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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70화 (70/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70화

“하. 리소니아를 이야기할 때부터 그 여자의 고약한 생각을 꿰뚫었어야 하는 건데.”

윈체스터 저택의 접대실.

소파에 앉은 체노아의 눈썹 끝이 올라가 있었다.

체노아의 옆쪽에는 정복을 입은 에반이 서 있었다.

체노아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물기 묻은 소매를 털었다.

“그나저나, 이능이 발현했다는 것을 왜 보고하지 않은 것이냐.”

에반은 대답 없이 서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

“윈체스터에 잠입시킨 놈들은 다 다리가 부러져서 오고, 네놈은 연락 한번 없어서 이럴 바에는 보낸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체노아는 한쪽 다리를 다른 허벅지에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하나는 해냈구나.”

여전히 에반이 눈에 차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한참 꼬맹이인 일곱 살배기 샤샤 윈체스터도 이능을 발현했다는데, 에반은 지금 열두 살이었다.

“어쨌든 이 볼모 교환 계획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다. 네가 이능을 각성한 이상, 윈체스터의 둘째 놈을 데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손해이니.”

체노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범상치 않은 첫째 놈이라면 몰라도 말이지.”

진 윈체스터는 확실히 레카르도와 놀랍도록 결이 닮아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소드 오러를 사용하는 둘째도 견제 대상이었지만, 진만큼은 아니었다.

“마침 엘리시온 아카다가 있으니 거추장스러운 리소니아를 제거하고.”

“……싫습니다.”

말 중간에 섞여들어 온 에반의 목소리에 체노아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체노아의 눈이 에반을 향했다.

“…….”

청명이 한데 뭉친 듯한 에반의 짙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무거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체노아의 눈썹 끝이 다시 날카롭게 올라갔다.

“…….”

에반은 체노아의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체노아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에반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네놈이 고작 이제 청명을 각성했다고 건방지게 구는 것이냐.”

체노아의 손에 푸른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방 안에 걸린 액자들이 엄청난 기운의 파동에 달그락거렸다.

“그래 보았자 네놈의 힘은 내게 한참 미치지 못…….”

하지만 에반은 태연한 표정으로 체노아에게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제가 처음 아버지에게 이것을 사용했던 때가 9회차였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질투에 휩싸여 저를 죽이려 하셨죠.”

체노아는 분노 서린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폭주가 있었다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저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지 않았고.”

에반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달싹였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제 발목 잡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순간 체노아의 세상이 검게 변했다.

“이제…… 스스로 움직일 생각이니까.”

체노아는 놀라 청명을 사용하려 하였지만 손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체노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검은 공간, 그리고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어떻게 한 거냐! 에반, 네 짓이냐!”

보이지 않는 에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이제 제 말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느껴졌다.

체노아는 투명한 족쇄와 수갑이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반항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잠시 후 체노아는 다시 방에서 에반과 대면하고 있었다.

에반은 조용히, 제 손의 청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복종’. 청명이 다시 발현하며 그가 쓸 수 있게 된 기술이었다.

이능의 힘이 강대할수록 이능을 여러 방식으로 쓸 수 있다.

쌓아 온 경험이 많을수록 어려운 것도 쉽게 할 수 있었고.

“…….”

에반은 체노아를 바라보았다.

체노아는 발에 못이 박힌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앉으시죠.”

에반이 입술을 달싹이자, 체노아가 곧 자리에 앉았다.

체노아의 귀에 사슬이 철컹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내면의 전쟁일 뿐이었다.

체노아의 뒤로 간 에반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분간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협조해 주십시오.”

그리고 체노아의 뒤를 지나친 에반은 응접실의 문 앞에 섰다.

곧 문이 열리고, 엘리시온이 보였다.

“오, 에반, 오랜만이야.”

에반은 엘리시온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윈체스터에서의 생활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야기 나누시죠.”

에반의 나직한 목소리에 엘리시온은 하하, 웃었다.

“그래. 내게 시간을 내줄 생각은 없나 보구나. 조만간 또 보자.”

에반이 나가자 엘리시온은 응접실의 빈 소파에 앉으며 체노아에게 말했다.

“후계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콧대가 참 높죠. 그렇지 않습니까?”

“…….”

체노아는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마실 뿐이었다.

* * *

나는 에라시니스 한 송이를 옮겨 심은 은색 화분의 흙을 토닥거렸다.

마야는 바람이 쌀쌀하다며 내게 모포를 씌워 주었고, 나는 한참 동안 화분을 바라보았다.

그날 초토화된 꽃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에라시니스였다.

바네사의 마지막 얼굴이 떠오르자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대단한 꼬맹이라니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힐끗 오셀로를 바라보았다.

“널 죽이려고 했던 여자의 명복까지 빌어 주고.”

테일러스에 간 지 반년 만에 부상을 입고 잠시 돌아온 건데, 키는 왜 이렇게 훌쩍 큰 건지.

나만 여전히 땅꼬마 신세인 것 같다.

“……윈체스터로서는 실격이야.”

오셀로가 심술궂은 말투로 내게 속삭였다.

“딱히 명복을 비는 건 아니야.”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죽어 가는 것을 살려 주는 거뿐이지.”

“그래서 나도 살려 준 거고?”

오셀로의 진녹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있었다.

위기의 그 순간이 다시 떠오르자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나를 공격하려던 바히모스에게 오셀로는 기꺼이 제 어깨를 내줬었다.

“오셀로야말로 실격이야. 탈락!”

윈체스터답지 않게 말이다.

오셀로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미소 지었다.

“팔은…… 괜찮아?”

잠시 후 나는 오셀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옷이 피로 몽땅 젖었을 만큼 심한 부상이었다.

저택으로 옮긴 뒤에는 계속 의사들과 있었기 때문에 포션을 쓸 여력이 되지 않았고 말이다.

오셀로는 대답 대신 부상당한 쪽의 팔을 높이 들어 보였다.

일반적인 움직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바네사의 눈을 속이기 위해 오셀로가 늘 병상에 있었기에, 그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이야.”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셀로는 그런 나를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태연한 표정처럼 보이지만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 같기도 했고, 무거운 생각을 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정적 후 오셀로가 입을 열었다.

“강해지는 것에 이 정도로 욕심 난 적은 없었는데.”

조금 허리를 숙인 오셀로가 내 머리를 지나 볼을 쓰다듬었다.

“……토끼 같은 게, 자꾸 자극한단 말이야.”

나는 오셀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나를 빤히 보는 암녹색의 눈동자가 조금 서늘해 보인다는 것만 느낄 뿐.

이내 오셀로는 다시 몸을 펴고 뒤돌아섰다.

바람이 불고, 내 화분에 심긴 에라시니스가 흔들거렸다.

나는 에라시니스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꽃은 유독 창백해 보였다.

* * *

“메키우스의 열쇠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알아야겠죠.”

엘리시온은 ‘가문의 기원’을 레카르도와 체노아 쪽으로 펼쳤다.

이내 엘리시온이 착용하고 있는 팔찌를 통해, 글자들이 공중에 구현되었다.

“시간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제국에 이 책을 모르는 자가 있는가.”

체노아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가문의 기원’은 4대 가문의 일원이라면 필사본으로라도 몇 번은 접한 책이었다.

“내가 알기로 메키우스의 열쇠라는 구절은 없었다.”

체노아의 말대로였다. 비유와 상징으로 된 뜻 모를 예언서에 ‘열쇠’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네사가 열쇠 타령을 하지 않았더라면요.”

엘리시온의 말에 체노아는 눈썹을 꿈틀했다.

이에 엘리시온이 팔찌의 어떤 장치를 돌리자 글자로 가득 찬 예언서의 중앙부에 열쇠 모양의 선이 그려졌다.

“이 글자들은 수십 가지 공식입니다. 비유와 상징이 아닌 암호였죠. 정교하게 설계된 글자들의 공식을 풀면 특정한 글자들을 가리키는데 이를 연결하면 열쇠 모양이 됩니다.”

열쇠 모양의 테두리 안에도 글자들이 있었다.

“감탄했습니다. 천 년 전의 퀠른이 마법사들조차 해석하기 어려운 문자 수식법을 통해 이런 퍼즐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

“그리고 예언의 장에서 예언한 내용이 다름 아닌…….”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검은 연못 위에서 영원한 새벽의 시간이 지리라.’

엘리시온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레카르도에게 물었다.

“어쩌면 윈체스터가의 막내 공녀님과 연관이 있는 듯싶군요.”

레카르도는 대답지 않고 한참 동안 그것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 무슨 생각이 고여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우선 모두가 막내 공녀님의 안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겠습니다.”

엘리시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때 응접실의 문을 누군가 쿵쿵 두드렸다.

레카르도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엘리시온이 방해꾼의 등장에 눈썹을 찌푸렸다.

이내 문이 열리더니 창백한 얼굴의 로웬이 레카르도에게 곧장 고했다.

“공작 전하, 아가씨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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