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7화
화려한 살육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진의 손짓에 거대한 바히모스들이 하나둘 재가 되었고 에반의 검에서는 아까 오셀로의 검에서 나왔던 형태와 비슷한 찬란한 청명의 빛이 펼쳐져 바히모스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이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레카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하나 의지가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흑염들은 땅을 뚫고 나오고, 하늘에서 떨어지며 바히모스들을 산산조각 내었다.
“…….”
지금의 모습이 ‘학살’로 느껴지는 이유 또한 레카르도 때문이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그의 눈동자 속의 바히모스들은, 한낱 찢겨지는 인형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바히모스가 한 마리씩 소멸했다.
“공작 전하…….”
뒤편에 있는 로웬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사람들이 레카르도를 ‘암왕’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진정한 왕의 능력이다.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레카르도가 우리 앞으로 다가와 멈추었을 때, 남아 있는 바히모스는 없었다.
“샤샤.”
레카르도의 목소리에 나는 그냥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친 곳은?”
열 마리도 넘는 몬스터가 고작 셋에게 완전히 당한 것이다.
“……저는 없지만.”
에반은 짙은 벽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히모스에게 당한 것은 아닐 텐데, 에반의 얼굴과 손엔 생채기가 많았다.
“쿨럭…….”
그리고 그때 오셀로가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를 내뿜었다.
나는 오셀로의 피에 젖은 소매를 보고 황급히 레카르도에게 말했다.
“오셀로가 다쳤어요……!”
“놈들이 함정을 팠습니다.”
내 말이 끊기자마자 오셀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나는 오셀로를 올려다보았다.
오셀로의 사나운 눈매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산중, 눈바람이 볼이 시리게 차가웠다.
“모든 일을…… 누가 꾸민 짓인지, 알아냈습니다.”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오셀로에게 향했다.
오셀로의 입술을 타고 비릿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 * *
“이쯤 되면, 공자를 돌려줄 때도 된 것 같은데 말입니다.”
베루스의 원탁, 체노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사고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말은커녕.”
레카르도는 서늘한 시선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군.”
“제멋대로 무단 이탈을 했다가 당한 사고인데 책임이라니.”
체노아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레카르도의 몸을 타고 서늘한 흑염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체노아의 몸 역시 청명의 기운으로 다소 푸르게 보였다.
“아아, 두 분 다 진정들 하시죠. 네?”
엘리시온 아카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칙적으로는 레카르도 공작님의 말이 옳습니다. 볼모 교환 거래에서, 테일러스가에 보낸 둘째 아드님이 사고를 당해 돌아왔으니 분노하실 만하죠.”
“자식 교육을 못한 책임도 물어야지 않겠는가. 사라진 볼모를 찾느라 테일러스의 많은 인력이 소모되었다.”
“뭐 체노아 공작님의 말씀도 틀린 것은 없습니다. 엄연히 규칙을 어기고 이탈한 것은 공자님의 과오이니까요.”
엘리시온의 목에서는 땀이 흘렀다.
여기서 체노아와 레카르도가 부딪치면 회의장 지붕이 날아갈 것이다.
“테일러스가의 편을 드는군.”
레카르도의 물음에 엘리시온은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요. 하아, 미치겠군. 아닙니다. 속으로 할 말이 바깥으로 나와 버려서…….”
두 가문은 언제나처럼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다.
“헤일로 공작님이 그립군요. 역시 재게 중재는 무리인가 봅니다.”
엘리시온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간 서로만 보면 원수 보듯 보는 두 가문의 중재자가 바네사였으니, 그럴 만하다.
“나는 자네에게도 불만이 많네.”
“제게 말입니까?”
“리소니아라니. 겁도 없이 설산을 찾아간 윈체스터가의 계집아이가 혹여 목숨을 잃었으면 나의 후계자 에반도 죽은 목숨이었다.”
“…….”
짙은 살기가 레카르도의 눈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곳에서 완력으로만 보면 제일 약한 엘리시온은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죽어? 목숨이 아깝다면 입은 조심히 놀리는 게 좋을 거야.”
명백한 협박이었지만 체노아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전쟁을 두려워할 성싶은가.”
대신 비슷한 강도의 살기로 맞받아칠 뿐.
월례 회의장의 분위기는 다시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 * *
에라시니스는 개나리처럼 노랗고 코스모스처럼 산들거리는 꽃이었다.
이맘때마다 저택 주변에 가득 피어 환상적인 군락을 뽐내었다.
프리지아를 닮은 향긋함은 덤이었다.
오셀로가 설산에서 발견되고 벌써 나흘째.
그리고…….
[이름 : 샤샤 윈체스터(LV.7)]
[직업 : 새싹 구원자]
[특성 : 메키우스의 열쇠]
[능력치: 체력 26 / 근력 18 / 이능 8 / 지능 39
*오픈되지 않은 능력치가 있습니다.]
[스킬 : 검은 지배(LV.5/SS), 피해 반사(LV.1/A)]
[인벤토리 : 회복 포션, 370루비]
[이능 각성으로 인해 (3)일간 상태 이상 면역 효과가 적용됩니다.]
내 프로필은 꽤 달라져 있었다.
우선 직업이 ‘새싹 구원자’라는 생소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특성 또한 ‘메키우스의 열쇠’라고 바뀌어 있었다.
이전에 부여된 특성을 유지하는 상위 특성으로, 모든 능력치에 ‘+8’을 해 주는 모양이었다.
상세 능력치의 이능 부분이 활성화되었고.
게다가 3일의 상태 이상 면역과, 근력, 체력 증가라…… 퀘스트 보상이 꽤 쏠쏠하다.
아무튼 나는 이능을 각성했다.
내 이능은 진과 오셀로가 가진 ‘흑염’과는 달랐다.
퀠른가인 어머니의 이능을 물려받은 것일까.
그러나 부모의 이능이 서로 다를 경우 더 강한 이능을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는데…… 왜 나는 흑염이 아니라 강화와 회복의 이능을 물려받은 것일까.
더 강한 이능인 흑염이 우성일 텐데 말이다.
오셀로가 위기에 처한 순간 오셀로에게 발현한 나의 이능은 그에게 엄청난 힘을 보태 주었다.
빈사 상태에 가까운 오셀로가 바히모스를 일격에 죽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금방 효과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신기하고 다행인 일이었다.
걱정인 것은 내 생명력을 대가로 한 힘이라는 문구.
이 부분은 조금 더 조사해 봐야 할 일인 것 같다.
― ……이능을 발현했군.
어쨌든 레카르도의 표정은 무서울 만큼 차가웠지만 추가로 나를 징계하지는 않았다.
만약 징계했으면 조금 억울할 것이다.
내가 가고 싶어서 설산 정상에 간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 믿어 주지는 않는 눈치였으니.
아무튼 퀘스트 완료. 살아 돌아왔음. 이능도 발현함.
문제는 오셀로가…….
“샤샤.”
꽃을 보며 지난날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어떤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바네사 헤일로가 서 있었다.
청색 똑단발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네사 헤일로. 레카르도나 체노아처럼 강력한 이능을 지닌, 4대 가문의 가주이다.
그녀는 물의 헤일로가의 가주로서, 여장부처럼 괄괄한 성격이었다.
“가주님.”
“딱딱하네, 가주님이라는 말은.”
나는 바네사 헤일로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바네사는 꽃을 보고 있는 내 옆에 앉았다.
“베루스에 안 가셨나 봐요.”
“가 봤자 체노아와 네 아버지 뒤치다꺼리만 해야 할 텐데, 슬슬 지겨워서.”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린이용 의자는 키와 덩치가 큰 그녀가 앉기에는 조금 작았지만, 삐걱대지는 않았다.
“윈체스터가의 생활은 어때?”
바네사의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좋아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간략히 대답했다.
처음에는 윈체스터 가문 탈출이 목표였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칼날로 만든 고슴도치 같은 레카르도지만, 딸에게는 다정한가 봐. 의외로.”
피식 웃음을 섞어 말하던 바네사가 이어 말했다.
“그나저나 놀랐겠네.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설산이었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산에서 오셀로와 내가 바히모스의 습격을 받은 일은 꽤 널리 퍼졌다.
바히모스가 이미 멸종된 몬스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카다에서는 신이 나서 바히모스의 시체를 샘플로 가져갔다.
“솔직히 믿기지가 않아. 내가 기억을 조금 확인해도 좋을까?”
바네사는 내게 물었다.
“너희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전에 습격당했을 때도 그러했듯.”
그녀의 손에 물빛 기운이 따사롭게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빤히 그녀를 바라보자,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