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8화
― 원칙적으로는 레카르도 공작님의 말이 옳습니다. 볼모 교환 거래에서, 테일러스가에 보낸 둘째 아드님이 사고를 당해 돌아왔으니 분노하실 만하죠.
― 자식 교육을 못한 책임도 물어야지 않겠는가. 사라진 볼모를 찾느라 테일러스의 많은 인력이 소모되었다.
바네사는 수구를 통해 월례 회의의 모습을 확인했다.
레카르도의 기세는 물의 구체가 흔들릴 만큼 강렬했고 체노아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엘리시온이 말려 보고는 있으나 역부족.
피식 미소 지으며 바네사는 수구를 흐트러뜨렸다.
흐트러진 물의 구체는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녀는 코너를 돌아 에라시니스가 흐드러지게 핀 꽃밭에 다다랐다.
윈체스터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 속, 무방비하게 홀로 꽃을 보러 나온 샤샤 윈체스터가 보였다.
“…….”
아이의 은발은 레카르도와 꼭 닮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녹안조차, 재미있게도.
그래서 바네사는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이내 태연히 앉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주님께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아이가 바네사에게 물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일곱 살배기의 비밀이래 봤자 침대 밑에 파이를 숨겨 두었다 정도이겠지.
“그래, 궁금하네?”
“오셀로가 정신을 차렸어요.”
그 말에 바네사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샤샤는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정말? 세상에, 다행이구나. 언제 정신이 들었는데?”
“세 밤 전에.”
샤샤는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바네사는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정원의 풍경은 너무도 평온했다.
“……그렇다면 오셀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 줬겠구나.”
샤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바네사는 꼬마의 무방비한 뒷모습을 응시했다.
바히모스들은 헤일로 가문에서 병기로 양성되던 개체들이었다.
인간의 손을 타지 않는 야수들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강력한 술법이 필요했는데, 바네사 헤일로는 ‘카이사’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테일러스의 방계 혈족을 납치하여 세뇌하고, 그들의 피를 바히모스들에게 이식한다.
털에 덮여 카이사의 문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수차례의 시도 끝에 바네사는 바히모스들을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
― 여기에서 뭐 하는 겁니까.
테일러스의 혈족 하나를 더 납치하던 과정에서 오셀로가 이를 목격했다.
그리고 오셀로는 그간의 샤샤 습격 사건의 배후가 헤일로 가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바네사가 그를 막지 않았다면 오셀로는 테일러스가로 달려가 진상을 밝혔을 것이다.
바네사는 바히모스들을 조종해 오셀로를 추격했다.
장장 칠 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오셀로는 어느새 윈체스터 영지의 산맥까지 도달했다.
쉬지도 않고 달려서. 그 어리고 끈질긴 것이.
“왜 그러신 거예요?”
샤샤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정말 궁금하다는 듯 바네사에게 물었다.
샤샤의 뒷모습을 보던 바네사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능이 발현했다고 들었는데, 정말 모르겠니?”
이내 바네사의 손에서 푸른 물줄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네사의 눈에는 점점 표독한 살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수룡의 예언을 받았다. 메키우스께서 널 선택하셨다더군.”
바네사 헤일로, 그녀의 권위에 도전할 자는 헤일로가에 없었다.
적통 후계자로서 탄탄대로를 지나 가주가 되었으며, 제국에서 그녀와 비견할 만한 자는 레카르도나 체노아 정도가 전부.
바네사는 결혼 적령기가 지나기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
눈에 차는 남자도 없었거니와, 스스로 가문과 결혼했다 여겼기 때문이다.
― 수룡을 모시면 뭐 합니까. 정작 가문의 영토는 척박하여 굶는 영지민들이 허다한데.
― 남쪽의 사막 지대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윈체스터에서 빚 대신 록센 영지를 가져가지만 않았더라도.
가문에는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헤일로의 토지는 아카다나 테일러스처럼 비옥하지도 않았고, 윈체스터처럼 광활하지도 않았다.
풍해의 복구 비용을 충당하고자 얼마 남지 않은 비옥한 토지도 팔아넘기자 영지의 사정은 더욱 혹독해졌다.
― 수룡이시여, 부디 헤일로를 보우하시어.
어느 방계와의 잠자리로 어느 날 바네사의 배 속에 아기가 생겼다.
― 예언을 성취케 하시옵소서.
길한 일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몸이라고는 하나 제 배 속의 아기는 틀림없이 헤일로의 후계가 될 터.
출산일은 수룡이 예언한 메키우스의 열쇠가 출현할 날짜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퀠른의 여자가 건강한 아이를 출산한 날, 바네사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비가 쏟아져 내리던 그날 수룡이 바네사에게 전언했다.
메키우스의 열쇠를, 윈체스터가 받았다.
― 어째서…….
태초의 용 메키우스가 나라의 화합과 영원한 평화를 위해 언젠가 ‘열쇠’를 줄 것이라는 예언은 은밀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윈체스터에는 힘을, 아카다에는 지혜를, 테일러스에는 광명을 주셨으니, 당연히 메키우스의 열쇠는 헤일로의 몫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열쇠조차도 윈체스터의 것이다.
― 어째서 헤일로에게는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너는 불행의 씨앗이다.”
바네사는 서늘한 눈으로 샤샤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문제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함정이었던가.
이 아이가 마중을 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너를 없애고, 바히모스의 강력한 군대로 윈체스터와 테일러스를 치려 했어. 제대로 시작도 못 했는데 네 오빠 녀석에게 들켜 버렸지만.”
바네사의 입꼬리가 들렸다.
체노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었다.
제가 보여 준 물의 영상으로 ‘카이사’가 발현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지.
바네사는 윈체스터와 테일러스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기를 바랐다.
불화의 씨앗을 뿌리고, 중재하는 척하며 더 큰 불화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왜…… 미워하는 건가요.”
샤샤의 말에 바네사가 피식 웃었다.
“미워하지 않아.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다 갈아엎어 버리고 싶을 뿐.”
수룡의 가문 헤일로, 평화의 중재자, 수호자.
모든 것들이 헛된 이름일 뿐이었다.
그러잖아도 척박한 환경 속, 메키우스의 열쇠에 대한 희망조차 윈체스터에게 빼앗긴 그녀는 가주로서 몸부림쳤을 뿐이다.
샤샤 윈체스터가 죽는다면, 메키우스는 다시 열쇠를 내려 주겠지.
틀림없이 이번에는 헤일로가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헤일로 영지의 척박한 땅에 물이 샘솟고, 모두가 풍요 속에서 살 수 있는 그런 낙원을 만들 수 있다.
바네사 헤일로는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순간, 샤샤는 몰래 들고 있던 소울 볼을 꾹 쥐었다.
“……!”
커엉―!
단검을 든 바네사의 손목을 커다란 개가 힘껏 물었다. 물린 손목에서 피가 흐르고, 쥐고 있던 단검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윈체스터를 지키는 세 머리 경비견 카테르가 소환된 것이다.
“윽!”
샤샤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났고, 바네사는 물의 힘을 손에 실어 카테르에게서 벗어났다.
깨갱―
바네사는 피가 흐르는 손목을 감싼 채 샤샤를 보며 말했다.
“반항해 보았자 넌 죽은 목숨이야, 샤샤.”
그러나 샤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테르는 진실을 끌어낸 뒤 잠깐의 시간을 벌 용도였으니까.
바네사 헤일로의 손 주변에서 머물던 물길이 창의 형태가 되어 샤샤를 향할 때, 먼 곳에서 돌진한 강렬한 흑염이 바네사를 덮쳤다.
쿠과과광!
엄청난 폭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다.
샤샤는 드레스 소매로 눈을 가렸고, 사방은 매캐한 흙먼지에 둘러싸였다.
바네사는 폭발이 있기 1초 전, 물의 보호막을 펼치며 간신히 자신을 지켰지만 그녀의 주변 땅은 파여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열쇠란 샤샤를 말하는 건가.”
흙먼지 사이에서 걸어오는 검은 인영에 바네사는 입술을 비틀었다.
레카르도 윈체스터. 그는 애초에 로젠토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월례 회의에 참석한 것처럼 꾸미곤 줄곧 이곳에 있었다.
“적의 적이니 가치가 있는 아이라는 것이겠지.”
말끔한 얼굴의 체노아 테일러스도 인상을 쓰며 나타났다.
그 뒤에는 복잡한 표정의 엘리시온 아카다가 바네사를 보고 있었다.
샤샤는 한 발짝 물러서서 레카르도의 다리 뒤에 섰다.
당했다. 바네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샤샤, 인정할 수밖에 없네.”
그 정도 수의 바히모스들이었다면 오셀로란 아이는 이미 찢겨져 시체도 못 찾았어야 맞다.
그러나 역시 ‘열쇠’는 다른 것인가. 그 와중에 열쇠, 샤샤 윈체스터와 함께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들켰으니.”
바네사 헤일로의 손가락 끝에서 물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아무래도 오늘 끝을 볼 생각인 것 같다.
“오랜만에 놀아 보도록 하지, 친구들.”
에라시니스가 흐드러지게 핀 꽃밭.
오늘 이 꽃의 대다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레카르도가 서늘한 흑염을 땅에서 끌어 올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곳은 내 집이고.”
서늘한 낮은 눈동자 속에, 바네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내 딸을 위협한 죗값은 고통과 죽음뿐이다.”
레카르도의 입술이 차갑게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