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3화
“간악한 윈체스터는 우리의 후계자 에반 테일러스를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있소. 더 이상 테일러스가 참아야 할 이유가 없소이다.”
네 가문의 가주들이 모인 원탁, 체노아 테일러스는 형형한 눈빛으로 맞은편의 레카르도 윈체스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룡의 힘 ‘수형’을 사용하는 헤일로가의 가주 바네사 헤일로.
그녀는 진한 청색의 칼단발과 하늘빛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키는 사내들만큼 컸다.
지룡의 힘 ‘지화’를 사용하는 아카다가의 가주 엘리시온 아카다.
반짝이는 금색의 장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탁월한 미형의 사내였으며, 위대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레카르도는 서늘한 눈빛으로 체노아에게 답했다.
“에반 테일러스는 내 딸의 방에 침입해 위협하려 한 것에 대한 정당한 벌을 받고 있을 뿐이다.”
“정당한 벌이라고? 가주가 되도 않는 혐의를 뒤집어씌운 게 아닌가!”
서슬 퍼런 체노아의 항의가 울려 퍼졌다.
레카르도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셀로에게 부당한 대우를 시작한 것은 테일러스가가 먼저다.”
“뭐라고?”
“오셀로과 함께 보낸 선생들이 모두 돌아왔더군. 외부의 사람을 받을 수 없다고 출입을 거부했다지.”
“하, 그중 윈체스터의 첩자가 몇이나 될 줄 알고 들여보낸단 말인가.”
“그럼 되묻지.”
레카르도 테일러스의 등 뒤에서 서늘한 흑염이 넘실거렸다.
“무슨 목적으로 내 딸의 방에 들어왔는지 입 한 번 열지 않는 에반 테일러스를 무슨 꿍꿍이가 있을 줄 알고 내 저택에 풀어 놓으라는 거지?”
체노아 테일러스의 뒤에서도 선명하고 강렬한 청명이 위협적으로 피어올랐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엘리시온 아카다가 강렬한 이능의 기운에 짓눌려 가는 대기를 정화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 두 사람 다, 소모적인 논쟁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
바네사 헤일로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리고 생각해 봐.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아이를 잠시 교환했는데, 이렇게 전쟁 직전까지 가다니…… 바람직하지 않잖아.”
그러나 레카르도도, 체노아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바네사 헤일로는 더욱 골이 깊어지고 있는 듯한 윈체스터와 테일러스의 문제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윈체스터 공작이 에반 테일러스를 가둔 것은 과한 처사라고 생각하지만, 의견이 일리는 있어. 샤샤의 방에 침입했다면 적어도 그 이유는 알아야겠지.”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다. 내 아들은 테일러스가의 후계자이고.”
체노아 테일러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두 아이의 경중이 다름을 말했다.
그는 샤샤 윈체스터에 대해 보고받았지만, 혈통을 포함해 특별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차갑게 입술을 비틀었다.
“그 어린 계집아이를 죽이기 위해, 카이사의 추종자들이 가문의 마차를 습격했었지.”
레카르도의 말은 체노아에게 쓰라린 패배를 떠올리게 했다.
소년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굴욕 말이다.
100년 전 가문의 선조 카이사가 저지른 짓은 모든 가문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서, 카이사의 저주가 발현한 그날 이후 테일러스의 입지는 현격히 좁아졌다.
“그 일과 이 일을 왜 연결 짓는 건가.”
“테일러스에게 두 번의 습격을 받았는데 연관 짓지 않을 이유가 없지.”
으득, 하고 체노아는 이를 갈았다.
“사실 저도 궁금한 부분입니다.”
한참을 잠자코 있던 엘리시온 아카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호기심 많은 보랏빛 눈동자로 레카르도에게 물었다.
“바네사 님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보았는데 참으로 경이롭더군요. 불과 두 살의 꼬마 아가씨가 보여 준 능력은 정말이지…….”
엘리시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특별하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로 카이사의 저주를 행하는 자들이 꼬마 아가씨를 습격하지 않았을까 궁금할 정도로요.”
체노아의 눈가가 움찔했다.
“…….”
“윈체스터 공작께서 허락한다면 꼬마 아가씨를 아카다로 모셔서 검사를 해 보는 것도…….”
엘리시온의 권유에 레카르도는 단호히 답했다.
“미친 마법사들의 실험 대상이 되게 할 생각은 없다.”
엘리시온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카다의 일원들은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뛰어난 이들이었지만, 다들 괴짜들이라는 면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지적 탐구심이 도덕성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인간들과 여기서 뭐 하는 짓이지’ 하고 중얼거리던 바네사는 입을 열었다.
“어쨌든 샤샤 윈체스터가 테일러스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동의해.”
그 말에 체노아 테일러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성을 냈다.
“바네사! 누가 누구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건가.”
“가문의 이야기가 아니야. 그 아이의 이야기이지. 카이사의 저주를 행하는 테일러스의 자들에게 습격받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야.”
바네사는 아장아장 걷던 샤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체노아 자네가 그들과의 연관성을 부인한다고 하지만, 에반 테일러스와도 아무 관계가 없는지는 확신할 수 없고 말이야. 그 애가 그렇게 입을 닫고 있는 한.”
“말도 안 되는!”
“내가 중재안을 제시할게.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 나가 보자고.”
모두의 시선이 바네사 헤일로에게 향했다.
체노아 테일러스는 얼굴이 붉어진 채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바늘로 찔러도 안 들어갈 정도의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가문 간의 갈등이 있을 때 헤일로는 언제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바네사 헤일로가 내놓은 중재안이 그럴듯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네? 에반을 풀어 준다고요?”
나는 멍한 얼굴로 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에반이 날 죽이겠다고 했던 말이 아직 뇌리에 떠돈다.
그러나 레카르도는 서늘한 모습으로 고기를 썰 뿐이었다.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 진은 진중히 제 의견을 말했다.
“베루스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하지만 또 샤샤를 위협하면.”
“……죽는다.”
레카르도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지만, 그 파장은 가슴속에 크게 전해져 왔다.
죽는다고? 하지만…….
레카르도는 말을 이었다.
“엘리시온 아카다가 적당한 물건을 주더군.”
4대 가문 중 하나인 아카다의 가주 엘리시온 아카다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 있다.
원작에서 그들은 테일러스가와 매우 호의적인 관계로 나왔었다.
엘리시온 아카다의 조카인 카실리온은 장차 마법사들의 수장인 마탑주가 될 인물이었고, 그는 에반 테일러스의 동료가 되기도 한다.
“적당한 물건이라면…….”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고, 발에 족쇄를 단 에반 테일러스가 양팔을 병사들에게 붙잡힌 채 끌려왔다.
아무리 적대 가문의 볼모이자 날 습격한 혐의를 갖고 있지만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있고, 에반의 몰골은 영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에반의 표정은 지나치게 무표정했다.
회귀자임을 알고 난 지금에야 설명이 되는 얼굴이라고 할까.
에반 테일러스의 뒤를 따라 들어온 로웬이, 반지 하나를 들고 에반의 손을 잡더니 에반의 약지에 그것을 끼웠다.
그러고는 에반의 이능을 봉인하는 손목의 구속구를 풀어 주었다.
눈썹을 꿈틀하는 얼굴로 보아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잠시 뒤 로웬은 다른 반지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
진이 검은 흑염을 일렁이며 로웬이 하려는 짓을 경계했지만 레카르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어라.”
로웬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잠시 손 좀…….”
나는 에반을 쳐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의 얼굴을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레카르도는 이 와중에도 태연히 식사를 하고 있었고, 나는 결국 로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웬은 아까 에반에게 건넨 것과 비슷한 반지를 내게 끼웠다.
내 약지에 들어간 그것은 조금 컸는데, 몇 초 뒤 옅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
놀랍게 에반의 반지에서도 공명하듯 빛이 나고 있었다.
잠시 후 반지는 내 손가락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에반의 표정을 보니 에반의 반지도 손가락 크기에 맞게 줄어든 듯했다.
로웬은 과정을 마치고는 어떠한 설명도 없이 물러났다.
이제 이곳에는 레카르도와 진, 그리고 나…… 에반과 그의 양팔을 잡은 병사 둘만 남았다.
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에반을 응시했다.
“에반 테일러스.”
그리고 그때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깨를 움찔하고 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짙은 암녹빛의 시선이 에반을 향하고 있었다.
“…….”
에반은 레카르도의 부름에 입을 열지 않았다.
하등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레카르도가 입술을 조금 비틀었다.
“샤샤가 죽으면.”
레카르도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등이 뻣뻣해졌다.
에반의 눈썹이 조금 움직인 것도 같다.
레카르도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너도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