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4화
작게 기침을 한 레카르도가 내게 물었다.
“원하는 것을 말해 보아라.”
나는 레카르도의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움찔했다.
“원하는 거라니요. 전 그냥 아버지가 아프셔서…….”
“…….”
레카르도의 짙은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게…… 고맙다는 표현인가?
나는 말을 이었다.
“저는 아버지의 딸이잖아요. 그냥 딸로서……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소식에 적당한 것들을 가져왔을 뿐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엄청나게 아픈 줄 알았다.
이렇게 멀쩡한 줄 알았으면 바리바리 싸 들고 오지는 않았을 거고.
“원래 가족은 그런 거잖아요.”
“…….”
레카르도는 내 대답에,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꽤 시간이 흐른 후 입을 열었다.
“……가족…… 이라.”
레카르도의 말에 나는 아, 하고 손을 움찔했다.
윈체스터가에 꽤 익숙해졌고, 이제는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해 본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윈체스터의 가풍이라면 아버지와 딸보다는 주군과 신하 분위기가 어울리기도 하고.
진이나 오셀로가 레카르도와 그러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처럼 말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레카르도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내 그는 찻잔을 들어 입을 대었다.
그가 다시 잔을 내렸을 때,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레카르도의 입술 끝을 보았다.
벌꿀 생강차가 효험이 있는 걸까.
“돌아가면 하녀들에게 더 준비하라고 할게요.”
레카르도의 것은 지금보다 덜 달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기침이 있을 때는 목을 따뜻하게 하는 게 좋아요.”
나는 레카르도를 보며 말했다.
이왕 말을 튼 김에 몇 마디 더 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말이다.
“…….”
레카르도의 셔츠 단추 두 개가 풀려 있어 안이 훤히 보였다.
뭐, 전생의 나라면 눈이 호강한다고 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내 아빠니까.
든든히 챙겨 주는 게 좋다.
레카르도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손을 들어 느긋이 단추 두 개를 잠갔다.
손가락 진짜 길고 예쁘다……. 그 순간마저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나는 레카르도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데…….”
조금 당황해 말머리를 꺼내 버린 나는 생각나는 것을 물었다.
이것만 묻고 이제 물러가야겠다.
“가…… 감기는 어쩌다 걸리신 거예요?”
잔을 놓은 그는 옆쪽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의 풍경은 겨울이었지만 이미 여러 번 겪은 겨울 동안 나는 한 번도 레카르도가 감기 같은 것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적 없었다.
“조금 무리했다.”
레카르도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레카르도는 사냥을 즐기며, 윌너스 산맥의 거대한 산짐승들을 사냥해 오곤 한다.
레카르도를 무리시킬 정도의 짐승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한 걸까.
“간만에 힘을 썼더니, 몸이 허해지더군.”
그의 시선이 여전히 창 바깥을 향해 있었다.
* * *
그날 새벽녘, 연무장에서 검을 빼내던 에반은 서늘한 기척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싸늘한 눈발뿐.
그리고 다시 자세를 돌렸을 때 어마어마한 위력의 무언가가 에반의 가슴을 퍽, 하고 쳤다.
“큭……!”
에반은 대비할 새도 없이 날아갔다.
붕 떠서 바닥에 떨어져서도 몇 미터를 밀려나고서야 멈추었다.
에반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에반은 손을 들어 그 피를 닦고, 어둠 속에서 저를 향해 걷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이 정도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청명이 발현했다고는 하나, 매우 부족하군.’
아직 몸이 회귀 전 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방증이었다.
“…….”
에반은 제 앞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눈바람을 등지고 있는 그는 레카르도 윈체스터.
어둠의 공작이자 윈체스터 가문의 가주였다.
“적의 애새끼를 죽이려면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텐…… 큭.”
흑염의 줄기가 에반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레카르도의 눈에는 소년을 향한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그는 스물일곱 회차 내내 야누트 최강의 악당이었으며, 에반 테일러스가 아니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악한 자였다.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차갑고 무표정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적의 애새끼이건, 아군의 애새끼이건 중요치 않다.”
에반은 레카르도와 시선을 마주했다.
스물일곱 회차의 회귀를 거친 그조차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럼…… 중요한 게 뭡니까.”
에반은 반항하듯 레카르도에게 입술을 비틀었다.
여전히 에반의 입술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테일러스의 가정교육은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윈체스터에서는 이렇게 배운다.”
흑염이 에반의 멱살을 놓자 에반은 툭 땅으로 떨어졌다.
“나보다 강한 상대의 것에 흠집을 내거나,”
이내 레카르도의 발이 에반의 손바닥을 짓밟았다.
“관심을 두지 말아라.”
꽉 누른 것은 아니기에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우위를 점한 자로부터 받는 철저한 경고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큭…….”
한참이 흘러서야 레카르도는 에반의 손바닥에서 발을 뗐다.
에반은 다른 손으로 제 손을 잡은 채 레카르도를 보며 말했다.
“당신도…… 여유가 없어졌군요.”
수많은 회차 동안 알게 된 레카르도는 허약한 막내딸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샤샤 윈체스터는 언제나 그의 관심 바깥이었고 말이다.
“…….”
레카르도는 잠자코 에반을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눈빛은 금방이라도 에반의 목을 얽어맬 것 같았다.
무거운 흑염의 기운은 레카르도가 허락한다면 단번에 에반의 목숨을 앗아 갈 것이다.
에반은 지금의 실력으로는 감히 레카르도를 이길 수 없었다.
“……하…….”
확실히 이번 회차는 지난날들과 달리 낯선 상황투성이였다.
지난 스물일곱 회차 동안 샤샤 윈체스터에게 관심이 없던 윈체스터의 악당들이, 지금은 다들 샤샤를 건드리면 죽을 줄 알라며 저를 협박하고 있다.
암왕, 잔혹의 가주 레카르도 윈체스터마저 이리도 노골적인 방식으로.
레카르도는 살기가 흐르는 시선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제 새끼를 넘보는 치기 어린 수사자를 보는 노련한 사자의 눈빛.
“…….”
이내 레카르도가 돌아섰다.
얌전히 방에 머물러 있을 때는 듣지 못한 경고였다.
난장판이 된 연무장, 윗몸을 일으킨 에반은 쿨럭, 하고 피를 토했다.
가슴에 가해진 거친 충격 때문이다.
“…….”
에반은 레카르도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모험을 걸어 보기로 했다.
빌어먹을 스물여덟 번째 회귀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그것이 설령 이제까지의 적과 손을 잡는 것이라 해도.
“샤샤 윈체스터.”
그 이름을 부르자 레카르도의 발이 멈추었다.
“……그 애를 지키고 싶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