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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54화 (54/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4화

에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설마…….”

진은 레카르도에게 물었다.

“리소니아입니까?”

“그렇다.”

도서관에서 읽은 적 있었다.

땅의 아카다 가문은 ‘마법’이라 불리는 지화의 이능을 주로 사용한다.

그들은 청명이나 흑염처럼 위력적인 힘을 내지는 않지만 특별한 약물과 발명품 등으로 제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쟁으로 얻은 노예를 길들이기 위해 쓰는 ‘리소니아’였다.

한 사람이 쉽게 다른 사람을 배반하지 못하도록 강제력을 행사하는 도구.

쉽게 말하자면 내가 죽으면 에반도 죽는다.

에반은 나와 수명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

나는 내 약지에 꼭 맞추어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에반 테일러스를 지하 감옥에서 석방하는 대신, 리소니아를 착용시켜 살인과 적의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월례 회의에서 역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해도, 볼모이자 후계자를 수감해 놓으니 테일러스에서도 불만을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의 저주를 행하는 자가 나를 공격한 일도 있었고, 에반이 내게 위협을 가하려다 발각되었으니 다른 가문들에서도 나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체노아 테일러스는 아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동의했겠지.

이제 에반 테일러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테일러스 가문은 나의 안전에 협조해야 한다.

물론 리소니아에도 한계는 있다. 저주에 가까운 강렬한 마법이 들어가는 만큼, 효력은 길어야 3년 정도.

“네가 죽으면.”

에반은 날 보며 말했다.

일순간 에반의 손에서 청명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청명이 내 앞에 도달할 때까지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도 끝난다는 거군.”

가시같이 뾰족한 청명은 내 이마 앞에서 멈추었다.

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감히.”

에반의 목 역시, 진에게서 나온 흑염의 날에 둘러싸여 있었다.

“…….”

에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내 반응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입 모양으로 말했다.

‘또 회귀할 생각이야?’

내 말을 알아챈 에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잠깐 미소 지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식사 예절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겠군.”

레카르도는 태연한 얼굴로 식사를 계속하다가 에반을 향해 눈썹을 찡그렸다.

잠시 후 나를 위협하던 청명이 사라졌다.

“진, 너도 마찬가지다.”

레카르도의 말에 진 역시 에반을 향한 위협을 풀었다.

나는 에반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지하 감옥에서의 그는 나를 죽이는 것이 좋은 선택이 될 거라고 했었지.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 생각을 바꾼 것 같다.

꼭 리소니아 때문일까. 내가 진짜 페르세토스라 확신하지만 같이 죽기는 싫어서.

‘아니. 뭔가 오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어.’

혹시 내가 적이 아니라는, 생각의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은?

표정을 봐서는 알 수가 없다.

“…….”

서늘해진 표정의 진은 냅킨을 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식기를 들었다.

식사를 마친 레카르도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달각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옷깃을 정리하며 에반을 응시했다.

“……네 부친과는 다른 느낌이군.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어.”

잠시 후 레카르도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내 레카르도는 에반을 지나치며 말했다.

“그렇더라도 앞으로는 잘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윈체스터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말이지.”

레카르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에반의 볼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미 엉망이 되어 버린 식사 자리였다.

나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에반 테일러스를 바라보았다.

“…….”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한편 레카르도가 나간 뒤의 진은 서늘한 분노를 더 이상 자제하지 않았다.

“불쾌한 느낌의 청명이야.”

“…….”

“청명은 늘 불쾌하기는 하지만 네 기운은 특히 그래.”

진의 목소리에 에반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진을 바라보았다.

“버릇을 고쳐 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아쉽군.”

진의 암녹빛 눈동자에는 흑염이 넘실거렸고, 에반의 입술이 비틀리는 순간 나는 입을 열었다.

“그만요, 오라버니.”

맛있는 음식을 앞두고 저녁 식사를 더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에반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에반에게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싸워서 좋을 거 없잖아.”

그리고 당장이라도 에반을 흑염의 제물이 되게 하고픈 듯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던 진에게도 한마디 했다.

“테이블이랑 창문만 다 부서지죠.”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능, 놀라운 것을 떠나 이제는 징글징글할 정도다.

두 이능을 충돌하게 해서 굳이 이곳의 집기들을 다 부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밥이나 먹죠. 배고프잖아.”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썰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에반의 눈썹이 꿈들 움직였다.

“……전에 봤던 모습보다 낯빛이 좋군.”

좋은 뜻 맞아?

나는 냠, 하고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는 딸랑딸랑 종을 울렸다.

곧이어 들어온 하녀에게 말했다.

“한 사람 분의 식사, 더 준비해 줘.”

긴 시간 지하 감옥에서 마른 빵만 먹은지라, 에반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앙상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우린 한배를 탔어, 에반 테일러스.”

나는 에반을 보며 우정링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약지의 반지를 보여 주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일어나서 에반을 상대했던 진은, 김이 빠진 듯 입술을 비틀며 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저 꼬맹이를 죽여도 네게는 해가 되지 않으니 몸을 풀어 볼 겸 했는데.”

진이 말은 이렇게 해도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가혹히 대하겠지. 정치적 문제를 고려할 테니.

에반 역시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으니 자신이 바라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곧이어 하녀가 1인분의 식사를 더 가져왔다.

“식사는 잔뜩 있어.”

“……피곤하군, 쉬겠다.”

그의 입술이 잠시 비틀렸던 것 같기도 하다.

문을 나서자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이 닫혔다.

“윈체스터에 온 것을 환영해.”

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와인 잔에 든 음료를 마신 진이 잔을 내려놓았다.

암녹색의 눈동자에는 짙은 어둠이 담겨 있었다.

* * *

에반 테일러스가 스퀘어에 들어간 것은 거의 두 달 만이었다.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온 뒤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꽤 멀쩡한 모습이었다.

윈체스터의 고문관들이 채찍질을 해 댔던 적도 있지만, 청명을 사용하자 몸은 금세 생채기 하나 없는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적 없는 일을 겪은 에반은 꽤 피곤한 얼굴로 스퀘어에 들어섰다.

거추장스러운 반지를 보니, 태연하게 고기를 입에 넣는 꼬맹이의 얼굴이 떠올라 어쩐지 오묘한 기분이 든다.

터무니없는 그 온기는 뭘까.

스물여덟 번째 회귀.

다르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갔던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물론 아직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

샤샤 윈체스터가 시류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있다고는 하나 그 혈통은 어둠의 윈체스터, 악인의 것이니.

“……원하든, 원치 않든.”

꼬르륵―

생각하던 그 순간 배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하 감옥에서 막 나왔기에 제대로 먹은 음식이 없었다.

소년의 몸으로는 허기를 해결해야 하는 것조차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내일 아침부터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퀘어로 들어온 에반은 책상 가까이에서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가 아까 그대로 두고 나온 고기 접시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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