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2화
4년 전의 그날, 청소 담당 하녀 안네는 기분이 좋았다.
위에서는 그것들을 잘 폐기하라고 엄히 명령했지만,
“이리 비싼 것을 왜 버린담.”
그녀는 붉은 루비가 박힌 황금 드래곤, 그리고 티아라 장식이 달린 모형 목검을 소중하게 치마폭으로 감쌌다.
이것만 팔면 윈체스터 저택을 나가서도 수도 로젠토에 집 한 채는 살 수 있다.
“공자님께서도 새 출발을 하시려고 버리라는 걸 테니, 제가 대신 응원하는 마음으로 잘 써 드리겠습니다.”
진의 방 한쪽 면은 전체가 장식장으로 되어 있었다.
강박적인 수집벽이 있는 진은 제게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수집해 오곤 했다.
그리고 그중 대다수는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 주신 장난감들이다.
아름다운 인형들과 보석들도 있었다.
그리고 동생인 오셀로 공자를 닮은 인형들을 주문 제작하여 전시해 두기도 했었고.
어느 밤, 아홉 살의 진은 그것을 모두 정리하게 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뿐 아니라 귀하게 수집한 것들도 몽땅 비워 버리라고 한 것이다.
하인들은 진의 의중에 대해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안네에게는 좋은 일로 여겨졌다.
이리 귀한 물건들을 하녀의 몸으로 평생 어찌 손에 넣을 수 있겠는가.
끼익―
다락에서 제가 훔친 물건을 확인하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아니겠지?”
안네는 누가 다락을 뒤져볼까 봐 치마폭에 얼른 그것들을 숨기고 아래로 내려왔다.
“…….”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가슴 정도 오는 어린아이였지만 안네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섬뜩함을 느꼈다.
“고…… 공자님,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요.”
올해 아홉 살 난, 윈체스터가의 후계자 진 윈체스터.
그 아이가 안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았구나.”
진 윈체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이 기운을 어찌 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손짓 한 번이면 자신을 찢어 버릴 수 있는 괴물의 아이도 아이란 말인가.
“왜 내 것을 훔쳤지?”
안네는 본능적으로 진이 자신을 추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자님…….”
숨기고 싶었으나 통하지 않을 얼굴이다.
손의 힘이 풀리자, 치마폭에 있던 보물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진은 가치 없는 것을 보는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안네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쓸모없어 하시는 것이라서 제가 손을…….”
“쓸모없다고 생각한 적 없어.”
진이 안네의 말을 끊었다.
거인의 그림자 같은 진의 그림자가 안네의 위에 드리워 있었다.
“밀려난 것뿐이야. 더 흥미로운 것 때문에.”
더 흥미로운 것이라고?
진이 가진 물건들은 엘르 토이숍의 상품 중에서도 최상위급에 있는, 실제의 보물과 별반 다름없는 가치를 가진 것들이다.
제국에서 이보다 가치 있는 장난감들은 없을 텐데 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공자님.”
더 생각할 것 없이 안네는 머리를 숙이고 싹싹 빌었다.
여기서 살아나가는 방법은 작은 주인의 자비에 기대는 것밖에 없으니까.
간절한 탄원이 닿았는지 진이 비스듬히 입을 열었다.
“살려 줄게.”
“아…… 감사합니다.”
“나와 놀이 한번 하면.”
안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잔혹한 소년이 입술을 달싹였다.
“숨바꼭질.”
안네의 얼굴이 두려움에 물들었다.
한참 뒤 다락에서는 개의 으르렁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렸다.
* * *
샤샤를 보낸 진은 피로한 표정으로 제 방에 들어갔다.
오셀로와 완전히 똑같은 구조의 방, 문이 닫히고 그는 벽면의 장식장을 보았다.
성인 남자 어깨 넓이만 한 장식장에는 4년 전 안네로부터 다시 회수했던 장난감 몇 개가 상단에서부터 차례로 놓여 있었다.
진은 그 앞으로 다가가며 입술을 달싹였다.
“확실히, 너무 빈약하긴 하지.”
그리고 손을 뻗어 장식장의 고리를 잡은 뒤 느릿하게 당겼다.
“더 채워 넣어야겠군.”
철컥― 소리가 들리자마자, 장식장이 있는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은 반 바퀴를 돌며 안으로 들어갔고, 드러난 공간이 훨씬 넓어졌다.
그리고 진의 진짜 장식장이 나타났다.
원래의 벽면뿐 아니라 벽이 드러나며 드러난 공간 모두 장식장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똑같이 생긴 인형들 수백 개가 있었다.
아니, 똑같이 생겼다고 하기에는 미세한 차이들이 있었다.
머리숱이 많지 않은 아기의 인형, 그보다 조금 큰…… 쪽쪽이를 물고 있는 아기의 인형,
그리고 아장아장 걷는 인형, 우유병을 들고 있는 인형.
머플러를 걸치고 있는 인형, 겁에 질려 있는 인형, 활짝 웃고 있는 인형.
그 인형들의 공통점은 모두 실제 사람처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것과, 은발, 녹안을 가졌다는 것이다.
부서진 공을 얼기설기 붙인 것을 안고 있는 인형도 있었다.
로젠토에서 제일가는 인형 공예가가 진의 의뢰를 받아 만든 극상품들이었다.
“…….”
진은 그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공중에 인형의 볼을 향해 금을 그어 보았다.
흑염을 쓴 것도 아니기에 아무 생채기도 나지 않았지만, 진의 눈빛은 서늘했다.
“넌 무엇보다 가치 있어.”
인형의 공허한 녹안은 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형에 영혼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진은 샤샤의 특별함을 닮은 물건을 남기고 싶었다.
장식장의 가운데에는 꽤 커다란 공간이 비어 있었다.
사람 하나를 가두는 감옥으로도 쓸 만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실물이 아니라 다 대용품일 뿐인데.”
진은 자신의 물건을 허락받지 않는 인간이 손대거나 훔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실물이 상하면 소용이 없어.”
그래서 이런 상황은 겪어 본 적 없었다.
위태로이, 물가를 향해 가는 수집물.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건가…….”
진의 눈동자가 탁해지는 순간 바깥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진은 원래의 서늘한 표정을 한 채 장식장에서 돌아섰다.
진이 몇 발짝 걷자 벽은 다시 반 바퀴를 돌아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잠시 후 진이 물었다.
“누구지?”
“샤샤예요.”
눈썹을 꿈틀 움직인 진은 문을 열었다.
샤샤가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인형의 것과는 달리 터무니없이 밝고 청아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진은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
“훈련은 충분했던 것 같은데.”
“아뇨, 그것보다…….”
샤샤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에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쿠키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사과하려고요.”
“사과?”
샤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오래 생각한 샤샤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완전 어렸을 때는 오라버니를 오해했던 적도 있어요!”
진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
“악당 같은 사람이라고요. 위험할지도 모르는.”
그 말에 진의 손이 흠칫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무서워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라버니는…….”
샤샤는 눈동자에 진을 담은 채 말했다.
“한 번도 제게 위험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항상 도와줬어요. 저를 위해 엘릭시아를 가져다주고, 위험한 것으로부터 지켜 주고.”
진은 반박하려는 충동을 잠재웠다.
“훈련도, 번거로울 텐데 저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고…….”
저 장식장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아도 네가 나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을까, 묻고 싶었지만.
“……!”
진의 녹안이 흔들렸다.
샤샤가 진을 끌어안은 것이다.
“그런데도 항상 제 맘대로만 하고. 미안해요.”
어린애답지 않은 말투, 순수하고 또렷한 목소리.
“앞으로는 오라버니의 마음을 이해해 볼게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상의도 하구요.”
샤샤는 진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지내면서 진의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계산하지 않은, 순수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진심이 담겨 있기는 했다.
‘진은 날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미워하지 마세요. 어색하게 대하시는 거 싫어요!”
진 윈체스터가 심술을 부리는 이유도, 제 안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이 샤샤를 물가에 나온 어린애처럼 보듯, 샤샤 역시 진을 아이로 인식했다.
남들에게는 위험한 악당이지만, 속에는 순수한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조금이라도 말이다.
“미워할 리가.”
한참 동안 바라보던 진은 샤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샤샤는 묵직하게 느껴지는 진의 손에 조금 안도했다.
샤샤는 진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녹안에 제 모습이 비쳐 보였다.
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내 방식대로.”
그저 희미하게, 뭔가 복잡한 생각을 한다는 것을 짐작할 뿐.
잠깐의 정적 후 진은 혼잣말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소중한 것을 대하는 방식은 남들과 조금은 다르지만.”
“…….”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 없던 샤샤는, 그저 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표정이 없는 편인 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작은 한숨과 함께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꽤 기쁘긴 하군.”
“…….”
샤샤는 눈을 깜빡였다.
진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아치형의 창으로 석양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내일은 같이 도서관에 가자.”
나직한 목소리가 위험하게 들릴 만큼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