는 강하게 에반의 팔을 깨물었다.
으으, 저리 가!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길 잃은 28회차 회귀자’와의 만남을 조기 달성하였습니다.]
훅 떠오른 눈앞의 푸른 창.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벤트 레벨을 측정 중입니다.]
[해당 이벤트는 ‘유니크’급 이벤트로 측정되었습니다.]
[※사용자의 레벨과 부합하지 않는 이벤트입니다.]
언젠가 카이사의 저주를 지닌 자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뜨던 메시지였다.
그리고 줄줄이 창이 떠올랐다.
[‘길 잃은 28회차 회귀자’의 인과율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길 잃은 28회차 회귀자’의 능력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길 잃은 28회차 회귀자’를 강제 각성합니다.]
메시지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운 눈으로 창을 바라보았다.
길 잃은 28회차 회귀자라면, 설마 에반 테일러스를 말하는 건가?
“…….”
에반은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선연한 푸른색을 띠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불꽃에서부터 위협이 될 만큼 화르륵 강한 불꽃으로 순식간에 성장했다.
순간 위협을 느낀 나는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검은 지배(SS/LV.1)’를 사용합니다.]
일순간 충돌한 청명의 힘과 검은 지배는 내 방의 창문들을 다 날려 버렸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요란스럽게 창문이 깨졌다.
“…….”
그에 나는 간신히 그에서 벗어났지만 곧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반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에반의 손에 맺혀 있는 청명은 위협적이었지만 그가 날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천히 제 손으로 시선을 돌린 에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나는 에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네가 어떻게……?”
제 청명의 기운을 왜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가씨!”
창문이 다 깨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컥 문이 열리고 로빈과 하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에반의 손에서 푸른빛이 점차 가셨다.
에반은 고개를 숙인 채 반항의 기색조차 없이 손을 내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가씨.”
“세상에, 마야 님!”
하녀들이 나의 상태를 살폈고, 시녀장이 들어와 나를 보호했다.
로빈은 곧장 에반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가득했고, 마야는 기절했으며 나는 주저앉아 있으니 내가 에반에게 습격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에반 테일러스 공자를 포박하라!”
습격당한 게 맞기는 하다.
더군다나 에반은 내 방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
에반은 어떠한 변명도 없었다.
그저 혼돈의 감정이 뒤섞인 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그가 입술을 열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 누구지?’
뭔가 말하려던 그가 다시 입을 닫았다.
내 심장이 쿵, 쿵, 격하게 뛰고 있었다.
잠시 후 들어온 병사들이 에반의 양팔을 잡고 데리고 나갔다.
로빈은 무릎을 굽혀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가씨.”
에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길 잃은 28회차 회귀자’의 칭호가 ‘28회차 회귀자’로 변경됩니다.]
[칭호 획득에 따라 인과율 변경이 적용됩니다.]
* * *
[5. 에반 테일러스
칭호 : 28회차 회귀자
인과율 : 8% ]
인물 열람에 뜬 에반 테일러스에게 칭호와 인과율이 생겼다.
― 세상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득하고, 나는 홀로 있었다. 스물일곱 번째이다.
문득 ‘테일러스의 가주’ 책에서 뜯어내었던 일기의 내용이 떠올랐다.
만약 ‘28회차 회귀자’라는 말이 맞는다면, 세상이 스물일곱 번이나 멸망했다는 건가.
“…….”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이틀 전, 에반은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
볼모를 감금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렇게 현행범이라는 특별하면서도 확실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저녁 식사를 위해 드레스를 입고 있던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표정이 좋지 않으세요.”
“에반을 만나겠다고 하면, 화내시겠지?”
“공작 전하께서요? 아니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
그렇게 갑자기 내 방에 침입해 마야를 기절시키고 날 위협하다니, 책을 보고 상상하던 에반과는 달라 더 당황했었다.
그 때문에 에반에게 약간의 악감정이 생기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에반은 대화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당장 죽이시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레카르도는 에반 테일러스에게 매우 가혹했다.
그래도 테일러스의 후계자라며 감금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가문 내에 있었지만, 역시나 강렬한 흑염의 무력으로 단숨에 잠재웠었다.
“감히 아가씨의 방에 침입하다니. 속이 시커먼 테일러스의 후계자 아니랄까 봐.”
에반은 힘든 심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악랄한 죄수들을 수도 없이 상대한 심문관들도 두 손발을 다 들었을 정도라고 했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쉰 나는 저녁 식사를 위해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역시 마음이 무겁다.
“…….”
도착하자, 자리에 앉아 있는 레카르도 윈체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보았던, 청년 에반이 레카르도의 가슴을 찌르던 장면이 생각나 흠칫했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레카르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편한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네.”
오늘따라 나를 신경 쓰는 듯한 그이다.
나는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반짝이는 은식기와 과할 정도로 화려한 음식들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후 조용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륵, 사륵, 고기를 써는 소리와 달가닥 하고 수저를 올리는 소리.
왜 이렇게 내가 내는 소리만 크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벌을 받는지, 식사를 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무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할 말이 있나 보군.”
식사 도중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깜짝 놀라 스푼을 떨구었다.
챙그랑― 바닥에 떨어지는 스푼 소리가 내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말…… 말해야 해.’
에반 테일러스가 감옥에 갇힌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정치적인 행위임을 알고 있다.
원작에서도 테일러스가와 윈체스터가의 신경전은 치열했으니까.
그러니 내가 의견을 낼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에반은 저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아…… 말해 버렸다.
순간 레카르도의 무섭도록 선연한 녹안이 나를 향했다.
그에게 에반의 거처를 옮겨 달라 의견을 말할 때만큼이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래서.”
레카르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풀어 주기라도 하라는 건가.”
쿵, 쿵, 쿵, 계속 심장이 뛰고 있었다.
“……아뇨.”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듣기로는 체노아 공작님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라는데 같은 처지라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
“저도 공녀로썬 많이 부족하니까요.”
세상이 멸망하는 환상을 보았는데, 그에 대해 묻고 싶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나는 핑계를 대었다.
레카르도는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여기 있는 동안 알게 되었을 거예요! 샤샤도 약하고 폐만 끼치고…….”
“그런 평가를 하는 자가 있다면 죽여 버리겠다.”
“네, 네?”
레카르도를 설득하기 위해 나의 처지를 대입하여 말하고 있는데, 문득 레카르도가 서늘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바…… 방금, 죽여 버리겠다고 한 것 맞지.
“너와 그 녀석이 비슷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주어와 목적어를 제대로 듣지 못해 얼어 있던 내게 레카르도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에반 테일러스가 감히 네 이야기 친구가 되고 싶어서 침입하기라도 했단 말을 하는 건가.”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일까. 레카르도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잔뜩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잠시 어안이 벙벙하던 나는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왔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하긴, 아무리 테일러스의 후계자라도 공녀의 방에 침입하는 것이 심각한 적대 행위임은 분명하다.
절대로 허용되지 않을 짓이며, 이에는 헤일로나 아카다의 의견도 같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곱게 석방할 일은 없겠지.
최악의 경우에는 볼모 교환을 취소하고 각자의 볼모를 되돌려 보낸 뒤 전쟁을 준비하거나…….
“저…… 에반을…….”
허튼소리로 들릴 것이라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에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레카르도의 허락이 필요해.
“다시 만나 보고 싶어요! 어쩌면 가문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결국 말해 버렸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레카르도의 처분을 기다렸다.
레카르도는 식기를 내려놓은 채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잠시 후 레카르도가 입술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