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0화
겨우 에반 테일러스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게 되었다.
특전 엔딩인지 뭔지, 꿈도 희망도 없이 흑화한 에반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기에 그를 만나 진지하게 미래에 대해 얘기할 필요를 더욱 느꼈다.
“공작 전하께서 알게 되시면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걱정 마. 들키지 않을 테니 나만 믿어!”
마야가 경비들의 시선을 돌린 사이, 로빈은 내게 지하 감옥으로 가는 샛길을 안내했다.
“근데 로빈은 길을 어떻게 아는 거야?”
“이 길이요? 뭐, 몇 번 탈출해 본 적 있으니까. 하하.”
눈을 찡긋한 로빈은 말을 이었다.
“이래 봬도 형과 저는 이름을 날리는 좀도둑이었죠. 열두 살에 형이 공작 전하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로빈은 형제의 길거리 캐스팅 비화를 재미나게 설명해 주었다.
“마님의 장신구를 훔쳤는데 그게 워낙 중요한 물건이라서.”
윈체스터 공작가의 물건을 훔칠 정도로 대담했던 모양이다.
“도둑의 낙인이 찍히고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습니다. 거의 숨이 멎으려는 찰나, 공작 전하께서 형과 저를 써 보겠다고 하셨죠. 저희에게서 뭘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맷집을 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정식 검술 교육을 받은 로웬은 지금 기사단에서도 상위의 실력을 유지할 정도였고, 로빈은 또래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으니 말이다.
“아, 다 왔네요. 여깁니다.”
로빈이 비켜서자 비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지금의 제 몸집으로는 들어가기 힘듭니다.”
“혼자 다녀올게.”
로빈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당부했다.
“아가씨께서 계속 부탁하셔서 들어준 건데, 이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는 피식 미소 짓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말을.”
* * *
개구멍을 지나자 홀로 떨어져 있는 감옥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창살 안에 보이는 어느 소년의 모습.
상처가 가득한 몸에 비해 한기가 느껴지는 멀쩡한 얼굴이다.
옷은 다 떨어져서 넝마가 되었지만 눈빛만은 무섭게도 뚜렷했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에반 테일러스의 앞에 섰다.
에반은 내가 올 것을 알기라도 한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위로 올렸다.
“……안녕…….”
“…….”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난 샤샤 윈체스터, 레카르도 윈체스터의 막내딸이야. 그리고 당신은…….”
입을 꾹 닫고 있던 에반은 이어지는 내 질문에야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에반 테일러스. 회귀자지?”
‘통하는군.’
몇 초의 침묵 끝에 에반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네가 페르세토스인가?”
그는 서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본 ‘푸른 매의 비밀’에서는 진의 몸에서 페르세토스가 부활한다.
그런데, 그걸 뻔히 겪은 에반이 왜 나한테 페르세토스냐고 묻는 거지?
“페르세토스는 악마잖아. 나한테 악마냐고 묻는 거야?”
에반의 눈을 보며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문득 생각나는 의문점이 있긴 했다.
에반이 정말 28회차 회귀자라면, 1회차 때 진의 몸에서 페르세토스가 부활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다음 회차 때 페르세토스를 죽이지 못한 것일까.
어떤 사연으로 스물일곱 번이나 사망하고 28회차까지 온 것일까.
진이 강해서? 아니, 그렇지 않다.
에반은 먼치킨 주인공이란 말이야.
“당연히 부정하겠지.”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쉽게 나왔다.
“잠들어 있는 악마가, 멸망의 장에서 깨어날 때까지 누구도 자신이 페르세토스라는 걸 몰라.”
멸망의 장이라면 일정한 시간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다.
내가 스물, 에반 테일러스가 스물다섯. 윈체스터가 멸망하는 그 무렵의 시간.
그리고 잠들어 있는 악마가 깨어날 때까지 누구도 자신이 페르세토스라는 걸 모른다는 이야기는…….
“설마, 회차마다 다른 몸에서 페르세토스가 부활한다는 거야?”
내가 놀라서 묻자 에반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
나는 충격을 받은 채 그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내게 회귀의 특전이 있듯, 페르세토스에도 특전이 있다.”
28회차 회귀자의 사연이 이런 거였다니.
저승사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래서는 병을 고쳐도 의미가 없잖아! 세상이 다 망한다고? 이미 스물일곱 번이나 망했다고요?!
물론 속으로 안도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내가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본 것은 에반의 1회차였다.
그렇다면 그 말은 이번 생에서는 진이 페르세토스가 아닐 확률도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 너는.”
멍하니 서 있는데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생의 페르세토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무슨 개소리세요……?
“내 스퀘어에 여러 번 침입한 것을 알고 있다.”
그제야 나는 그 스퀘어의 주인이 에반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음…… 알고 있었구나. 아마 그래서 내 방에 침입했을 테고 말이다.
그의 노트에다 커다랗게 ‘ㅗ’ 표시도 그려 놓았었는데…….
“그건 미안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네 공간인지는 몰랐어.”
갑자기 조금 머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에반의 방에 침입한 것은 내가 먼저인데, 그는 내 방에 침입했다고 이 꼴이 되었구나.
“아무튼 난 페르세토스와는 관계없고, 너 같은 회귀자도 아닌……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을 뿐이야.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은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서 나갈 수 있도록…….”
내 말을 무시하고 에반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수많은 변수를 일으켰어.”
“뭐…… 그건 사실이긴 한데.”
“그러니까 나는 너를 페르세토스로 의심할 수밖에 없고,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않는다면 널 죽이는 게 최선의 선택이겠지.”
섬뜩한 안광과 그보다도 섬뜩한 말.
잠깐이나마 들었던 머쓱한 마음이 훅 사라졌다.
“내 방에 나를 죽이러 온 거였어?”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설마…… 아니지?”
한참 동안 대답은 없었다.
‘페르세토스여서 죽인다’도 아닌 ‘페르세토스로 의심하고 있으니 죽인다’라.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넌 페르세토스에 갇혀 있구나.”
내 말에 에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내가 페르세토스에 갇혔다고?”
“응.”
원작 속 에반 테일러스는 멋있었지만 모든 영웅 캐릭터가 그렇듯 독선적이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의하고, 그 목표를 거침없이 이루어 나갔다.
하지만 그 독선이 스물일곱 번의 회귀에 걸쳐 오로지 한 방향으로 굳어진다면.
“인간의 뇌는 부정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대. 미워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생각하는 거야. 지금의 너는 페르세토스를 없앨 생각뿐이지만…….”
나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로지 그런 생각만 한다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 거야.”
에반의 벽안이 일렁였다.
“봐, 네가 죽이겠다는 난 지금 일곱 살이야.”
내 말에 그의 눈썹이 바싹 굳는 것이 보였다.
스물일곱 번의 회귀가 그의 인격을 얼마나 닳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저놈이 고작 일곱 살 꼬맹이인 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을 보면, 에반 테일러스는 더 이상 내가 아는 그 정의로운 에반이 아니었다.
독선으로 가득 찬 망가진 영웅. 그걸 영웅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에반은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넌 나를 모르지만, 난 널 알고 있었고 항상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어.”
소설을 읽으며 감탄했던 부분이 있었다.
적들이 무고한 희생과 항복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을 때 에반은…….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열흘 밤낮을 절벽 아래에서 기다리던 에반 테일러스를 기억하고 있거든.”
약간은 울컥한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내뱉은 순간 에반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넌 절대 굴복하지 않았잖아. 인내하더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에반의 정체성이었고.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28회차 회귀자의 깨달음’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업적 달성으로 스킬 레벨이 상승합니다.]
[스킬 검은 지배(SS/LV.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