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1화
“……그냥 베였을 뿐이에요.”
나는 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에반이 나를 다치게 했다는 것에 대해 진은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테일러스의 아이가 윈체스터의 아이를 다치게 한 것은, 아무래도 자존심과 연관된 것이어서일까.
하지만 그가 이렇게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그러니까, 처음이다.
지난번 에반이 나를 공격했을 때도 살기등등했으나, 내 상처를 본 지금만큼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조금 두려운 기색으로 진을 바라보자, 잠시 뒤 진의 흑염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오라버니.”
억지웃음을 짓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기 중에 진이 흩뿌린 흑염과 살기가 가득했다.
진은 어둡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네가 왜 그런 고집을 부리는지는 알겠지만.”
“…….”
“죽음 앞에서는 변명이 되지 않아.”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지난 어둠의 기일에, 레카르도가 경비견을 보여 주며 하던 경고가 떠올랐다.
“네…… 오라버니.”
진에게는, 내가 미래에 아플 것을 알기에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능력으로 그것을 아는 줄 알고 있을 테고 말이다.
“네 치료법에 대해서는 내가 더 조사할 테니, 앞으로는 잠자코 있어.”
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테일러스의 후계자도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오라버니의 말씀은 고맙지만.”
내 말에 진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내 손가락에는 에반과의 연결고리인 리소니아가 있었다.
“저는…… 계속해야 해요.”
나는 진을 보며 말했다.
“멈추지 않을 거예요.”
엘릭서이건, 밝은 미래이건 내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보았던 샤샤 윈체스터는 한 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러니 언제나 같은 결말일 수밖에.
진과의 관계는, 내가 보았던 어떤 회차보다 진전되어 보였으나 나는 그에게 내 운명과 미래를 맡길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음에도 내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유였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순간 진의 목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너…….”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 곁에 있는 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구나, 샤샤.”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진의 앞에서 지킬 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조심하겠다’뿐.
하지만 실수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짙은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진은 무거운 여운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혀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진을 보았다.
‘나를…… 많이 걱정하는 걸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자신의 공간, 스퀘어 안.
에반은 책상에 앉아 고서를 읽고 있었다.
4대 가문의 직계부터 방계까지, 한 번쯤은 접해야 하는 필독서 ‘가문의 기원’이었다.
메키우스는 페르세토스를 봉인하고 자신의 힘을 네 용들에게 나누었으며 이는 야누트 제국 이전의 황폐화된 왕국의 왕족, 퀠른에 의해 기록되었다.
아홉 장의 기록과 한 장의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유와 상징을 사용해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으나 오랜 세월 끝에 대부분이 해석되었는데, 이는 4대 가문의 역사가 되었으며 가문이 지닌 권력에 대한 정당성이 되었다.
그리고 카이사의 저주가 발현한 100여 년 전, 가문들은 향후 페르세토스가 다시 도래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은의 잔이 깨어져 영원한 혼돈과 뒤섞인다.’
가문의 기원에 나오는 메키우스의 예언에도 비슷한 상황을 나타내는 문장이 있었다.
‘푸른빛은 시간을 거슬러 전진하고 전진하리니.’
이 문장은 세상에서 오로지 에반 테일러스만이 의미를 알고 있는 문구였다.
청명의 힘을 가진 자신이 끝없이 회귀하게 된다는 것을 책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연못 위에서 영원한 새벽의 시간이 지리라.’
에반은 한때 검은 연못이 윈체스터 가문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고서에서 연못은 ‘터’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며, ‘검은’은 말 그대로 흑염.
새벽의 시간이 진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을 뜻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윈체스터의 일원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페르세토스가 부활하는 것을 보고 그 해석을 취소했다.
이후 예언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
에반은 억눌려 있던 제 청명을 끌어내던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썹을 굳혔다.
‘검은 연못이 그 아이를 뜻하는 거라면…… 그리고 새벽의 시간이 진다는 것이 멸망이 아닌 희망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전의 회차들에서 샤샤 윈체스터의 존재감은 미미했기에, ‘검은 연못’이 병약한 그 애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최근까지도 설마 하는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확신이 굳어지고 있었다.
다시는 청명을 발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오직 이번 회차에서만, 이유조차 없이 기운이 막혀 있었으니 말이다.
이 지독한 회귀도 끝인가, 하는 생각에 반가워질 정도로.
“…….”
에반은 물끄러미 책을 응시했다. 그 아이를 만나고 물꼬가 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 제 몸에 흐르는 청명의 기운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다.
진 윈체스터에 의해 무리했다고는 하나 폭주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새로운 힘.
그리고 그 폭주마저도…….
― 이번에는 내가 너보다 오래 살 거야.
에반은 제 위에 올라탄 여자아이의 붉은 눈가를 떠올렸다.
귓가에 똑똑히 들려오던 목소리.
“…….”
고사리처럼 약한 손목과, 병이 깊어 보이는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 샤샤 윈체스터, 하지만 저보다 강한 것들을 지혜로 꿇어앉히고 제 목표를 위해 착실히 나아가는.
이전의 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아이.
에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독초가 가득한 밭에 홀로 피어 있는 수선화처럼 잠시 눈길이 갔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회귀의 시간에 비하면 말이다.
목을 베기 전의 처연한 표정이 떠오르자 에반은 가슴이 욱신대는 것을 느꼈다.
“…….”
에반은 책을 덮고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에 짙고 푸른 청명이 서려 있었다.
흑백의 세상에서 하나의 찬란한 색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반 테일러스는 이 작은 공간 외에는 그 무엇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제가 끝내 무언가 가지게 된다면, 그는 놓을 생각이 없었다.
* * *
[스킬 : 검은 지배(LV.4/SS)]
나는 내 눈앞에 뜬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죽을 것이다. 틀림없이 죽고 말 거야.
어느 순간 강렬한 방어막이 꿰뚫림과 동시에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검은 지배(LV.5/SS)]
엉덩이가 아팠다.
진의 흑염은 가차 없었고, 내가 느낀 것은 뚜렷한 살기였다.
“오셀로의 대용이 되기에는 부족하군.”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오라버니.”
“혼자 해낼 수 있다며. 벌써 지친 건가?”
이곳은 연무장,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다.
그 일이란, 에반 테일러스의 폭주를 내가 가라앉혔던 것을 말한다.
에반은 내일부터 근신이 풀리게 되며, 나는 그동안 진에 의해 구르고 있었다.
― 대가주께서 내게 네 훈련을 맡겼어. 물론 내가 부탁했다.
아무튼 진의 태도는 이전에 비해 차가워졌다.
후계자로서 바쁜 스케줄의 그였지만 종종 나를 불러 괴롭…… 아니, 훈련을 시키고는 했다.
헥토르 할아버지가 정말 이런 훈련을 그에게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헥토르는 내게 흑염의 이능 쪽의 재능은 없다고 판단했으니. 책략과 판단이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나 진의 훈련 방향은 도서관이 아니었다.
그는 사나흘에 한 번씩 나를 연무장으로 데려와서 이렇게 굴리고는 했다.
엄청난 훈련 덕분인지 ‘검은 지배’의 레벨이 올랐지만 나는 진의 흑염을 막아 내기에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SS급 스킬이라 하지만 레벨 10은 되어야 진의 흑염을 5초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일어서서 네 의지를 증명해.”
내 볼 조금 베였다고 화난 것 같았던 모습은 허상이었던 걸까.
진은 내가 바닥에 굴러도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이런 몸으로 멈추지 않겠다고 허풍을 떤 건 아니겠지.”
“윽.”
“에반의 방에서 버틴 게 용할 정도로 약한데.”
일어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진의 강렬한 흑염이 다시 덮쳐 왔다.
진은 괴물이다. 레카르도도 괴물이야.
하지만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야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샤샤?”
강렬한 흑염에 맞서 다시 스킬 검은 지배를 발현하는 순간이었다.
“내 장식장에 얌전히 들어가는 거야.”
[A급 스킬 ‘피해 반사(LV.1)’를 획득하였습니다.]
오, 새로운 스킬이 나타났다.
그 순간 새로 획득한 스킬이 발현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진이 강렬한 기세로 내뿜던 흑염이 내 근처에 닿는 순간 퉁, 튕겨 나갔다.
“……!”
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기세 좋게 자신에게 돌아오던 흑염을 흡수하였다.
반동에 의해 뒤로 물러나던 나는 무릎에 힘이 풀렸다.
다시 엉덩방아를 찧으려던 찰나 단단한 가슴이 뒤에서 나를 받았다.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자 진의 눈이 보였다.
“방금…… 괜찮아?”
방금까지만 해도 내 앞에 있었는데, 얼마나 빠른 걸까.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 그를 마주 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내 의지를 눈빛으로 피력했다.
진의 뒤에 태양이 있어서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너는 항상 괜찮지.”
매번 두고 보기 힘든 건 나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