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5화
레카르도의 발걸음을 돌리기에, 그보다 더 적당한 이름은 없었던 모양이다.
“진정 죽고 싶은 모양인가 보구나.”
레카르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흑염의 기운은 대지를 흔들 듯 진동했다.
여물지 않은 이능을 가진 에반의 몸 역시 그것에 공명해 한쪽 손이 떨렸다.
에반은 의지를 발휘해 그 떨림을 멈추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레카르도의 시선에는 자비라고는 한 줌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에반은 입을 열었다.
“……샤샤 윈체스터에게 위험이 닥칠 겁니다.”
일순간 레카르도에게서 뻗어 나온 흑염의 칼날이 에반의 목 바로 앞에 멈추었다.
아찔한 위협의 순간이었지만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에반이었다.
에반은 서늘한 눈으로 레카르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에반의 푸른 눈동자가 불타는 얼음처럼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당신과 당신의 가문에게 협조할 생각입니다.”
협조를 말하는 눈빛치고는 반항적이며 도전적인 눈빛이다.
그 말에 레카르도의 입술이 비틀렸다.
“내 눈앞에서도 샤샤를 공격했던 걸, 잊었다고 생각하나.”
“확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에반은 레카르도를 응시하며, 리소니아를 찼던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페르세토스가 아님을 확신하냐 묻는다면 답하지 못하겠지만.
에반이 확인하려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눈썹을 굳힌 채, 레카르도는 에반에게 묻고 있었다.
“샤샤 윈체스터가 안전한지.”
에반의 답에 레카르도는 입술을 비틀었다.
“내 집이 내 딸에게 위험하다는 말을 하는 건가?”
페르세토스는 윈체스터 공작가 일원들의 몸에서 가장 많이 부활했다.
모두가 샤샤 윈체스터에게 이전의 회차들과는 다르게 대하고 있다고 하나, 개중에 적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에반은 그녀를 페르세토스로 의심하는 것에서 생각의 방향을 변경했다.
샤샤가 정말 페르세토스의 영원한 새벽을 끝낼 존재라면, 일전에 카이사의 저주에 걸린 자가 샤샤 윈체스터를 습격했던 일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애의 주변에 페르세토스가 있다면, 그 애를 죽이려는 자신을 막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은 단번에 샤샤를 위해 움직였다.
페르세토스가 안에 있었다면 진의 몸이 일시적으로라도 움직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렇습니다.”
에반은 떠올렸다.
초반의 회차들에서 무수히 제 동료들에게 말하였으나,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그 이야기들을.
어느 회차부터 에반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잠시의 위로는 독일 뿐이고, 결국 멸망을 짊어지는 것은 오롯이 자신뿐이었으니까.
누구도 제 곁에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나 적이었고, 앞으로도 테일러스의 적일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묻고 있었다.
어쩌면 그 속에 페르세토스를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가.
“당신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레카르도 공작.”
에반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 뒤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오로지 나만 알고 있는 사실들…….”
그러나 그 말이 이어지기 전에 에반은 눈을 크게 떴다.
흑염이 에반의 가슴을 다시 후려쳤기 때문이다.
강한 파동과 함께 에반은 다시 연무장의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수 미터를 밀려간 에반이 멈추었다.
“당신, 무슨 짓입니까.”
서늘한 흑염의 기운을 흘리는 레카르도가 다가오며 말했다.
“테일러스의 어린애 주제에 진실이니 뭐니 가소롭게 떠들어 대는군.”
“헉…… 헉…….”
“이야기를 듣기 전에.”
에반의 입가를 타고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네가 내 앞에서 뭔가를 지껄일 자격이 되는지 시험해 봐야겠다.”
에반은 눈을 부릅뜨고 레카르도 윈체스터를 노려보았다.
“……컥!”
쿠과과광―!
에반이 다시 한번 레카르도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네 아버지 대신 버릇도 잡아 줘야겠지. 윈체스터의 방식으로.”
샤샤 윈체스터의 일로 이곳에 와서 자신을 후려쳤을 때, 잠시나마 그가 적어도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아버지처럼 보였다.
“이야기는 그 뒤에 듣겠다.”
하지만 위협적인 흑염을 드러내며 포식자의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는 이 순간,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제가 스물일곱 회차 동안 보았던 악당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런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오직 그 아이에게뿐이라는 건가.’
에반은 입술을 비틀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손에 들었다.
레카르도의 손을 빌리기 위해서는, 오늘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청명의 힘은 건재했다.
에반은 검에 청명을 실은 채 레카르도를 향해 거세게 달려들었다.
* * *
새카만 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추위가 느껴졌다.
[이름 : 샤샤 윈체스터(LV.7)]
[직업 : 무직]
[특성 : 딸랑이 마스터, 꼬마 탐구자]
[능력치: 체력 18 / 근력 10 / 이능 ― / 지능 31
*오픈되지 않은 능력치가 있습니다.]
[스킬 : 검은 지배(LV.5/SS), 피해 반사(LV.1/A)]
[인벤토리 : 370루비]
눈앞에 뜬 이건 내 프로필인데,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뭔가가 떠올랐다.
[퀘스트 : 때가 되었습니다. 메키우스가 선물한 이능을 발현하세요.]
[퀘스트 보상 : 모든 능력치 +8, 회복 포션, 상점 개방]
오! 드디어 상점이 개방되는 건가.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마 이 꿈속의 공간에서 퀘스트를 해결하라는 뜻인 것 같다.
저벅, 저벅.
나는 오로지 눈뿐인 검은 밤 속을 걸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꿈은 엔딩 맛보기를 볼 때뿐이었는데.
“저기요!”
하지만 특전 엔딩 맛보기와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그때는 적어도 어른 같은 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아이인 원래의 내 모습 그대로였다.
이왕이면 움직이기 편하게 성인 버전으로 해 주지.
뽀드득, 뽀득. 작은 발로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단서라도 주세요!”
문제는 퀘스트의 주제가 ‘이능을 발현하라’는 것에 있었다.
나는 고작 일곱 살이었다.
희대의 천재인 진은 네 살에, 오셀로도 일곱 살에 발현했는데, 내가 오셀로만큼 재능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알려줘야 하든가 말든가 하지!”
나는 투덜거렸다.
오늘 레카르도에게 차와 쿠키를 주고, 저녁에 잠들었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별안간 꿈속의 공간에서 갑자기 맨몸으로 이능을 발현하라니,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나는 이능 발현을 하지 않았어도 스킬 개방으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도 엄청 대단한 거라지만 이능 발현으로 쳐 주지 않는다.
이능이란 흑염이나 청명 같은 것을 부리는 것을 말하는데 나는 두 스킬 모두 방어가 고작이다.
“미뤄라도 주세요. 상황을 보니까 준비도 안 된 거 같은데?”
한참을 걷던 나는 하늘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그러나 역시 빈 하늘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 씨, 어쩌라는 거야.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두꺼운 옷이라 그렇게 춥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시렸다.
나는 계속 길을 걸었다.
이 저질 몸으로 30분 정도 걸으니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동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둘레가 어지간한 통나무집만 한 커다란 나무를 돌아 지나쳤을 때 발을 멈추었다.
“…….”
뭐야…….
……뭐야?
“어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 나무에 등을 대고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 체구는 보통의 어른보다 조금 작았다.
머리카락은 창백한 빛이 도는 분홍색이었고 말이다.
“……셀로?”
나는 황급히 다가가며 이름을 불렀다.
잠깐, 여기 꿈 아니었어?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는 오셀로의 어깨를 잡았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손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소름 끼칠 정도로 강렬하다.
마치 죽어 버린 사람처럼. 오셀로의 몸이 차가웠다.
순간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오셀로!!”
* * *
잠들었던 레카르도는 침대에서 윗몸을 일으켜 일어났다.
창밖은 아직도 검었고, 아련히 들어오는 달빛만이 반쯤 풀어헤쳐진 그의 상의와 탄탄한 가슴 근육을 비추었다.
그의 방에서는 윌너스 산맥이 보였다.
산의 최정상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그곳을 응시하던 레카르도가 침대에서 나와 검을 챙겼다.
따끔거리던 목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했다.
“…….”
레카르도는 꿈을 꾸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꿈속에 나타났던 트리샤 퀠른의 얼굴이 아직 뇌리에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