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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56화 (56/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6화

오후 시간, 집무실에서 서류를 읽고 있던 레카르도는 바깥의 기척에 눈썹을 꿈틀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로웬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공작 전하, 바깥에 바쉬론 남작께서…….”

레카르도는 영 귀찮은 표정으로 명령했다.

“들어오게 하라.”

잠시 후 로웬이 나가고 한 남자와 여자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레카르도의 백부인 바쉬론 남작은 여전히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리고 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페르메티스가 치마를 살짝 올리며 귀엽게 인사했다.

“무슨 일입니까.”

레카르도는 응대용 소파의 상석에 천천히 앉으며 물었다.

영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에 바쉬론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집무실의 장식이 죄다 번쩍번쩍하군. 누구는 노예들이 몽땅 도망가서 그 빚을 갚느라 정신없는데,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니까.”

“본론이나 말했으면 하는데요.”

레카르도의 말에 바쉬론이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커흠. 말본새 하고는…….”

지위도, 작위도 레카르도보다 낮았지만 그는 엄연히 레카르도의 백부였다.

비록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모토인 가문이라지만 지난번 샤샤를 납치하다시피 했던 때처럼, 도를 넘어서는 짓만 아니면 레카르도도 바쉬론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입을 하나 덜려 한다. 제스티아도 죽은 와중 더 떠맡기도 곤란하고.”

레카르도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

“페르메티스를 당분간 맡겼으면 한다.”

방계의 아이들이 본가에서 교육을 받거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본가에서 거두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윈체스터로서의 긍지와 충성심을 북돋고,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후계자의 좋은 지지대가 된다.

레카르도의 대에 이르러, 가주에 반발하는 방계 일족이 늘며 아이를 보내지 않는 식으로 경계심을 표출하고 있었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가주님.”

그들이 페르메티스의 교육을 위탁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쉬론이 페르메티스를 맡긴다는 것은, 다른 방계의 일족에도 영향을 끼쳐 가주 레카르도의 영향력 확대에 좋은 일이었다.

더욱이 페르메티스가 차기 후계자의 신붓감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 같은 시기에는.

레카르도는 페르메티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페르메티스는 붉은 눈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레카르도를 보았다.

‘언젠가 이 집의 안주인이 되면, 어제의 모욕은 필히 갚겠다, 샤샤 윈체스터.’

아직도 치가 떨릴 정도였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 참아낸 순간이었다.

약혼에 대한 여론에 레카르도는 아들들을 약혼시킬 생각 없다고 답했지만, 위탁 교육을 계기로 슬슬 단계를 밟아 가면 된다.

“유감이지만 대가주는 떠났습니다만.”

바쉬론이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그 부분이 영 아쉽더군.”

샤샤를 가르치는 기간 동안 헥토르는 꽤 흐뭇해했었다.

바쉬론은 페르메티스를 달래듯 말했다.

“네가 오는 걸 알았다면 가르칠 보람이 있으셔서 더 오래 계셨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지.”

당초에 몇 달 있기로 했던 헥토르가 수년간 머물렀던 이유가 뻔히 알려졌는데도, 바쉬론은 샤샤에 대해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기량이 비교되면 좋을 것 없으니까.

“그래도 본가에는 꽤 괜찮은 선생들이 있다. 진도 있으니 제법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다.”

잠시 망설이던 페르메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페리,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페르메티스는 레카르도를 보며 말했다.

“샤샤에게도 페리가 아는 것들을 알려 주고 싶어요. 오셀로 오라버니가 떠나고 외로운 샤샤의 마음도 위로해 주고요.”

바쉬론은 피식 미소 지으며 레카르도에게 말했다.

“페르메티스나 샤샤나 결국 후계의 밑받침이 될 아이들.”

“…….”

“뭐 종래의 위치는 조금 다르겠지만, 가까워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종래의 위치’란 페르메티스를 진의 부인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진이 후계가 되면 이복동생인 샤샤는 페르메티스의 아랫사람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우스운 일이군.”

듣고 있던 레카르도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바쉬론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아이에게 심연의 그림자를 사용하려 했던 백부께서…….”

페르메티스의 웃는 낯빛이 점점 굳어졌다.

“당신의 아이를 내 집에 맡긴다라.”

“모두 지난 일이 아닌가. 샤샤 윈체스터가 신변의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아이라는 것은 이제 알고 있네. 에반 테일러스와 리소니아를 끼웠다지.”

바쉬론은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수습하며 말했다.

“우리가 비록 자네를 경계하기는 하였으나, 테일러스와의 전쟁은 바라지 않네.”

페르메티스는 긴장한 얼굴로 레카르도를 보았다.

제기랄, 샤샤. 망할 샤샤.

정식 부인도 되지 못한 여자의 딸인 약해빠진 그 계집애가 레카르도나 진, 오셀로에게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로 대접받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윈체스터 역사상 아무리 직계라 해도 사생아에 몸이 약한 아이들은 도태되기 마련이었는데.

‘직계와의 관계가 점점 좋아지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테일러스가의 에반이라도 구슬려 공을 세워 봐?’

“로웬.”

레카르도는 문밖의 로웬을 불렀다.

그러자 로웬이 들었다.

“예, 공작 전하.”

“저택에 남은 방이 있는가.”

그 말에 바쉬론은 눈썹 끝을 올렸다.

윈체스터 대저택에 빈방이 있냐고 묻는 것은 완전한 말장난이었다.

“2층과 3층은 수리 중인 곳이 많아서 불가하고, 동쪽 별관에 여러 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말에 바쉬론은 노한 눈으로 로웬을 보았다.

동쪽 별관은 하녀와 하인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장소였다.

“자네…….”

“듣기로 간밤에 하녀들과 꽤 친해졌다던데 문제는 없겠군.”

레카르도는 서늘한 눈빛으로 페르메티스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페르메티스는 흠칫했다.

“추태를 보일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지.”

페르메티스는 움찔 제 속이 관통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제의 일을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잊고 싶었던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냐, 페리.”

바쉬론의 물음에 페르메티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페르메티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고작 하녀 몇 조용히 교육하려던 것 때문에 가주에게 이런 모욕을 받는다고?

“아는 얼굴들이 있으니 적적하지는 않을 테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해도 된다.”

뭐라 반박할 수 있을 리 없다.

“페리,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

차가운 눈빛의 레카르도를 보며 페르메티스는 생각했다.

지독한 거절의 빛이라고.

“별관에 머무르겠느냐.”

레카르도의 짙은 녹색 눈 안에 사는 괴물이 자신을 금방이라도 잡아 죽일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의지를 잠시 꺾고 몸을 움츠렸다.

바쉬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노를 갈무리하지 못한 흑염이 넘실댔지만 레카르도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이의 마음이 바뀐 것 같군요.”

“후회하게 될 걸세.”

분을 내며 바쉬론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하얗게 질린 페르메티스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어 섰다.

집무실 몇 미터 앞, 제 몸만 한 서류철을 든 샤샤 윈체스터가 흠칫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움츠러들었던 페르메티스의 억누르던 분노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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