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0화
“아가씨께서 에반 님의 폭주를 막으셨습니다.”
로웬은 방금 들어온 소식을 레카르도에게 전했다.
“주치의를 포함해 하인과 하녀 여럿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에반 테일러스의 청명이 폭주한 상황을 샤샤가 막았다고 한다.
진과 오셀로조차, 이능의 적응 기간에 누구도 가까이 가기 힘들어했는데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다니…….
탄식 같은 한숨이 함께 나왔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탁― 하고 레카르도가 책을 덮었다.
“윈체스터답지 않게.”
레카르도의 목소리는 서늘했으나 기분이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
‘윈체스터답지 않다’는 윈체스터가의 아이들을 꾸중할 때 쓰이는 말임에도, 어조가 묘하게 달랐다.
“다행히도 아가씨의 부상은 볼을 살짝 베인 것 외에는 없다고 하십니다.”
로웬은 레카르도가 궁금해할 만한 것을 보고했다.
레카르도의 답은 더 이상 없었지만, 로웬은 윈체스터 공작가의 모두가 샤샤 아가씨의 안위를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페르메티스 님의 사과를 받아 내실 때도 적극적으로 나서셨죠.”
소란스러운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로웬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페르메티스에 밀리지 않고 따지고 있는 샤샤였다.
하녀들을 위해 나섰다는 것은 놀랄 것도 없었다.
샤샤가 아랫사람들을 위해 지혜를 나눠 주거나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혈족들 사이에서 샤샤를 괴짜로 불리게 만들었으니까.
샤샤는 사소한 평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똑똑하면서 인정받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소소하면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즐겨 했다.
“정의감이 강한 성격이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윈체스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속성이다.
테일러스의 후계자 따위, 폭주해 죽게 놔두었어도 될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속성들이 그녀를 삭막한 윈체스터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의감이라.”
레카르도는 입술 끝을 비틀었다.
“트리샤를 닮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샤샤의 모친을 떠올렸다.
이능의 폭주에 시달리는 일곱 살 아이를 위해 차디찬 연못 속으로 들어간 여자를 말이다.
오셀로는 그 일로 트리샤를 따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샤샤를 과할 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고.
“뭐…… 하지만 외양은 영락없이 공작 전하이십니다.”
눈치를 보는 로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은발은 세상에 오직 두 분뿐이죠.”
레카르도는 그저 창밖의 새카만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짙은 녹안에 과거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레카르도는 어느 호숫가에서 트리샤 퀠른을 만났다.
그녀는 깊은 지혜와 지식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스스로를 메키우스의 종이라고 불렀고, 신성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
윈체스터는 메키우스에게 선택받았다고 했다.
레카르도는 트리샤와 동침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트리샤의 배가 불러온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트리샤는 아이의 진정한 양친은 메키우스라고 하였다.
아이는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날, 메키우스의 열쇠라고.
― 부디 그때까지 아이를 잘 지켜 주세요.
어느 순간까지 아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배 속의 아이를 그의 딸로 키워 달라는 트리샤의 부탁을 들어 주었을 뿐이니까.
윈체스터의 시조가 했던 고대의 약속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썩 즐거운 일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 들 듯, 어쩌면 이제는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그래.”
레카르도가 대답한 것은 한참 후였다.
그의 입술에 서늘하지만 짙은 미소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 * *
나는 위험한 일을 한 벌로 아침부터 2주의 근신을 선고받았다.
의사가 와서 에반의 이능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고, 에반 역시 당분간 방을 나서지 못한다고 했다.
마야는 나를 말리지 못한 죄로 시녀장에게 크게 혼났다고 들었다.
벌로 빨래방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빨래 더미에 묻혀 지내야 한다고…….
마야에게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마야는 괜찮다고 했다.
― 어쩐지, 아가씨가 해내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하게도.
오히려 예전에 비해 나를 믿게 된 느낌.
그만큼 에반의 폭주는 어마어마했었다.
방이 엉망이 되고 문이 날아가고, 내가 막지 않았으면 저택이 날아갔을지도.
‘그나저나…… 예전보다 약해진 거 아니야?’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원래 네 살에 하던 이능 발현을 열두 살에 하다니. 이전 회귀보다 약한 능력의 에반이면 이번 회차에도 희망이 없으려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오히려 대기만성이라고 더 나아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꽃다운 나이에 일찍 죽기 싫다. 병이건, 세계 멸망이건 간에.
똑똑―
간만에 헥토르 할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는데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근신 중에 누구지?
“들어와.”
내 말에, 방 밖에 있는 하녀가 문을 열어 주었고 그 사이로 말끔한 모습의 진이 보였다.
나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 의자 밑으로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진을 본 것은, 어젯밤 에반의 방 앞이었다.
듣기로는 에반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아카다 측에 통신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사이에 나는 에반을 진정시켰었고.
연결이 되기 전에 일이 끝나서, 우리 가문 외 다른 곳 어디에서도 에반의 폭주가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
심지어 테일러스 가문조차도 말이다.
나는 소식을 듣고 돌아온 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해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애플파이야.”
진의 말에 나는 그제야 진의 손을 쳐다보았다.
“배고팠는데 고마워요, 오라버니!”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야가 벌 수행 중이라 그럴싸한 간식을 먹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야의 대타로 잠시 일하는 나이 많은 하녀는 내게 단것이라고는 이가 썩는다며 먹지 못하게 했다.
다른 하녀들이 조금씩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부족해!
마야가 그리운 이때.
“잘 먹을게요.”
반가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애플파이에 벌꿀 차라면 말이다.
“같이 드실…….”
“…….”
턱도 없는 진의 표정,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신나게 파이를 집어 들며 물었다.
“참, 몸은 괜찮으세요? 저번에 다친 거 같던데.”
진의 옷에 피가 묻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녀석의 피였어.”
“아…… 다행이다.”
싱긋 미소 지은 내가 파이를 베어 물려는 찰나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다행이지?”
멈칫한 나는 진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싸늘히 굳은 시선을 보고 그가 화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전과 달리 진의 몸에서 흑염이 흘러나오지 않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후회라는 걸 해 본 적 없는데, 이 꼴을 보니…….”
전에는 대기의 무게부터 달라졌으니까.
‘역시…… 화났겠지?’
제멋대로 행동한 건 사실이니까 그럴지도…… 내가 파이만 보고 너무 눈치 없이 좋아한 것 같다.
진이 한 발짝 내게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조금 굽혔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올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아.”
이내 진의 손이 내 볼에 닿았다.
청명의 날이 얕게 스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애써 절제하고 있던 흑염이 대기로 냉기와 함께 퍼져 나갔다.
“……연무장에서 죽여 버릴걸. 진심으로 후회되는군.”
거친 눈빛과 함께 나직한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랬다면 네가 다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잔혹하도록 냉철하고 이성적인 진의 모습이 사라진 것 같아 가슴이 덜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