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59화
회귀한 에반 테일러스는 진을 납치했다.
그리고 진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직 죄 없는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가책이 가득했지만, 결국 제가 해야 할 일을 실행했다.
진은 허무하게 죽었고 에반은 과업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다시 그 시기가 오자 페르세토스는 레카르도의 몸에서 부활했다.
다시 세상에 종말이 오고 시간은 반복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회차, 에반 테일러스는 윈체스터가의 모든 이들을 죽였다.
샤샤 윈체스터가 죽여 달라고 부탁하자, 이번에는 그 청을 들어주었다.
― 고마워요.
세 번의 회귀였음에도 레카르도는 쉽지 않았다.
에반은 제 팔을 하나 잃고, 레카르도를 죽이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제 이복동생의 몸에서 페르세토스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둠이 채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4회차, 5회차, 6회차.
에반 테일러스는 다시 회귀했고, 페르세토스에 의한 종말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페르세토스의 부활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페르세토스가 숙주로 삼고 있는 인간을 종말의 시간이 되기 전에 찾아 없애는 것뿐.
하지만 어김없이 시간이 되면 페르세토스는 예상치 못한 사람의 몸에서 깨어났다.
누구의 몸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최후의 순간이 되기까지 말이다.
6회차의 페르세토스는, 에반이 가장 신뢰하던 마탑주 카실리온의 몸에서 부활했다.
강렬한 악이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페르세토스의 과업을 실현했다.
결국 마지막 순간, 에반은 또 한 번 무력하게 세상이 짓이겨지는 것을 보았다.
7회차에 회귀한 에반의 눈은 더 이상 보통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백년이 넘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라 더는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반쯤 미쳐 버린 눈에는 공허한 절망만 가득했다.
그는 체노아 테일러스와 테일러스가의 모든 일원들을 죽이고 다른 가문으로 향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이를 죽였다.
세상을 정말 끝내 버리기라도 할 듯.
선조인 카이사는 상대도 안 될 만큼의 학살을 저지른 뒤, 세상은 빨간 피에 물들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 에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 내 안에 있구나, 페르세토스.
그리고 그가 검을 쥐어 제 목을 찌르려는 순간 손이 멈추었다.
페르세토스가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반의 몸에서 악이 뿜어져 나왔고 세상은 다시 멸망의 순간에 들어갔다.
공허한 에반의 눈에 오직 고통만이 가득했다.
8회차, 에반은 다시 눈을 떴다.
세상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득하고 그는 결국 혼자 있었다.
그렇게 스물여덟 번째로, 그는 깨어났다.
* * *
[푸른 매의 비밀이 파괴되었습니다.]
검은 영화관 같은 공간이 사라지고 나는 홀로 에반의 방에 서 있었다.
“후우…….”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아이템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방금 보았던 장면을 돌이켰다.
상영 시간은 무려 아홉 시간, 시간의 흐름이 바깥과 다른 게 천만다행이었다.
‘스물일곱 번째이다’라는 의미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스물일곱 번의 멸망, 죽음, 그리고 회귀.
에반 테일러스가 <원작> 이후로 겪어 왔던 순간들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모든 순간을 본 것은 아니다.
의미 있는 어떤 순간들만 축약해 보여 줬으니 말이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자에게 배신당하고,
페르세토스의 숙주라고 생각했던 악당을 무찔렀지만 실은 무고한 이였고,
때로는 절규하고 때로는 폐인이 된 모습.
피를 뒤집어쓴 살육의 장면들과……
하다못해 일곱 번째 회귀에서 살인귀가 되어 버린 에반 테일러스의 모습까지…….
페르세토스에 잠식당한 눈은 섬뜩하기까지 했었다.
“미쳐 버릴 수밖에 없겠어.”
나는 그 모든 순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아는 에반 테일러스는 꽤 인격이 닳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내가 응원하던 남자 주인공이었으니까.
원작에서 어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열흘 밤낮을 절벽에서 인내하던 에반은 아이들의 죽음에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는 냉혈한이 되어 갔다.
겨우 이성을 찾았지만, 다시 그 이성은 무너진다. 깨닫고, 절망하고, 일어서고, 다시 고꾸라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한, 한 인간의 끔찍한 몸부림.
아니…… 의미 없는 회귀 속에 갇혀 인간성을 잃어 가는 영웅의 몰락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였어…….”
그리고 나는 그 과정 속의 나, 아니, 샤샤 윈체스터를 보았다.
늘 같은 표정으로…… 에반에게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불쌍한 모습은 한결같았다.
스물일곱 번째 회차, 에반이 처음으로 샤샤 윈체스터에게 대답이라는 것을 했다.
― 언제나 이 순간.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 ……조금 질투가 나는군.
그리고 그는 가차 없이 샤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샤샤는 이전과 달리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최후를 맞았다.
불행한 샤샤와, 그런 샤샤의 죽음조차 부러워했던 에반 테일러스.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진이 목숨을 잃는 장면만 열 번을 넘게, 오셀로는 열다섯 번이나 보았다.
결말이 정해진 코즈믹 호러 소설의 쳇바퀴에서 에반은 힘겹게 달리고 있었다.
목줄을 멘 짐승처럼, 어쩌면 거의 포기한 채로.
“…….”
나는 에반의 ‘특별 구역’을 나왔다.
푸른 매의 비밀이 사라졌으니, 이제 제멋대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궁금해했던 그 책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나왔으니 더 이상 그 공간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내 인형을 정리하고 있던 마야가 황급히 따라 나왔다.
나는 엉망이 되어 있는 복도로 향하며 말했다.
“에반에게.”
* * *
내가 듣기로 이능의 폭주는 홀로 견뎌 내야 하는 것이다.
진도 그랬고, 오셀로도 그랬다고 들었지.
에반의 방문 너머 하인들과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들어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고 말이다.
에반의 몸은 조금 늘어진 채로 침대 위에 떠 있었다.
그의 몸을 검푸른 청명이 휘감고 있었다.
칼날처럼 거친 청명의 형태는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가씨이!”
에반의 방에 들어가려는 나를 마야는 황급히 말렸다.
“헉, 아가씨.”
그제야 시종들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스킬 ‘검은 지배(SS/LV.4)를 사용합니다.]
이능이 발현하지 않은 귀족가의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아이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보호가 짐이 되는 상황이다.
“윽!”
“몸이 움직이지 않아!”
이 정도는 해 줘야, 나중에 하인들에게 불똥이 튀는 경우가 없겠지.
“아가씨이!!”
나는 마야의 말을 무시하고 하녀와 하인들을 스킬로 제압하며 에반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에반의 과거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점이 있다.
스물일곱 번의 과거 모두, 이능의 각성 시점은 불과 네 살.
하지만 이번 회차의 에반은 최근에야 각성했다.
그것도 아마 내 방에 침입했을 때, 나를 만났던 것이 계기가 되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에반의 과거에서 이능이 각성할 때마다 에반은 상당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 번 회귀했음에도 어린 몸에 청명을 깃들게 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에반에게 다가갔다.
거친 칼날의 형태로 꿈틀대는 청명이 나의 스킬에 막혀 양 갈래로 흩어졌지만 그 기운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내가 올라타다시피 했는데도 에반은 의식이 없었다.
“정신 차려, 에반!”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확 물어뜯어 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에반의 얼굴은 너무 곱고 내 이는 소중하다.
“깨어나기 싫을 거라는 거 알아!”
이전 회차, 에반은 죽음을 부탁하는 샤샤에게 부럽다고 말했다.
스물일곱 번의 끔찍한 회귀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
영원한 안식을 원할 정도로 에반이 지쳐 있는 것도 이해가 간다.
“괴로웠다는 것도, 도망치도 싶었단 것도 이해해.”
이해한다는 내 목소리에 에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이 일렁이며 흩어져 있던 기운이 내 볼을 스쳤다.
볼을 타고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가 에반의 각성을 일깨웠다면, 틀림없이 지금의 폭주도 잠재울 수 있을 거야.
“아가씨이!”
바깥에서 마야의 애타는 부름이 들려왔다.
이제 청명은 방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청명은 에반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제 의지가 따로 있는 것일까.
나는 에반의 위에 올라타 멱살을 잡고 그에게 외쳤다.
“여기서 끝나면 다시 돌아갈 뿐이야! 그게 답이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잖아.”
페르세토스를 물리쳐야 한다.
그전까지 시간은 결코 에반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샤샤의 운명대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에반과 다시 회귀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다시 저승사자를 보게 되겠지.
하지만 주어진 인생을 그렇게 쉽게 날리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혼자가 아냐. 내가 네 옆에서…….”
에반의 멱살을 잡은 내 손이 덜덜 떨렸다.
엘릭서를 찾아 건강해지고, 힘이 닿는 한 에반이 페르세토스를 찾고 물리치는 것을 도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내 가족이 되어 버린 윈체스터 일가와 적당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잘 먹고 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고!
“……같이 있을게. 맹세해.”
그리고 그 순간 에반이 천천히 눈을 떴다.
격하게 일렁이던 청명은 검은 지배에 막혀 억눌러진 상태였다.
만약 검은 지배가 없었더라면 바로 죽었을지도.
나는 그의 눈을 보고 제법 또렷이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너보다 오래 살 거야.”
에반의 푸른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다.
내 눈가가 저리 붉었던가.
에반의 멱살에서 손을 떼려 했을 때, 에반이 문득 내 손을 붙잡았다.
떼지 말라는 듯.
“…….”
잠시 후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너는…….”
쉰 듯 갈라진 목소리였다.
에반의 기억 속, 샤샤 윈체스터를 베기 전 그는 그런 목소리였다.
문득 가슴이 욱신거렸다.
“……네가 한 말에 책임져야 해.”
에반의 눈빛이 원래 저랬던가. 아니다, 저러지 않았어.
내가 보았던 그의 어떤 기억 속에서도 에반은 저런 눈으로 동료를 본 적 없었다.
등골이 섬뜩할 정도로 형형히 번뜩이는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대감으로 착각할 정도로 강한.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문득 나는 에반의 곁을 위협적으로 맴돌던 청명의 기운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시퍼런 칼날은 물방울이 되어 에반과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리 온순했다는 듯 말이다.
청명의 폭주를 극복한 건가.
내 모험은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길들여진 짐승처럼, 형형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