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5화
[인물 열람]
[1. 레카르도 윈체스터
칭호: 흑염의 지배자
인과율: 19%]
[2. 진 윈체스터
인과율: 20%]
[3. 오셀로 윈체스터
인과율: 20%]
[4. 체노아 테일러스
칭호: 청명의 지배자
인과율: 해당 없음]
[5. 에반 테일러스
칭호 : 28회차 회귀자
인과율 16%]
[6. 페르메티스 윈체스터
칭호: 없음
인과율: 해당 없음]
[7. 헥토르 윈체스터
칭호: 흑염의 수호자
인과율: 해당 없음]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인물 열람 창을 보았다.
뭘 했다고 에반의 인과율이 3이나 올랐을까.
인과율이 꽉 차면 좋지 않은 엔딩을 맞는다고 알고 있다.
진과의 엔딩에서는 진에 의해 감금되었고, 에반과의 엔딩에서는…… 죽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생각해 볼 문제가 따로 있었다.
두 엔딩 다 결말이 끔찍했던 이유는 세계 종말이라는 결말이 바뀌지 않아서이겠지?
운명대로 페르세토스가 다시 부활한다면 인과율이고 뭐고 그다지 내 끝은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페르세토스의 부활을 막는다면.
인과율이 끝에 도달하더라도 엔딩이 조금 더 아름답지 않을까?
아무튼 엘릭서 다음의 목표는 페르세토스 찾기니까.
페르세토스가 깨어나는 시기는 늘 동일하게 에반이 스물 다섯, 내가 스물이 되는 지점이니까…… 아직 많이 남았다.
시간은 충분해.
마음을 다잡은 나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아직 에반과 나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에반은 나를 죽이고 회귀하는 것은 피하려는 듯 보이고, 비공식적인 자리더라도 그 행동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모습 그대로 동업자로서의 라포를 형성하는 게 좋겠다.
방금 챙겨 줬던 고기는 잘 먹었으려나.
“아가씨.”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마야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공자님께서 주신 향을 피워 드릴게요.”
잠시 후 방에 들어온 그녀가 캔들에 불을 붙이고 농축액을 떨어뜨렸다.
진은 며칠 전 내게 ‘엘릭시아’라는 향을 구해 주었다.
― 건강에 도움이 될 거다.
일전에 말했던 건강 증진 효과가 있는 약재인 것 같다.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엘릭시아를 밤마다 맡고 잔 이후로는 아침에 일어날 때 컨디션이 훨씬 가뿐하다.
원작에서의 샤샤 윈체스터가 적절한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그저 가족 중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구절을 떠올릴 때, 아마 1회차…… 그러니까 원작에서의 샤샤는 엘릭시아 같은 유용한 케어도 받지 못했겠지.
나는 침대에 누워 어둑한 밤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약육강식의 윈체스터 가문.
나는 이제 원작 속의 가여운 샤샤 윈체스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우와 관심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는 과신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 스스로 강해지고 단단해지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전설 등급 운명 ‘메키우스의 열쇠’가 당신의 영혼을 밝게 빛냅니다.]
* * *
에반이 풀려난 지 사흘 정도 되는 날.
그날 저녁도 일전에 헥토르에게 배웠던 것을 복습하고,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떡해, 이러다 큰일 나겠어.”
하녀들의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책을 덮고 바깥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아, 아가씨.”
마야의 뒤에 선 하녀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 있어?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만 들어가셔서 주무시죠.”
“마야, 잠시 비켜 있어.”
마야는 나를 들어가게 하려 했지만 나는 하녀들의 말을 듣고자 했다.
“그…… 그것이, 제 쌍둥이 동생이 손님 대접을 잘못해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윈체스터 저택에 손님이 드나드는 일은 흔하다.
다른 공작가의 귀족들부터 혈족들까지.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 시기는…….
“가 보자.”
나는 발을 옮겼고 하녀들이 뒤따랐다.
도착한 곳은 3층 복도.
하녀들 셋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셋 다 얼굴의 뺨 부분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그 앞에는 페르메티스가 서 있었다.
예상을 깨지 않은 페르메티스의 모습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바쉬론과 페르메티스가 이쯤 방문하기로 했었다.
“남의 집에서 무슨 소란이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열두 살의 페르메티스는 어린 시절보다 아름다워졌지만, 눈에 표독함이 어려 있었다.
제스티아와 점점 닮게 커 가는 모습은 신기할 정도이다.
“하녀들이 예의 없이 행동하기에 버릇을 잡아 주고 있었어. 교육인 셈이지.”
바쉬론의 세력은 아피니제가 존재할 때보다 쇠퇴했지만 여전히 건재했다.
혈연상 8촌인 페르메티스는 자라 가며 진의 약혼 상대로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그녀의 콧대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부분이 예의 없었는지 설명해 줄래?”
내 말에 페르메티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를 않나, 찻물을 출렁이게 따르고, 침구까지 비뚤어졌지 뭐야.”
페르메티스의 말에 나는 그녀가 그냥 트집 잡고 싶어서 이 난리를 벌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득 아까 하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 아가씨가 진 공자님께 선물로 드린 검 장식을 전해 드리러 가는 길에, 페르메티스 님을 만나서…… 그게 뭐냐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 드렸거든요.
내게 엘릭시아를 제공해 주는 진을 위해, 모은 용돈으로 장인까지 불러 검 장식 하나를 주문했다.
한동안 임무로 바쁜 진을 보기 힘들어 하녀를 통해 진의 방에 놓아두고 오라고 했는데.
원인은 따로 있었고, 이건 분풀이일 뿐이었다.
“하아…….”
어차피 하녀들이야, 귀족들이 분풀이로 쓰겠다고 해도 저항할 방도가 없었다.
내 전속 하녀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으니 그녀의 쌍둥이에게 분풀이하려고 트집을 잡은 것이다.
“지금 윈체스터 공작가의 하인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거야?”
나는 페르메티스를 보고 똑바로 물었다.
‘윈체스터’를 운운하자 페르메티스가 움찔했다.
“모두의 교육이 잘못되지는 않았겠지만, 이것들은 윈체스터의 혈족인 나를 모욕했어.”
“모욕으로는 들리지 않는데. 트집이라면 몰라도.”
“뭐야?”
페르메티스의 눈빛이 바뀌었지만 내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엄연히 나는 직계이고 공녀니까.
제아무리 자신이 진과의 결혼을 꿈꾸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한낱 객식구가 공작가에서 되도 않는 트집을 잡아 소란을 피우는 게 잘 배운 버릇 같지는 않은데.”
“너! 조그만…….”
조그만 게, 하려다가 페르메티스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정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아버지를 불러 여쭤보는 게 어떨까?”
내 말에 페르메티스는 주먹을 움찔했다.
그것은 지금 그녀가 바라지 않는 방향 1순위일 것이다.
“…….”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페르메티스에게 말했다.
“사과해.”
그러자 페르메티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뭐?”
“이 아이들에게 사과하라고.”
내 말에 하녀들조차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귀족이 하녀에게 사과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약육강식의 윈체스터 가풍에서, 약한 것들은 사람 취급이나 받으면 다행일 테니까.
그런데 윈체스터의 피가 흐르는 페르메티스에게 자신이 때린 하녀들에게 사과하라고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사과하지 않으면 윈체스터의 하녀 교육을 운운하며 가문을 모욕하고, 질투에 눈멀어 소란을 벌인 너에 대해 아버지께 보고할 거야. 그리고…… 대가주님께도.”
‘질투’라는 말을 할 때 일부러 나는 나를 여기로 안내한 쌍둥이 하녀를 바라보았다.
페르메티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
정곡을 찔렸을 것이다.
그리고 ‘대가주’.
나는 이미 아기 때부터 가문에서 대가주의 비호를 받고 있는 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대가주가 나를 교육하고자 몇 년을 머물렀다는 일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다른 4대 가문으로도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진 상태.
대가주는 혈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니 페르메티스의 평판이 나빠진다면 장차 오빠들 중 하나와 결혼하겠다는 계획도 차질이 생기겠지.
“……미…….”
결국 손을 바들바들 떨던 페르메티스가 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뺨을 맞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하녀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페르메티스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페르메티스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영역에서 앞뒤 분간 않고 날뛰게 둘 수는 없는 일.
“일어나.”
나는 페르메티스를 두고 하녀들을 일어서게 했다.
그리고 페르메티스를 싸늘한 시선으로 한번 바라보고 하녀들과 자리를 떴다.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걷고 있는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하녀들이 울고 있었다.
“왜? 아직도 아파? 의사를 부르는 게 낫겠어.”
“흑…… 아니에요, 아가씨. 그냥 저희는…….”
“아가씨이…… 훌쩍…… 흑…….”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희를 위해 무서운 페르메티스 아가씨를 혼내 주시다니…….”
“아가씨는 너무 따뜻한 분이세요. 흑…… 흑…… 따뜻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가씨…… 흑…… 흑…….”
하녀들은 어린애들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행동한 것인데 어지간히도 감격이었나 보다.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어요.”
“목숨…… 아니, 목숨보다 더한 것도 바칠게요…….”
“심장을 꺼내 바칠 수도 있어요.”
“아냐, 그런 거 필요 없어.”
급기야 내 발치에 매달릴 기세인 하녀들을 말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착각인가? ……청명의 기운이…….’
이내 내 생각은 하녀들의 주책에 묻혀 버렸다.
“아가씨, 대가주님도 떠나셨으니 이제 마음껏 휴식의 시간을 보내시는 게 어떠세요?”
“제 사촌이 로젠토에서 가장 유명한 드레스 디자이너예요.”
“아가씨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디저트들을 만들 준비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