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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72화 (72/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72화

레카르도는 잠든 샤샤의 방에서 나갔다.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마야가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제 회의장으로 돌아갈까요, 가주님.”

로웬의 말에 레카르도가 물었다.

“다급해 보이는가.”

“예……?”

레카르도가 로웬에게 시선을 옮겼다.

로웬은 바싹 굳은 채 입을 열었다.

“아, 조금은…… 그렇습니다. 다급하다기보다는, 걱정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어린 샤샤 아가씨가 저리 아프시니…….”

윈체스터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레카르도는 눈썹을 찌푸리며 미간을 짚었다.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자제할 필요가 있겠지.”

“네?”

“그럼에도 꽤나 어렵군.”

샤샤는 트리샤 퀠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성격이었다.

제집이면서도 제집이 아닌 것처럼 굴고, 영원한 객손님이 될 것처럼 먼발치에 물러서 있었다.

그러다가도 한발 앞서서 끼어들어 꽤 흥미로운 짓을 하기도 하고.

철들 것 같지 않던 오셀로의 비장할 얼굴이 떠오르자 레카르도의 입술이 잠시 비틀렸다.

“일부러 걱정을 감추는 것이 어색한 이유는, 누군가를 이렇게 걱정해 본 적이 없어서이겠지.”

곁을 내주지 않을 것 같은 그 위태로움이, 꽤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 그래, 윈체스터가 귀여울 리가 없지.

귀여운 동생에게 공공연한 수집욕을 드러내던 진 또한 그 한 축이겠고.

어쩌면.

“…….”

레카르도는 어두운 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은발은 달빛을 닮아 있었고 짙은 녹안은 검은 호수와도 같았다.

모두가 찬사했으나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외모였다.

― 메키우스의 아이는 윈체스터의 기운을 받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태어날 거예요. 윈체스터의 햇볕, 달빛, 그리고 바람…… 찬란한 흑염.

레카르도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그림자가 조용히 뒤따랐다.

* * *

“우우, 어지러워. 콜록.”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마야는 내 책을 치우며 눈치를 주었다.

마야 말을 들을 걸 후회하는 중이다.

아파서인지 확실히 전보다 기력이 떨어졌다. 수치상의 생명력은 그대로이지만, 이대로 점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든다.

“치료용 마법석을 가져왔습니다.”

잠시 방을 비웠던 의사는 영롱한 노란빛이 나는 돌을 가져왔다.

“치료용 마법석이요?”

“네, 테일러스 가문에서 지원하더군요. 고대 기술이 축약된 가보로 충분히 쓰고 돌려주시라 하셨습니다.”

의사는 내 한 손을 마법석에 올렸다.

“테일러스 가주께서 아가씨께 호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였습니다.”

생긴 모양새가 조잡하여 게르마늄 팔찌와 크게 다를 바 있을까 의심했지만, 의외로 손으로 뭔가 훅 빨려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건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내게 언제나 적대적이던 가주 체노아가 이런 도움을 주다니, 해가 서쪽에서 뜬 것일까.

“아카다에서도 몇몇 약재들을 보내왔어요.”

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번 바네사 사건 이후로, 4대 가문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뭔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확실히 내 이능이 특별한 힘이기는 하지만, 아직 나조차도 정확히 ‘메키우스의 열쇠’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들 아가씨를 걱정하고 계세요. 가주님도 식단을 신경 쓰라고 예산을 또 증액해 주셨답…….”

그리고 어느 순간 문이 불쑥 열렸다.

노크도 없이 야만적으로 문을 차고 들어올 사람은 역시 한 사람밖에 없었다.

“……길이 험하더군.”

오셀로는 뭔가가 든 바구니를 의사에게 던졌다.

그것을 받은 의사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아니…… 정말 사흘 만에 다녀오신 겁니까?”

내가 알기로도 헤일로의 얼음 계곡까지는 말을 타도 하루가 넘게 걸렸다.

마리하드 동굴도 매우 험하다고 들었는데…….

의사는 오셀로가 정말 사흘 만에 다녀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잠도 안 자고 달렸거든.”

오셀로가 들어온 뒤, 이어 들어오는 진이 질문에 답했다.

영 피로한 표정이었다.

“쉬지도 않았고.”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꼬맹이 몸인 내 시선에서는 어른처럼 커 보이지만, 진과 오셀로는 아직 성장기 소년들이라고.

애들이 사흘이나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이야?

여전히 이렇게 일찍 온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바구니를 펼친 의사가 버섯을 꺼내 들었다.

투명한 갓 모양의 버섯은 보석과 비슷하게 생겼다.

척 봐도 엄청나게 비싸고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콜록.”

“바히모스를 만나시지는 않은 거죠?”

마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에게 물었다.

진은 대답 대신 오셀로의 검집을 눈짓했다.

그의 검 손잡이는 붉은 피로 칠갑이 되어 있었다.

“버섯은 구해 왔으니 책임지고 회복시켜. 안 그러면…… 알 테지?”

“예…… 예, 알겠습니다, 공자님.”

이걸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의 바히모스가 도륙되었는지 상상이 되었다.

“이제 떠날 채비를 해야겠군. 곧 출발이라.”

오셀로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오늘이 오셀로가 테일러스에 돌아가는 날이라는 것을.

“오셀로…….”

나는 손을 뻗어 오셀로를 불렀다.

눈썹을 꿈틀한 오셀로가 내게 다가왔다.

아직도 이마에서 열이 나고 있어 내 볼은 꽤 빨갈 것이다.

“먀야, 그거…… 줘.”

오셀로를 보며 내가 말하자, 마야가 아차 하더니 방 안에 옮겨 두었던 그것을 오셀로에게 내밀었다.

“아가씨께서 준비하신 거예요.”

마야가 내민 것은 에라시니스 한 송이가 심긴 화분이었다.

“…….”

오셀로는 화분을 받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이걸 자기에게 주냐는 듯.

“루네, 넣었어. 콜록.”

내 말에 오셀로의 눈썹이 크게 움직였다.

흙의 맨 아래에 루네를 넣었다.

오셀로가 내게 준 곰 속에 있던 것과 같은 장치.

흙을 토닥토닥 덮느라 꽤 번거로웠었다.

“오셀로의 얘기도 듣고 싶어.”

역시 곰 인형에 대고 혼자만 이야기하는 것은 수치스럽다.

“…….”

오셀로는 말없이 한참 동안 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손을 들어 화분을 받았다.

고개를 숙인 오셀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조금 고개를 드는 것처럼 보였을 때, 오셀로의 손이 내 이마와 눈을 덮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각오해, 너.”

오셀로는 한참 동안 내 이마와 눈에 손을 얹고 있다가 이어 말했다.

“매일 시끄럽게 해 줄 거야.”

잠시 뒤 내 화분을 들고 오셀로가 방을 나섰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빛이 들어오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잘 사용하겠다는 뜻…… 맞지?

“상냥하네, 샤샤는.”

그를 배웅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이 몸으로는 어쩔 수 없다.

방을 나서기 전에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질투했을 만큼.”

피식, 입술을 비튼 진이 방을 나섰다.

진 윈체스터가 질투라고?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한다.

“곧 약을 달여 오겠습니다, 아가씨.”

한참 동안 방구석에서 버섯을 관찰하는 데 매진하고 있던 의사도 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그림으로만 보던 것의 실물을 이렇게 보다니, 감격이군요.”

아아, 저거 먹으면 좀 괜찮아지려나.

콜록 하고 기침이 다시 나왔다.

* * *

한 손에 화분을 든 오셀로는 대기하고 있던 테일러스의 마차를 향해 나아갔다.

마차 안에는 체노아 테일러스가 앉아 있었고, 문이 열린 마차 앞에 에반 테일러스가 서서 오셀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셀로는 에반 테일러스의 앞에 멈추었다.

에반의 시선이 오셀로가 든 화분으로 향했다.

에라시니스 한 송이, 그것을 본 에반의 입술이 다소 차갑게 비틀렸다.

오셀로 윈체스터와 처연한 에라시니스라.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스물일곱 회차 중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저 화분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뻔했다.

“…….”

둘 사이에 찬바람과 함께 짙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오셀로는 서늘한 시선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꿍꿍이로 이곳에 남는 것을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낮은 목소리가 에반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전에 했던 경고를 기억해. 내 동생에게 해가 되었다가는, 죽는다.”

말을 마친 오셀로는 다시 발을 내디뎠다.

이내 오셀로가 마차에 타자 문이 닫혔다.

“이랴!”

마부의 기합 소리와 함께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는 로젠토를 통해 테일러스 영지로 향할 것이다.

마차를 응시하던 에반도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태엽 인형처럼, 저마다의 특정한 궤도를 가지고 있던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얇은 계란 껍질처럼 툭 터져, 변화가 흘러나온다. 천천히.

저택 앞에 발을 멈춘 에반은 2층을 올려다보았다.

따스한 빛의 조명이 켜진 그 방은 왁자지껄했다.

“아가씨! 효과가 있으신 것 같아요!”

에반은 제 뒤를 바라보았다.

뒤로 키가 큰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는 늘, 무수한 죽음의 기억이 도사리고 있었다.

에반은 말없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발치 앞에는 이제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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