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1화
나만 시한부인 줄 알았는데 사실상 모두가 시한부였다니.
꽤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내 계획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동안이라도 건강하게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죽고 나서 저승사자 멱살을 잡고 한 대 패 주려면 힘도 길러야겠다.
아무튼 내 목표 1번은 병약한 몸에서 벗어나기!
“…….”
그리고 이번에 갱신한 목표 2번은 페르세토스가 숨어 있는 몸을 찾아보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진 에반도 방법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려면 에반과 머리를 맞대야겠지만 에반의 상태를 봐서는…… 쉽지 않을지도.
― 넌 대체 누구지? 어떻게 나에 대해 아는 거지?
― 독자…… 아니, 말해도 이해 못 할 거야.
‘역시 의심스럽겠지? ……처음과는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했지만.’
인기척이 느껴져 나는 대화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얼른 빠져나와야 했다.
“아무튼, 페르세토스라.”
페르세토스는 고룡에 의해 봉인되어 있는 강력한 악의 화신이라고 했다.
세상의 멸망을 가져올 정도로 강력한 악마.
그리고 페르세토스가 인간의 몸에 들어 있는 한, 먼치킨 남주인공 에반은 그것을 처치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누구의 몸속에서 부활하게 되는지 예측이 안 되니 그를 없애지 못해 계속 회귀한 거고.
그리고 에반은 지금 내게 썩 우호적이지 않은 상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면,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겠군.”
이럴 때 시스템이 페르세토스의 정체에 대해서 알려 주면 좋은데, 치사하게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샤샤.”
“오라버니.”
도서관 안, 진이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내 짧은 다리는 언제 길어질까. 얼른 진처럼 컸으면 좋겠다.
“부탁할 게 있어요.”
헥토르 윈체스터는 저택을 떠나 언제 다시 들를지 기약이 없었고, 레카르도는 4대 가문의 월례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사흘간 로젠토에 머문다.
그러니 어른들이 있을 때 하기 어려운 것을 하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조금 위험한 일이라든지.
“……?”
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 * *
간수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에반의 손에서 푸른 불길이 일었다.
그러자 양 손목에 채워진 봉인의 수갑이 철컥 열렸다.
푼 수갑을 근처 탁자에 올려 둔 에반은 차가운 돌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벌써 한 달째, 윈체스터의 지하 감옥에 갇힌 채 햇볕을 보지 못했다.
그간 테일러스에서 보낸 첩자들이 종종 감옥에 들렀다.
이 건으로 베루스(월례 회의)에서 분위기를 반전할 계획이라며, 자해를 해서라도 몸을 약하게 만들라는 체노아 테일러스의 명이 있었다.
어쩌면 죽어 버리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인 체노아에게 제가 한낱 도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6회차였던가.
문득 에반은 며칠 전 다녀간 꼬맹이 하나를 떠올리고 입술을 비틀었다.
늘 같은 방향이었던 제국의 정세를 뒤틀어 버린 장본인이자, 감히 제 스퀘어를 침입한, 그리고 이번 회차에 발현치 않았던 청명까지 되살려 놓은 신비로운 능력의 소유자.
죽이려면 곧장 목을 비틀어 버릴 수도 있었다.
나가지 못해 이 감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능을 봉인하는 수갑을 차고 있었지만, 제 완력과 기술은 이능을 뛰어넘었으니까.
― 페르세토스에 갇혀 있구나.
게다가…….
“…….”
자신의 과거를 알고, 속을 꿰뚫는 그 목소리.
에반은 이마를 짚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 난 일곱 살이야.
짙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불쾌하지 않았다.
페르세토스가 제게 빙의해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목을 벤 이후, 살육에 대한 감각에 무덤덤해졌다.
노인과 아이가 죽어 가도 에반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꼬맹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 잠겨 있던 추가 덜컹였다.
무엇을 위해 회귀를 되풀이하고 있었던 걸까.
잊고 있던 색채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에반은 꽉 막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오기 잘한 건가.”
공허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에반의 차가운 푸른 눈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인물 열람]
[1. 레카르도 윈체스터
칭호: 흑염의 지배자
인과율: 18%]
[2. 진 윈체스터
칭호: 없음
인과율: 18%]
[3. 오셀로 윈체스터
칭호: 없음
인과율: 19%]
[4. 체노아 테일러스
칭호: 청명의 지배자
인과율: 해당 없음]
[5. 에반 테일러스
칭호 : 28회차 회귀자
인과율: 13%]
[6. 페르메티스 윈체스터
칭호: 없음
인과율: 해당 없음.]
[7. 헥토르 윈체스터
칭호: 흑염의 수호자
인과율: 해당 없음]
인과율이라는 게 대체로 친밀함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왜 친밀한 헥토르 할아버지에게는 ‘해당 없음’이 뜨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 일부만 ‘인물 열람’에 뜨는 것처럼 뭔가 이유가 있겠지.
아무튼 인과율이 높아지면 상대가 내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부탁도 더 잘 들어준다.
하지만 양날의 검처럼…… 내가 꾸었던 꿈의 맛보기 모드와 같은 안 좋은 결말이 있을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테일러스 저택에 간 오셀로의 인과율이 낮아지기는커녕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것.
게다가 지하 감옥에서 에반과 언쟁을 벌였음에도 그의 인과율이 대폭 상승했다.
“샤샤.”
아무튼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진의 인과율을 더 높이는 것을 감안할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저택을 더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었고, 내가 더 안전하기를 원했으니까.
“모든 곳에서 네 냄새가 나. 숨어도 소용없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몸을 수그리고 숨어 있었고, 진은 복도를 지나 다가오고 있었다.
진의 긴 그림자가 넘실대고 흑염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만을 위해 전시하고는 해.”
― 저와 숨바꼭질을 해 주시겠어요?!
애초에 내가 한 제안이었다.
내가 숨는 역할, 그리고 진이 찾는 역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어. 역시 그 중앙에는 네가 어울리겠다고.”
저벅, 저벅.
아니, 실감 나게 해 달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무섭게 연기할 필요는 없잖아.
“족쇄를 채울 거야. 작은 것들은 그래야 도망치지 않으니까.”
정말 살인마에게 쫓기는 기분이라 심장이 쫄깃했다.
나는 작은 발로 잽싸게 움직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의 모습도 귀엽지만 어른이 된 모습이 더 사랑스럽겠지.”
악당이 아니라 나중에 연극배우를 해도 될 것 같다.
아…… 근데, 이거 연기 맞아?
만약 진심이라면……?
생각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진을 피해 도망쳤다.
잡히면 박제된다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코너를 돌았을 때, 내가 기다리던 것이 보였다.
머리가 세 개인 검은 개.
도베르만을 닮은 그것은 흉측한 이를 드러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찾았어.’
그것은 내게 다가왔고, 나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언젠가 레카르도는 내게 이것을 보여 주며 경고했었다.
함부로 저택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말이다.
으르렁―
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도서관의 책에서 이 개에 대한 정보를 찾았었다.
개의 이름은 카테르, 오래된 마물을 훈련해 가문에서는 경비견으로 쓰고 있었다.
경비견답게 외부의 침입자들을 잘 물어뜯으며 평소에는 이공간에 숨어 대기한다.
주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며 쫓기고 있거나 겁에 질린 존재는 카테르에게 훌륭한 먹잇감으로 여겨진다.
커엉―
카테르는 주인 이외의 자에게는 상당한 적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고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아는 고용인들은 카테르를 부르는 행동들을 금기시한다.
이를테면 저택 안에서의 숨바꼭질이라든지.
으르렁―
세 개의 머리는 난폭한 눈으로 나를 노리고 있었다.
내 목을 어떻게 물어뜯을지 고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테르의 세 쌍의 눈이 희번덕였다.
으르렁― 커엉―!
이내 카테르가 내게 달려들려 도약했을 때 나는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검은 지배(SS/LV.4)’를 사용합니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카테르는 이를 드러낸 채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나를 찢어발기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카테르를 노려보았다.
카테르의 주인으로 인정받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복종시키는 것.
진과 오셀로는 둘 다 진작 해내서 자유롭게 저택을 다니지만, 나는 아직이었다.
카테르는 으르렁대며 이빨을 드러냈지만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분명 더 강해졌어.’
스킬 레벨이 오를수록 정신의 소모가 덜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할 수 있어.’
카테르의 힘은 잘 훈련받은 기사 하나의 힘과 필적한다고 했다.
내가 스킬 레벨이 1이었을 때 카이사에 지배받던 자객을 멈추었으니, 그보다 강해진 지금은 카테르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약간은 모험이기는 하지만, 나의 안전을 위해서 카테르를 확보할 필요가 있으니…….
“카테르!!”
나는 카테르를 보고 말했다.
“나는 샤샤 윈체스터, 레카르도 윈체스터의 딸이며.”
카테르가 씩씩대며 내 목을 물어뜯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점점 식은땀이 나며 힘이 달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너는 내게 복종한다!”
으르렁― 커엉―!
카테르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여기서 정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죽고 말겠지.
“나는 샤샤 윈체스터.”
다소 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결국 정신력 싸움이라면…….
커엉― 킹― 끼잉― 끼잉―
“너는 내게 복종한다!”
내가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