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49화
“잘 있는 거겠지, 오셀로?”
그날 밤 잠들기 전 나는 곰돌이를 안은 채 이야기했다.
“오늘은 기사단이 엘스 산의 백곰을 잡았어. 발톱이 얼마나 큰지 상상도 못 할걸? 자일 마을은 세금을 올리기로 했대. 테일러스에 민감한 정보를 팔아치웠거든. 나쁜 놈들.”
원하는 게 있거나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 곰에게 말하라고 했었는데, 때로는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곤 했다.
“헥토르 할아버지께는 내일 답장을 보낼 거야. 이럴 때 계신다면 좋을 텐데…….”
나는 헥토르에게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아직 흑염이 발현하지 않았기에 위력적인 기술 같은 것을 배울 수는 없었지만, 세계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와 문화, 예술 같은 필수 지식들 말이다.
간간히 내가 전생에서 알고 있던 수학이나 과학 지식을 그와 나눴고, 그쪽으로는 아직 발전이 덜 된 세계여서인지 헥토르는 굉장히 놀라워했다.
그에 헥토르는 나를 인정하고 내게 깊이 있는 지식을 전수해 주었고, 덕분에 앞으로 살아갈 삶을 위한 지식의 기반은 어느 정도 잡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께 에반을 만나겠다고 했다가 혼났어. 제기랄.”
식사 자리에서, 레카르도가 했던 말은 이러했다.
― 너 같은 어린아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적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할 만큼 윈체스터는 허술하지 않다. 그러니 허튼짓할 생각은 접어라.
서슬 퍼런 그의 눈빛에 나는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
― 그리고 네가 고집을 부려 지하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 …….
― 그 녀석의 옆방은 줄 생각이 없다.
나로서는 깨갱대며 수그릴 수밖에 없는 단호한 거절이었다.
레카르도가 싫어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감옥이라니……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꼭 에반을 만날 거야. 세상이 멸망하고 회귀하고…… 그게 정말 진짜냔 말이야. 물어볼 게 많은데 이렇게 가만히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니. 그 망할 자식은 성질 급하게 왜 내 방에 쳐들어와서…….”
문밖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리자 나는 황급히 곰을 이불 속에 넣었다.
잠시 뒤 문을 열고 진이 들어왔다.
나는 자려다 일어난 것처럼 진을 바라보았다.
곰 인형이랑 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면 부끄러우니까.
“안녕…… 하세요.”
나는 조금 어색한 얼굴로 진에게 슬며시 인사를 했다.
이 시간에 진이 웬일로 내 방에 온 거지?
요즘은 로젠토에 들락거리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불편한 표정은, 밤이라도 새고 가란 뜻인가.”
“아…… 아녜요!”
농담 같은 말을 던지고 피식 미소 지은 진은 내 침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 건강해 보이는군.”
그의 몸에서 은은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바깥에서 사냥이라도 하고 온 것일까.
“이번에 주신 보석은 잘 받았어요. 잘 간직할게요.”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군. 사실 최근에 썩 괜찮은 약의 제조법을 알게 되어 보내려고 했지만 그건 설비를 갖추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대신 보낸 건데 말이지.”
“괜찮은 약이요?”
진은 대답했다.
“아카다의 의사가 집필한 책을 얻었어. ‘엘릭서 제조법’이라고.”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엘릭서라면 만병을 통치할 수 있는 전설의 약으로 향후 카실리온 아카다가 제조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 제조법에 대한 책이 있다고?
“분석 중이지만 아쉽게도 아류작 같아.”
놀란 내게 진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긴, 알기로 엘릭서는 재료에서부터 제조에 이르기까지 보통의 방법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썩 괜찮은 건강 증진제가 될 거야. 어쩌면 제국에서 시판되는 것들 중 제일일지도.”
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오라버니.”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방 안을 눈으로 둘러보던 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몸 조심히 기다려.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보고하고.”
진의 말에 나는 조금 놀라 되물었다.
“수상한 사람이요?”
“지하에 갇혀 있는 그놈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테일러스의 첩자 놈들이 종종 드나들거든.”
테일러스 가문에서 공식적인 항의가 들어왔었다.
자신들의 볼모를 그렇게 취급한다면 오셀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아까도 발견했는데 영 걷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적당히 왼쪽 다리를 손봐 주고 돌려보냈어. 자그마한 경고 정도는 되길 바라며.”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오싹함이 느껴졌다.
그 나이대의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역시 악당 가문 윈체스터의 후계자. 그리고…….
“……하지만 그랬다가는 오셀로가.”
나는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보았던 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거대한 악의 기운.
그리고 종말에 먹혀 가는 세상 말이다.
“샤샤.”
진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어둠 속 녹색 눈은 유독 검어 보였다.
“오셀로였어도 나처럼 행동했을 거야.”
등골이 서늘해진다.
“윈체스터의 영역에서 벌 받을 짓을 했으면, 윈체스터의 방식대로 갚아 주는 거지.”
잠시 주춤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은…… 정말 뭔가 있는 걸까.
내가 알고 있는 진과 내가 보고 있는 진의 차이. 그 괴리는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위하는 저 모습의 이면에 다른 것이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뭐?”
처음에는 도망치려고만 했던 이 가문도, 내가 살아 보니 살 만한 세계였던 것처럼.
진 역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보았던 것을 확신하지 않기로 했다.
“제가 오라버니에게 제 비밀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내 말에 진의 눈동자가 옅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도 비밀이나 고민이 생기면 저한테 알려 주세요.”
진의 몸에서 정체불명의 기운이 터져 나와 세상을 뒤덮었던 모습이 다시 그려졌다.
대체 그건 무엇이었을까.
진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를…… 걱정이라도 하는 건가?”
짙은 시선은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긴장한 와중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우리는…….”
진의 녹안이 한 번 더 일렁이는 것 같았다.
“……가족이잖아요.”
잠시 뒤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술을 열었다.
“그래, 샤샤.”
이내 그는 쉬라는 말과 함께 내 방문을 열고 나갔고, 문이 닫힌 뒤 나는 창 쪽을 돌아보았다.
창밖, 눈이 쌓인 북쪽 탑이 보였다.
흐음…….
복잡한 생각을 제쳐두고 나는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까만 시야에 어떤 글자가 떠올랐다.
* * *
[‘붉은 봄’ 엔딩의 맛보기 영상입니다.]
[※인과율 100%를 달성하면 스토리 진행과 상관없이 랜덤 특전 엔딩을 맞이합니다.]
[사용자의 정신적 충격을 고려하여 전체 연령가로 재편집되었으며, 실제 특전 엔딩은 맛보기 영상과 다소 상이할 수 있습니다.]
거울 속의 나는 성인으로 보였다.
등의 중간까지 닿는 사르륵대는 은발과, 청초하고 또렷해 보이는 선명한 녹안.
다행히 전에 보았던 진의 맛보기 영상과는 달리 나는 꽤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진일까…… 나는 침대 근처까지 뒷걸음질을 쳤다.
‘제기랄, 또 감금은 싫어.’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철컥, 철컥, 철컥, 무려 세 개의 자물쇠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한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을 본 나는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
밤을 닮은 새카만 흑발과, 붉은빛이 섞인 푸른 눈동자.
에반 테일러스다. 그런데 이 오묘한 이질감은 무엇일까.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본 에반 테일러스의 성인 버전과는 느낌이 조금 달라 보였다.
“당신…….”
특전 엔딩 속의 나는 바들바들 떨며 에반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 앞에 다가온 그는 손을 들어 내 볼에 가져다 대었다.
“저택 바깥에서부터 아카다의 자물쇠를 수십 개나 설치하다니, 죽은 네 오빠의 정성이 갸륵하군.”
“…….”
“그토록 아끼던 네가 이렇게 결국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을 알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텐데.”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냉기가 지독했다.
청명의 기운이 아니다. 흑염도 아닌 어떤 고약한 것…….
에반의 입술이 열리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늘은 헤일로 일족이 전멸했어.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 나흘 전 전멸한 아카다보다는 제법 끈질기더군. 장렬한 전쟁이었지.”
그러자 내 입에서 날카로운 말이 쏟아졌다.
“당신은 더러운 변절자이자 배신자야.”
그의 허리춤에 검이 매달려 있었기에 나는 내 입을 막고 싶었지만, 자동으로 재생되는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페르세토스의 개! 당신은 더 이상 인간도 아니야!”
너…… 너무 심한 말 아니야?
나는 당황했지만, 다행히 에반이 검을 뽑는 일은 없었다.
이내 에반은 짙은 시선에 나를 담고 입술을 달싹였다.
“영웅 대신 짐승이 되는 대가로 페르세토스는 무한의 굴레를 끝내 주었지. 메키우스보다는 자비로운 처사야.”
나 아닌 나는 주먹을 꾹 쥐고 에반을 노려보았다.
“제발 정신 차리고…… 당신이 누구인지 생각해 봐!”
그리고 내가 외친 순간 에반의 서늘한 눈이 번뜩였다.
에반이 내 어깨를 힘을 주어 밀었고 나는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등에 침구가 닿는 느낌이 났고, 어느새 그의 숨결이 코끝에서 느껴졌다.
“네가 말해 봐, 내가 누구인지.”
나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그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테일러스의 가주, 세상에 남은 유일한 희망, 그리고…….”
“샤샤 윈체스터.”
귓가로 에반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른한 그의 눈빛에 불안한 박자로 심장이 뛰었다.
“희망은 없어.”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처음부터 없었어. 단 한 순간조차 우리가 바라는 봄은 없었어. 전부 허상이었을 뿐이야.”
이내 에반은 손을 내 눈꺼풀에 가져다대었다.
“눈을 감고 들어 봐. 사람들이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를.”
귀에서 내 목뒤로, 에반은 비스듬히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닿을 듯 말 듯, 입김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로운 봄이 오고 있어. 샤샤, 나는 네 소리도 듣고 싶어.”
나직이 흘러드는 그 목소리에, ‘흑’ 하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감촉이 내게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익숙해질 차례야.”
그리고 그 순간 앞이 환해지더니, 나는 눈을 떴다.
손을 들자 어린아이의 동그란 주먹이 보였다.
나는 오만상을 쓰며 입술을 달싹였다.
“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