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7화
뚜벅, 뚜벅, 페르메티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또 보네.”
나는 페르메티스의 사나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안녕, 샤샤.”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대답지 않자 바쉬론이 뒤에서 혀를 차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 아비를 쏙 닮았군.”
그들이 레카르도의 집무실에서 나온 것을 보면 레카르도를 만나고 오는 길일까.
바쉬론의 얼굴이 영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레카르도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수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새를 못 참고 어제의 일을 다 일러바치니 속이 시원한가 봐, 샤샤.”
페르메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의 일을 일러바쳤다고? 그런 적 없는데.
“대답이 없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걸까, 아니면…….”
페르메티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귀가 잘 안 들리는지도 모르겠네.”
이내 페르메티스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만 들리도록 작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기고만장해하지 마, 샤샤.”
내게 썩 자극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침드라마만 봐도 그보다 독하고 잔인한 말을 하는 악녀는 많았으니까.
“언젠가 다 빼앗기고 나서는 이 순간이 부끄러워질 테니까.”
“그래?”
그리고 나는 페르메티스 같은 유형을 상대하는 법을 알았다.
이런 애들은 자기가 희대의 악녀 팜프파탈이라고 생각한다니까.
“네가?”
경멸 가득한 내 표정에 페르메티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얘는 나에 대한 질투로 돌아 버린 모양이지만, 나는 얘한테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뭐?”
“뺏을 방법이나 있어?”
페르세토스가 부활할 즈음 병으로 죽어 가게 될 내 운명도 개척해야 하고, 세상 멸망도 막아야 한다.
그런 중대사에 비하면 페르메티스는 금방 밟는 게 이득인 쭉정이일 뿐.
“네가 나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잖아.”
나의 되물음에 페르메티스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참, 어제 하려다가 잊은 말이 있는데, 진 오라버니는 너 싫어해. 너같이 고약한 애랑 결혼하느니.”
나는 팔짱을 끼고 페르메티스에게 속삭였다.
“로빈이랑 결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걸.”
미안해, 로빈.
“너…… 너…….”
페르메티스의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비틀며 썩은 미소를 날렸다.
“오셀로도 너보다는…….”
그리고 미처 말이 끝나기 전에 페르메티스가 위로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찾아들었지만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에반이 서 있었다.
나보다는 한참 키가 크고, 페르메티스보다도 키가 큰 에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페르메티스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에반 테일러스……?”
원작 속 페르메티스가 좋아했던 남자 주인공, 에반.
역사적인 순간의 만남, 나는 불청객처럼 껴 있었다.
페르메티스의 시점으로 그려져 설레던 둘의 첫 순간을 거창하게 망치며 말이다.
“……너는…….”
무료한 듯한 에반의 목소리가 페르메티스의 말을 끊었다.
“이 애가 잘못되면 내가 곤란해지거든.”
페르메티스의 시선이 에반의 손으로 향했다.
에반의 손가락에는 리소니아가 끼워져 있었다.
나와의 공명을 상징하는 반지.
“그러니까, 꺼져.”
에반의 입술이 사납게 움직였다.
이내 발현하는 매서운 살기.
“너……!”
그 말에 바쉬론이 눈을 부릅뜨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에반 테일러스는 테일러스의 후계이자 맞교환한 볼모.
직계도 아닌 그가 손을 볼 수 있는 범위 외였다.
“페르메티스, 가자.”
얼굴이 굳은 페르메티스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두고 봐.”
그녀의 시선이 에반을 향했다. 명백히 적대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잠시 후 페르메티스는 나를 스쳐 갔다.
싸늘한 표정의 바쉬론도 우리를 지나쳤다.
잠시 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반을 돌아보았다.
“고맙긴 하지만, 이번엔 나서 주지 않았어도 됐는데.”
내 말에 에반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쟤가 한 대 때리면 쫓아내려고 했거든.”
페르메티스가 왜 오늘 방문했는지는 로빈에게 들은 바 있다.
적어도 당분간은 레카르도가 위탁 교육을 거절할 거라고 했었다.
나는 페르메티스가 열 받은 참에 한번 밟아 줄까 생각 중이었고.
페르메티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공격한다면 할리우드식 죽는시늉을 할 생각이었고. 레카르도는 직계에 대한 위협을 용납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에반이 끼어들며 계획이 어그러졌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에반은 이상한 생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이었다고.
“너…….”
지하 감옥에서 막 나왔던 몰골과는 달리 에반의 지금 모습은 꽤 말짱했다. 남주인공이니 잘생긴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고.
표정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그게 일곱 살이 할 생각인가?”
에반의 물음에 가슴이 뜨끔했다.
“바쁘니까 가 볼게.”
그를 밀어내고 나는 태연히 뒤돌아섰다.
잔뜩 찔린 나는 재빨리 걸어 레카르도의 집무실로 쏙 들어갔다.
방금 에반의 입꼬리가 피식 비틀렸던 것 같기도 하고.
* * *
“……왔더냐.”
레카르도가 건조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 더미를 낑낑대며 책상에 올리려 했고, 뒤에 있던 로웬이 와서 나를 도와주었다.
“혹시 아버지, 페리에게…….”
물으려다가 나는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다.
레카르도가 어떻게 알았건 내가 잘못한 부분은 없었으니.
내 속을 알아챈 듯 입술을 살짝 비튼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져온 것은 뭐지?”
“헥토르 할아버지가 편지를 주셨어요.”
헥토르 윈체스터는 아카다의 오빈 산맥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했는데, 테일러스의 정세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이런 기밀 내용은 레카르도에게 따로 보내도 될 텐데, 한꺼번에 내게 주다니.
“…….”
종이를 읽던 레카르도는 잠시 뒤 그것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레카르도의 속내는 읽기 어려웠다.
그는 어지간해서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표정은 전혀 재미있지 않아 보이는데.
이상한 일들이 제국에 심심치 않게 출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역시 저번의 습격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카이사는 시작이었던 것뿐인가.
잠시 후 레카르도가 내게 물었다.
“오셀로에게서 별다른 연락은 없나?”
나한테 물은 거 맞지? 잠시 멍하니 레카르도를 올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지는 않았다.
오셀로가 책상에 앉아서 편지를 쓰다니……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기도 하고.
편지의 내용도 분명 꼬맹이니 뭐니 나를 놀리는 것일 뿐일 텐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내 반응에 레카르도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셀로가 루네를 보내온 것으로 아는데.”
루네? 그게 뭐지? 들어 본 적 없었다.
내가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카르도를 바라보자 레카르도의 입술이 피식 비틀렸다.
“그래, 그 녀석이 친절히 설명하고 떠났을 리가 없지.”
잠시 후 레카르도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이만 나가 봐라.”
레카르도의 말에 나는 예법대로 인사를 하고 돌아 나갔다.
로웬이 친절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 * *
― 퓨리의 가게 말이야, 산적들이 길을 막아서 반죽에 쓸 곡물을 구하지 못했대. 오트밀 쿠키를 먹고 싶었는데…….
오셀로가 준 곰돌이에게 푸념을 했던 다음 날, 산적들이 소탕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덕분에 마야는 퓨리의 쿠키 가게에서 오트밀 쿠키를 사 올 수 있었고.
― 에휴…… 보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 진 오라버니 개인 교사가 아가씨는 그런 거 보는 거 아니래! 헥토르 할아버지만 있었어도!
도서관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책을 보려는데 진의 개인 교사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보지 못했다고 투덜댄 다음 날, 그는 근무를 하지 못했다.
캐모마일 알러지가 있는 그가 하루 종일 재채기를 하게 된 것이다.
하루 일과에 특별한 일이 있으면 침대에 놓인 곰돌이에게 한두 마디 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는데…… 그게 루네였다니.
“말도 안 돼!”
루네는 단방향 소통이 가능한 한 쌍의 마석이었다.
레카르도는 오셀로가 보내는 쪽, 내가 받는 쪽을 가지리라고 예상했지만 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내가 하는 푸념을 오셀로가 다 듣고 있었다.
“모르셨…… 어요?”
마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수백 년 전에 전쟁을 나서는 남편들이 아내를 감시하는 용으로…… 사용되다가 부인들의 반발에 루네가 생산 중단되었죠. 못난 남자를 지칭하는 ‘코루네’라는 표현이 여기서 파생되었는데…….”
“…….”
“지금은 연인이나 가족 간에 사랑의 징표로 주고받기도 해요. 유행은 돌고 돈다죠.”
그러니까 그런 걸 왜 나한테 준 건데.
나는 내가 곰돌이에 대고 중얼거렸던 흑역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두 눈을 가렸다.
“다 들었겠지?”
“주변의 잡음은 전달되지 않아요. 루네에 대고 말한 것만 상대에게 전달되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런 건 제대로 말해 줬어야지! 나쁜 오셀로!”
나는 뿌, 하고 성질을 내며 말했다.
오셀로가 곰돌이와 함께 보낸 쪽지가 그런 의미였을 줄이야.
나는 미심쩍은 눈길로 침대 위의 루네를 바라보았다.
정말…… 내가 했던 말을 다 들었던 걸까.
그렇다면 설마 페르세토스의 멸망이나 에반에 대한 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