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69화
오셀로의 말을 들은 나는 꽤 놀랐었다.
바네사 헤일로, 성격 좋아 보이는 헤일로가의 가주가 흑막이었다니.
― 샤샤, 헤일로가 너를 죽이려고 해. 그녀의 부하를 잡아 사실을 실토받았어.
― 거짓 자백일 가능성은 없나.
레카르도의 물음에 오셀로는 고개를 저었다.
― 없습니다. 그리고 증거가 있습니다.
오셀로는 피로 얼룩진 품에서 바히모스의 가죽을 꺼냈다.
바히모스의 가죽에는 카이사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고, 헤일로에서만 발굴되는 흰 마석이 박혀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바네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원작은 이미 너무 많이 틀어졌지만, 내가 본 원작에서의 바네사는 호탕하게 웃는, 성격 좋은 가주일 뿐이었다.
윈체스터와 테일러스의 사이를 중재하다가, 윈체스터가 선을 넘으며 그녀는 테일러스의 편에 섰고 에반에게도 헤일로는 많은 조력을 한다.
그런데 어째서…….
― 바네사에게는 늘 아이가 있었다.
홀로 복잡한 심경으로 방에 있는데 에반이 들어와 말했다.
창가에 선 에반은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 아이?
― 아이는 늘 죽었지.
내가 ‘푸른 매의 비밀’을 통해서 본 에반의 기억은 중요한 사건 위주로 편집되어 있었기에, 중요하지 않은 세세한 정보는 스쳐 지나갔었다.
그러니 에반이 하는 이야기는, 자신이 수십 번에 이르는 회귀 동안 직접 보았던 것이다.
― 병으로 죽기도 하고, 사고로 죽기도 하고. 늘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어.
― 말해 줄 수도 있었잖아. 그렇다면 바네사에게…….
― 말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에반이 감정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야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어차피 살아남더라도 종말이 오면 죽게 될 아이였어.
무수한 회귀 동안 누군가의 죽음은 에반에게 점차 감흥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어차피 멸망으로 향해 가는 것들에 애착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
약한 자들을 위한 정의로운 심장을 가졌던 그는 그렇게 무감각해져 갔었다.
― 네 말이 맞아.
나는 에반에게 말했다.
기억을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바네사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일어났던 일을 보았다고 나를 이해할 수 없듯이.
그리고 내가 에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듯 말이다.
―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 하지만 지난 스물일곱 회차와 지금이 다른 것처럼,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해.
내 말에 에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 지금의 내가 이전 회차들의 나와 다른 것처럼.
그의 벽안 속, 내 모습이 비추어 보였다.
에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어 말했다.
― 네가 바라는 것이 변화라면, 앞으로는 너도 움직여.
왜냐하면,
― 가만히 있을 때보다, 움직일 때 변화는 더 크게 보이는 거잖아.
에반의 눈동자 속 푸른빛이 더욱 짙어졌다.
* * *
바네사의 물줄기는 흑염을 꿰뚫고 청명을 옭아매었다.
헤일로의 이능 수형이 저 정도 위력이라고?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울리고 하늘이 진동했다.
인간들의 싸움이 아닌 듯한 형국에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길래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파괴되고 있는 길을 태연히 걸어오며 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바네사를 끌어내는 계획에 당연히 나 빼고 모두가 반대했다.
그나마 엘리시온이 ‘가장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며 편을 들어주어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리소니아를 에반과 함께 끼고 있는 만큼, 테일러스의 부하들이 매복해 나를 엄호했고 말이다.
사실 레카르도와 체노아가 격돌했을 때, 바네사가 우리에게 리소니아를 끼운 이유는 명백했다.
나 하나만 죽이면 테일러스의 후계자까지 보낼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녀가 흑막인 줄도 모르고 모든 가문이 놀아난 셈이다.
“큭…….”
하지만 결국 바네사 헤일로는 레카르도와 체노아의 합공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지에 들어찬 흑염은 그녀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을 전부 기화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포기해라.”
레카르도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체노아는 ‘다 끝났군.’라고 투덜거리며 청명을 회수했다.
수백 개의 흑염의 날이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에서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레카르도가 손 한 번만 까딱하면 바네사는 소멸할 것이다.
“……하…….”
결국 바네사가 손을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체념이 들어차 있었다.
아름다운 꽃밭은 초토화되었으나 어쩐지 지금의 상황과 들어맞는 배경이었다.
바네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제 들어 보지. 저 보잘것없는 꼬맹이를 노리는 이유가 뭔지. 그 때문에 테일러스가의 혈족들까지 납치한 것인가, 바네사.”
체노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바네사에게 걸어갔다.
바네사는 강렬한 기에 눌려 강제로 무릎을 꿇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얼굴에 고통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아쉬움뿐.
“……용의 전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가문은, 4대 가문에서도 우리 헤일로뿐.”
바네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대로 헤일로만이 수룡과 전언을 주고받았다.
전언이래 봤자 연중행사라고 불릴 만큼 적은 횟수였지만, 이는 다른 세 가문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래서 보통 헤일로는 중재자로서 존재했다.
용의 후손이나 인간의 생각을 가진 가주들보다 용의 전언을 듣는 헤일로의 의견이 낫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수룡은 저 아이를 열쇠라고 하더군.”
바네사의 입술이 비틀렸다.
“번영과 영광, 평화…… 무엇에 대한 열쇠인지는 들을 수 없었으나, 메키우스께서 저 아이를 선택한 것은 분명하지.”
“바네사, 당신이 돌아 버린 것은 아니고? 고작 이런 어린아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체노아의 말이 끊겼다.
“트리샤 퀠른도 같은 말을 하고 떠났다.”
레카르도의 말 때문이다.
퀠른, 4대 가문처럼 강력한 귀족의 혈통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메키우스로부터 축복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용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특별한 꿈을 꾼다는 것도.
부모가 단명하여 어릴 적부터 삼촌의 집에 입양되어 자랐지만 트리샤 퀠른은 퀠른들 중 가장 순혈에 가까운 이였고 말이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해 있었다.
“…….”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메키우스의 열쇠, 내가 상태창에서 보았던 것이다.
원작에서 한낱 엑스트라였던 내가 정말 특별한 존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럼 에반은 뭐지? 에반이 회귀자이자 구원자에 더 가까울 텐데.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시험해 볼 생각이었지. 나의 아이와 그 무엇이 다르기에……!”
바네사의 절규 어린 외침이 나를 향했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짙은 절망이 흐르고 있었다.
그 외침에 짙은 정적이 그녀를 제외한 모든 곳에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메키우스께서 저 아이를 선택한 건가! 어째서 내 아이가 죽은 저주받은 날이 윈체스터에게는 영광의 날이 된 것인가!”
레카르도도, 체노아도, 엘리시온도 침묵할 뿐이었다.
“고통스러워하던 내게 ……자가 말했어. 샤샤를 죽이면 죽은 내 아이가 돌아와 메키우스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바네사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절규와 함께 그녀의 입에서 피가 컥, 하고 터져 나왔다.
나는 바네사에게 달려갔다.
진이 나를 붙잡았지만 힘껏 떨쳐 내었다.
레카르도가 눈썹을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바네사에게 말했다.
“가주님은 그날 아기가 죽는 걸 봤고…….”
바네사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저는 그날 어머니가 죽는 걸 봤어요.”
“…….”
나는 바네사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일련의 모든 사태의 흑막들이고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제가 가주님과 다른 점은…… 저는 그걸 이능으로 다시 볼 수 없단 거예요.”
그 순간 바네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바네사는 물을 통해 기억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회차가 지난번의 회차와 다른 점은, 바네사가 기억을 돌려 볼 수 있는 아기의 모습이 오로지…… 죽는 날의 그 순간뿐이라는 것이다.
“……아…….”
바네사의 입술 새로 신음 같은 절규가 퍼져 나왔다.
“아흑…….”
이내 그녀가 제 얼굴을 가렸다.
바네사는 수도 없이 그 기억을 돌려보았을 것이다.
아기가 첫울음을 우는 순간을.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을.
이전 회차의 바네사도 죽은 아이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 회차들의 바네사는 적어도 아이의 웃는 순간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멈출 수가 없었어.”
그러면서 끝없는 고독에 파묻혀 갔겠지.
언젠가부터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네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빗물에 섞여들었다.
나는 바네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도 멈춰요.”
나를 죽이려 했던 바네사였지만, 이 순간은 어머니였기에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이런 짓들을 한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바네사가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바네사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바네사가 입을 열었다.
“너를 처음 안았을 때, 사랑스럽다고 했던 말.”
“…….”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그건 진심이었어, 샤샤.”
그녀의 입가로 핏덩어리가 훅 흘러나왔다.
이내 그녀가 옷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헤일로에는…… 맡을 사람이 없어. 당분간 네가 맡아 줘, 샤샤.”
헤일로 가문에 있는 ‘수탑의 열쇠’였다.
윈체스터의 ‘흑탑의 열쇠’와 같은 기능을 하는 가보.
잠시 후 바네사가 축축한 바닥에 이마를 대며 고꾸라졌다.
입 모양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조심해’라는 말.
“피를 역류시켰군.”
레카르도는 서늘한 시선으로 바네사를 응시할 뿐이었다.
진이 재킷을 벗어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축축하다…… 그리고 마음이 허해.
나는 어디에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선이 향한 창문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